Route 1 RAW novel - Chapter 9
9. 느티나무 아래
금강 수목원 바로 앞에 있는 브런치 카페 ‘도북 97’은 세종시 아림 초등학교 선생님인, 현재는 육아 휴직 중인 김정윤이 약속 장소로 강력하게 밀어붙인 곳이다.
“알지? 나 잠실 살 때 자주 갔던 그 도북 97. 왜 너랑 나랑 몇 번 갔었잖아. 알리오 올리오도 먹고 리코타 치즈 샐러드도 먹었던.”
정윤이 차에서 내리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그랬나. 기억을 더듬는 수연의 팔뚝을 정윤이 찰싹찰싹 내려치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도북 97이 세종에! 외식의 불모지인 세종에!”
지금이야 이런저런 상가들이 많이 들어서서 밥을 사 먹을 식당도 많아졌지만, 정윤이 이사를 오던 몇 년 전만 해도 마땅한 곳이 많이 없었다. 그때부터 정윤은 늘 세종시를 외식의 불모지라 불렀다.
“무려, 주인 언니가 내려왔다고. 가자 가자 빨리 가 보자. 웬일이야. 도북 97도 세종에 오고 이수연도 내려오게 되다니. 나 처음 이사 올 때 생각하면 진짜 장족의 발전 아니냐. 그때 저기 전부 공사판이었는데. 자주 봅시다. 이수연 씨.”
차를 빙 둘러 돌아오더니 정윤이 트렁크를 열고 휴대용 유모차를 꺼낸다.
“같이해.”
“됐어. 내가 하는 게 편해.”
수연이 꺼내 주려 앞으로 나서자 고개를 저으며 단번에 휴대용 유모차를 꺼내더니 뚝딱 펼쳤다. 그리고는 뒷자리 문을 열더니 카시트 앉은 아이를 안아 올렸다.
“우리 공주님 착하게 잘 있쪘쪄요? 엄마 운전할 동안 안 울고 잘 있쪘쪄여? 아구아구 이뻐라. 엄마가 꺼내 줄께용. 읏차, 오른팔 빼고 왼팔도 빼고. 다 됐당. 우리 나진이 밖에 나왔네. 엄마랑 나왔네. 이모도 있네. 이모 안녕하세여, 해야지.”
머리에 왕리본 머리띠를 쓴 나진을 보며 수연이 안녕, 하고 인사를 하자 정윤이 대신 대답을 했다.
“이모 안녕하쩨염. 나진이에염. 또 만나네염. 엄마가 여자 표시 내려고 왕리본 해 줬쪄염. 어때염. 완전 여자아기져? 상남자 아니졈?”
한 편의 일인극을 보는 기분이다. 수연은 피식 웃었다. 얼마 전에 분홍 내복을 입혔는데도 남자아이냐고 물어봤다고 분개를 하더니, 리본 머리띠를 대량으로 샀단다.
연분홍 리본, 진분홍 리본, 레이스 달린 분홍 리본, 꽃 달린 분홍 리본으로 구매를 했다는 이야기를 나누며 정윤이 유모차를 밀고 수연은 문을 열었다. 도북 97 안으로 들어가 구석 편한 자리에 앉은 정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좋다. 이 맛에 외출하지. 너 완치 판정 받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그냥 만나자니깐, 지지배.”
나진을 낳고서 육아 휴직 중인 정윤과 얼굴을 본 것은 최근이 되어서이다. 약을 먹기 시작하면 전염성은 없어지지만, 아무래도 어린아이가 있어 전화로만 연락을 하다가 완치 판정을 받은 후에야 약속을 잡았다. 그 뒤로 벌써 세 번째 만남이다. 만날 때마다 세종 곳곳의 맛집으로 안내하는 정윤이었다. 수연은 메뉴판을 들추며 정윤에게 물었다.
“뭐 먹을래?”
“여긴 알리오 올리오라니까. 내가 시킬게.”
정윤이 손을 들었다. 알리오 올리오 두 개, 리코타 치즈 샐러드 하나, 유자 에이드 한 잔에 커피도 한 잔, 아보카도 브런치까지 주문을 한 뒤 정윤은 몸을 굽혀 나진에게 말했다.
“이제 엄마도 좀 쉴게요. 우리 나진이 까까랑 딸랑이랑 잘 지내다 코 자는 거예요. 알겠죠?”
졸음이 오는지 나진이 크게 하품을 한다.
“오늘도 낮잠 안 재웠어?”
“당연하지. 나도 좀 살자. 밥은 편히 먹고 싶다구.”
흐트러진 머리를 끈으로 묶으며 정윤이 말했다. 수연은 그런 정윤을 토닥이며 말했다.
“아기 엄마, 많이 먹어. 내가 살게.”
“고맙다. 잘 먹으마. 운전만 아니면 맥주도 시키는 건데. 그나저나 무사히 왔네? 이수연 조만간 베스트 드라이버 되겠어?”
“말도 마.”
“왜, 무슨 일 있었어?”
“우리 집 앞이 왕복 2차선이잖아. 오늘따라 차가 왜 그리 많아. 내 뒤로 줄줄 붙는데……. 가다 보니까 내가 제일 앞에 있는 거야.”
“아, 그거 알지.”
“부담스러워서 죽을 뻔했어. 그 흔한 갓길은 왜 또 안 나오는지. 거기다 뒤차는 추월 신호를 줘도 안 가고. 결국 에브리 먼데이 들렸다 왔잖아.”
“나 초보 때 일부러 큰 트럭 뒤에 붙어서 갔었지. 맘 편히 느리게 가려고.”
“내가 딱 그 마음이거든.”
수연은 주먹을 쥐며 정윤의 말에 동의했다. 운전 이야기, 나진이 이야기로 수다를 한참 떠는데 샐러드와 음료가 먼저 서빙되었다. 빵에 리코타 치즈를 발라 한 입 베어 무는데 정윤이 물었다.
“그래서, 새로운 소식은 뭐 없고?”
정윤의 말버릇이다. 아무 때나 맥락 없이 그냥 뱉는 말.
‘뭐 새로운 소식은 없고?’라고 물으면 보통 수연은 이렇게 대답했다. ‘없지. 너는? 넌 뭐 새로운 일 없어?’
그러면 정윤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없지. 그날이 그날이여.’ 그냥 그렇게 주고받는 만담 같은 대화. 그날이 그날인 그런 날들에 주고받는 습관 같은 문장. 그런데 수연은 잠깐 태산을 떠올렸다.
“없지.”
대답을 하는데 정윤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요것 봐라. 뭐 있는데?”
“없다니까.”
“있구먼. 있어. 뭐야, 무슨 일인데?”
20년 지기 친구의 눈을 피해 갈 수는 없었던 걸까. 수연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봐. 있네. 있어. 뭔데? 어? 소개팅했나? 선 봤나?”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쿡쿡 찌르던 정윤이 가볍게 수연을 흘겨보며 말했다.
“다음에 얘기해 주기?”
아직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 수연의 마음을 읽었는지, 깊이 캐묻지 않았다.
“응.”
다음엔 해 줄 말이 있을까. 그러고 보면 장태산이 내려왔다, 그 두 마디 말을 빼고 나면 그다지 할 말도 없다. 심지어 중학교 친구인 정윤은 태산이 누군지도 모른다.
“날씨 좋다. 밥 먹고 수목원 산책할까? 오랜만에 피톤치드 듬뿍 마시자. 심신의 정화를 위하여.”
“저는 집에서 매일 듬뿍 마시고 있거든요?”
“나도 그냥 말만 해 본 거야. 가긴 어딜 가니 다리 아프게. 여기 앉아서 수다나 떨어야지. 그래서 뭐, 또 새로운 소식은 없고?”
정윤이 묻는다.
“아, 나 오늘 부동산 들를 거야. 세종에 방 구해야지. 이제 슬슬 알아보려고.”
“맞다, 너네도 내려왔댔지? 드디어 복직인가? 이제 더 자주 볼 수 있는 거야? 내가 아는 곳 소개시켜 줄까? 3생은 다리 건너야 하니까 좀 멀고 1생이나 2생이 좋은데……. 청사 쪽 도시형 생활 주택은 어때? 그러지 말고 나랑 나중에 같이 가 보자.”
파스타 면을 포크에 돌돌 감으며 정윤이 말했다.
“그래. 그러자.”
수연은 웃으며 대답하고 나진을 보았다.
“우리 나진이 잘도 자네. 예뻐라.”
새근새근 자고 있는 나진을 보며 태산을 생각한다. 비 오는 날, 점심을 먹자던. 빙그레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리는 사람을.
“그럼, 그럼. 잘 때가 제일 예쁘지.”
정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수연은 정윤을 보며 미소 지었다. 편한 친구, 새근새근 자는 아기, 맛있는 음식과 한적한 가게. 아직은 새로울 일이 없는 평화로운 오후였다.
“얘는 왜 아직도 안 와?”
정자가 가든 벽에 걸린 시계를 보며 중얼거렸다. 해가 넘어가는 저녁 시간, 수연이 아직이었다.
“누나? 정윤이 누나랑 저녁 먹나 부지. 엄마, 2번에 삼겹살 4인분 추가. 콜라랑 소주도.”
세호가 밑반찬이 담긴 그릇을 쟁반 위에 올리며 말했다. 태산은 핸드폰의 시계를 확인했다. 6시 50분. 딸의 귀가를 걱정하기에는 이른 시간이긴 했다.
“아냐, 아까 세종에서 출발한다고 전화했거든. 지금이면 오고도 남을 시간인데…….”
“느리게 오나 부지.”
“얘 오다가 또 어디 빠진 거 아냐?”
“그럴지도.”
세호가 누나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정자와 세호의 대화를 들으며 태산은 지글지글 익고 있는 삼겹살을 한 번 보고, 다시 한 번 핸드폰을 보았다.
금요일 특식으로 삼겹살을 미리 주문해 놓았고, 직원 회식을 겸한 식사는 한창 진행 중이었다. 소주와 삼겹살로 기분이 좋아진 작업반장님은 흥이 올라 소싯적 한 달에 기천만 원씩 벌어들였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디쯤 오고 있는 건지.
태산의 눈길은 자꾸만 마당 쪽을 향한다. 마당에 누워 있던 진돌이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었다. 수연이 오는 건가 싶어 고개를 조금 더 빼고 보았지만 경사로를 올라오는 차는 없었다.
그때 마침 띠리리리, 정자의 핸드폰이 울렸다.
“어, 왜 안 와. 지금 어딘데? 뭐어? 또오?”
정자의 목소리만으로 세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빠 지금 없지. 아까 천안에 모임 간다고 트럭도 가지고 갔는데? 알았어, 일단 세호 내려보낼 테니까 기다려.”
정자가 전화를 끊고 말했다.
“누나 느티나무 정자 앞에 있대. 고양이 피하다가 배수로에 앞바퀴 빠졌단다.”
“또?”
“누나 혼자 있단다. 얼른 가 봐. 가서 안 빠지면 보험 부르고.”
그러게 내가 차 끌고 가지 말라 그랬는데. 세호가 구시렁거리며 앞치마를 벗었다. 태산은 상 위에 놓인 냅킨을 뽑아 입가를 쓱 닦았다.
“엄마, 상은 치우지 말고 그냥 둬. 내가 갔다 와서 치울게!”
세호가 신발을 찾아 신으며 크게 외칠 때, 태산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내가 다녀올게.”
“형이요?”
세호의 물음에 태산은 답했다.
“현장 다니다 보면 자주 있는 일이라 어지간하면 그냥 뺄 수 있거든. 봐서 끌어야 하면 차 가지러 올라오고.”
옆에서 재민이 스스로를 가리키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빠질 뻔했잖아. 그것도 한겨울 저수지에. 죽을 뻔했지. 차 반절이 허공에 떠서 기우뚱기우뚱.”
“저수지에요?”
세호가 재민의 옆자리에 엉거주춤 주저앉으며 물었다. 재민이 바퀴가 얼음에 미끄러져 저수지로 빠질 뻔했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정자가 미안한 표정으로 태산을 보며 말했다.
“부탁을 해도 되나 모르겠네요. 애 아빠가 있었으면 금방인데, 마침 자리에 없어서.”
“어려운 일 아닌데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태산은 작업화를 신으며 대답했다. 밖으로 나오자 짙푸른 잉크를 풀어 놓은 것 같은 하늘이 보였다. 태산은 저녁의 산 공기를 크게 마시고 느티나무 밑에서 세호를 기다리고 있을 수연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비상등이 깜빡깜빡 주황빛으로 빛나고 있다. 수연은 느티나무 아래 평상에 걸터앉아 세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호가 내려올 굽은 길의 끝을 한 번씩 살피며 멍하니 앉아 있는데, 놀라서 후다닥 도망갔던 길고양이가 풀숲에 숨어 야옹 하고 울었다.
“얼룩이 너 언니한테 미안해서 그러지?”
대답이라도 하듯 풀숲 사이에서 고양이가 에옹 하고 운다. 가슴 덜컥하게 만든 범인은 바로 가끔씩 진돌이에게 놀러오곤 했던 얼룩 고양이였다.
“괜찮아. 안 다쳤으니까 됐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수연은 체념한 듯 피식 웃었다. 아까는 정말 심장이 튀어 나가는 줄 알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물체에 한 번 놀라고 다음 순간 쿨렁 빠지는 느낌에 또 놀라고.
집에 다 왔다고 방심한 상태라 더욱 놀랐다. 느리게 가고 있었으니 브레이크만 밟아도 부딪히지는 않았을 텐데 깜짝 놀라서 자신도 모르게 핸들을 틀어 버린 게 문제였다. 그리고 곧바로 덜컹 소리가 나며 앞바퀴가 수로에 빠져 버렸다.
얼룩이가 무사한지 확인부터 한 뒤 쿵쾅쿵쾅 뛰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인터넷으로 차 빼는 방법에 대해 검색을 했다. 이렇게 저렇게 하면 차를 뺄 수 있다는 글을 두 개 정도 읽었지만, 도통 해석이 되지 않아 빠르게 포기했다. 그리고 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포기하면 편하거든.”
풀숲 사이로 눈만 빼꼼 보이는 얼룩이에게 말을 하고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짙은 남빛의 어두운 하늘이 투명하게 맑았다. 그래도 하늘은 예쁘네. 속으로 중얼거리는데 굽은 길을 따라 누군가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세호, 너 빨리 안 오지?”
수연이 팔짱 턱 끼고 굽은 길을 돌아 나오는 세호에게 삐딱하게 한마디를 하는데, 세호가 아니다. 태산이 흙길을 따라 느긋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태산이 씩 웃었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 대충 쓸어 넘긴 머리카락,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 수연은 자신의 앞까지 태연하게 걸어오는 태산을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고양이였어.”
누가 뭐랬냐는 표정으로 태산이 손을 내밀며 말했다.
“키.”
수연이 손에 쥐고 있던 키를 태산에게 넘겼다.
“그냥은 못 빼. 아빠는 트럭으로 로프 걸어서 빼던데.”
뭘 믿고 맨몸으로 내려왔는지. 수연은 태산을 따라가며 말했다.
“일단 해 보고.”
수연이 미덥지 못한 눈으로 태산을 바라보았다. 태산이 차로 다가가다 말고 한 발 뒷걸음을 쳐 다시 수연의 앞에 섰다.
“차 빼 주면?”
“빼 주면 뭐?”
“밥 먹을래?”
남의 차 키를 쥐고서 그렇게 웃지 말라구. 수연은 태산이 왠지 얄미워 대답하지 않았다. 태산이 어르듯 한마디를 더 한다.
“차도 빼 주고, 맛있는 것도 사 주고. 남는 장사 아닌가?”
바퀴 빠진 차의 비상등이 애처롭게 깜빡였다. 이렇게 처박힌 나를 두고 농담 따먹기 하지 말고 빨리 꺼내 달라 말하는 것 같다.
“지금 협박하는 거야?”
“무슨 그런 섭한 소리를.”
“그럼 뭔데?”
“신청하는 거지. 데이트 신청.”
가벼운 농담처럼 태산이 말했다. 그딴 수작 어림도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싶은데 왜 헛웃음이 나는 건지. 태산이 눈썹을 쓱 올리며 말했다.
“어때?”
짙은 눈동자가 수연을 보고 있었다. 스치는 바람처럼 가볍게 물었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물음이다.
수연은 결국 태산과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을 자신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거절을 해도 되지만, 태산은 그럼 그러냐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일 테지만, 자신은 언젠가는 장태산과 밥을 먹게 될 터였다.
그게 오늘이 되었든, 내일이 되었든, 어느 비 오는 날의 점심이 되었든, 태산이 결심한 이상 그렇게 되고 말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눈 감아.’
불현듯 기억을 해 버렸다. 자신의 볼을 감싸던 태산의 커다란 손과 싫어, 대답을 하며 자신이 내쉬던 옅은 한숨을. 그리고 그 한숨으로 다가오던 태산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도.
수연은 잠시 태산을 바라보았다.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태산이 부드럽게 웃는다. 그렇게 웃으면 거절 못 할 줄 알고?
“싫어.”
“그럼 데이트는 빼고 밥만.”
“그것도 싫고.”
“그럼 밥 빼고 데이트만.”
나 참. 수연은 어이가 없어서 코웃음을 웃었다.
“부모님껜 비밀로 할게.”
태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 태산에게 무표정으로 대응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라, 수연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태산이 웃고 있는 수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없는 몇 초가 흘렀다.
“올라가기 전에 밥이나 한 번 먹자.”
태산이 웃음을 거두며 말했다. 그 말에 수연은 한 달을 생각했다. 길어 봤자 한 달.
이곳에 다시 올 일 없는 태산과 자신의 앞에 남아 있는 수많은 날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스치듯 만나 다시는 볼일이 없을 사이라면. 그 전에 밥 한 번이라면. 그냥 그 정도라면.
“차부터 빼고 얘기하시지.”
수연은 새치름하게 대답했다.
잘난 척하던 태산이 차를 못 빼서 끙끙거렸으면 좋겠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뭐야, 라고 중얼거리며 태산을 한심하게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
수연이 그런 상상을 하는 사이 태산이 자그마한 차로 다가갔다. 앞뒤를 살펴보고는 몸을 굽혀 배수로에 걸쳐진 바퀴도 유심히 본다.
한 바퀴를 빙 돌아본 태산이 운전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야말로 몸을 구겨 넣는 수준이다. 자신의 차가 경차이긴 해도 그렇게 좁거나 작다고 느낀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유난히 작아 보였다.
차에 탄 태산이 시동을 걸고 제일 먼저 한 일은 운전석 시트를 뒤로 미는 일이었다. 거의 끝까지 시트를 조정하더니, 룸미러를 자신에게 맞추어 조절했다. 그리고는 부릉, 부릉 소리를 내며 엑셀을 몇 번 밟아 보더니, 기어를 내리며 핸들을 빠르게 꺾었다.
부아아앙.
수연은 자신의 차가 그렇게 우렁찬 소리를 내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다. 용트림을 하듯 부앙 소리를 내며 후진을 한 작은 차가 순식간에 길 위로 멀쩡하게 올라왔다.
이렇게 쉽게?
너무 쉬워서 어이가 없을 정도다. 수연의 얼빠진 얼굴을 보던 태산이 창문을 내렸다.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워서 으쓱할 필요도 없다는 표정이다. 그게 더 재수 없다.
“타.”
남의 차에 앉아서 주인처럼 굴기는. 수연은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하지 마.”
“내가 뭘.”
“잘난 척하지 말라고. 자존심 상하니까.”
수연이 털썩 조수석에 앉으며 말했다. 태산이 웃었다.
“웃지도 마.”
“멋있었지?”
“하.”
“반했구나?”
“뭐래.”
“얼굴 빨개지려고 하는데?”
“아니거든?”
아니라 했지만 왠지 귀 끝부터 빨개지는 느낌이다. 수연은 고개를 틀어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봄을 알리는 개나리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다행이다.”
태산이 말했다. 무엇이 다행이라는 건지 모르겠어서 수연은 고개를 돌려 태산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서.”
너를, 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산의 시선이 잠시 수연에게 닿았다 떨어졌다. 마음을 감추지 않는 눈빛이 여전하다. 그 눈빛을 마주할 때면 숨이 버겁게 쉬어지는 자신도 여전하고.
모를 수가 없었지만, 모르는 척 시선을 돌리며 수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후두두둑 개나리꽃이 차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