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lesperson Kim Yubin RAW novel - Chapter 106
106화 – 싱가포르, 마케팅 콘퍼런스(5)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하필이면 유빈이 마케팅 컨퍼런스에 참석하기 위해 싱가포르로 출국한 다음 날 한국에 도착한 톰 로렌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14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지구 반대편으로 온 이유는 한 가지였다. 유빈을 만나 보기 위해서였다.
다니엘 듀레인 회장에게 확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사실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조금 더 만만한 나머지 당사자를 만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당사자가 회사에 없었다.
카일라 첼시 사장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톰 로렌스의 맞은편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뜬금없이 나타난 본사의 COO(Chief Operating Officer, 최고운영책임자)가 미스터 킴을 찾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COO는 본사의 부사장급이었다. 중역 중의 중역으로 첼시의 페이 그레이드보다 한참 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정도의 사람이 유빈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유빈을 아끼는 그녀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미즈 첼시, 미스터 킴은 언제 돌아오나요?”
“4박 5일의 일정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에 한국에 들어올 예정입니다.”
“하아, 그런가요. 젠장.”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고 무작정 찾아온 자신의 탓이었다.
“아, 미안합니다.”
욕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미즈 첼시, 혹시 셀아키텍트라는 회사와 친분이 있나요?”
“셀아키텍트요?”
“모릅니까?”
“아니요. 알긴 압니다. 얼마 전에 한국의 미디어에서 다룬 적이 있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바이오 쪽의 회사라고만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듀레인 회장님이 개인적으로 투자했다는 사실도요.”
확인차 물어본 톰 로렌스가 말하는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유심히 살폈다.
거짓은 아니었다.
듀레인 회장과 셀아키텍트를 연결해 준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톰 로렌스는 한국에 오기 전에 미래전략 연구소의 앤 해밀턴을 찾아갔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없었다. 태도가 뭔가를 숨기는 것 같기는 했지만, 더 파고들 수는 없었다. 톰 로렌스 역시 그녀가 누구의 손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지 데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단지 보이는 숫자로만 감사 보고서를 썼다고 했다. 톰 로렌스는 길게 묻지 않았다. 짧은 대화를 나눴을 뿐인데도 어지 데일의 발음은 알아듣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마크 램버트는 듀레인 회장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는 임무를 가장 신뢰하는 부하 직원인 톰 로렌스에게 맡겼다.
마크 램버트는 CEO가 되고 난 직후부터 모든 행동이 전임 CEO인 듀레인 회장과 비교되었다.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비용절감을 통해 순이익률을 올리고 배당정책을 강화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니엘 듀레인의 영광의 시대를 기억했다.
마크 램버트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일을 통과시키려면 이사회의 과반수 표가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영향력은 높이고 듀레인 회장에 대한 향수는 줄여야 했다.
어지 데일의 감사 또한 추진하고 있는 그 일의 사전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최근 조용했던 듀레인 회장이 언젠가부터 칩거를 접은 듯한 활동을 보이고 있었다.
COO로서 그의 역할 중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는 마크 램버트가 다니엘 듀레인에게 신경 쓰는 일을 최대한 줄여 주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이라도 듀레인 회장의 행보는 중요했다.
COO인 그가 한국이라는 나라에까지 망설임 없이 날아온 이유였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미스터 킴 말입니까? 음, 그는 뛰어난 직원입니다.”
첼시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뛰어난 직원이요?”
“뭐라고 할까요. 무슨 일을 맡겨도 기대하는 성과를 낼 수 있는 직원이랄까요. 중대한 일이 생기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톰 로렌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개 직원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확고해 보였다.
“미스터 로렌스, 그런데 무슨 일로 저희 직원을 찾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음…… 혹시 미스터 체어맨이 방한했을 때, 미스터 킴을 찾지는 않았나요?”
“네? 미스터 킴을요? 듀레인 회장님이요?”
첼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아닌 모양이군요. 그럼 이번 감사에서…… 아닙니다.”
톰 로렌스는 유빈이 감사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유빈 킴이라는 사람이 무슨 슈퍼맨이 아닌 이상 모든 일에 관여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그와 듀레인 회장과의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다.
“아무래도 바로 움직여야 할 것 같군요.”
“미스터 로렌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먼 한국에까지 오셨는데 식사라도 하고 가시죠. 지방에 출장 가 있는 마이어스 대표이사도 지금 급하게 올라오는 중입니다.”
“중요한 일이라 지체할 수가 없군요. 마이어스 대표이사에게는 안부 전해 주십시오.”
톰 로렌스가 가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획에 없던 싱가포르행이지만, 마크 램버트의 명령을 수행하는 일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대기 시간이 길지 않으면 좋겠군.”
수행하고 있는 톰 로렌스의 비서가 바로 싱가포르행 항공편을 알아봤다.
* * *
“오빠, 여기 비싸지 않아요?”
유빈을 따라서 들어가려던 주서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싱가포르의 관광 명소 중 하나인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에 들어올 때만 해도 전망대에 가겠거니 생각한 그녀였다.
물론 전망대도 좋았다. 다만, 배가 조금 고플 뿐이었다. 그런데 유빈이 호텔 57층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주서윤을 데리고 갔다.
“괜찮아. 빨리 들어와.”
이런 비싼 식당에는 평생 안 와 봤을 남자 같은데 유빈의 태도는 매일 다니는 사람처럼 자연스러웠다.
미국의 영업사원이었던 전생에서는 이런 고급 식당에서 저녁을 먹는 게 일상이었던 유빈이었다.
물론 주서윤이 그 사실을 알 리는 없었다.
웨이터가 예약된 자리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화려한 싱가포르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좋은 자리였다. 자리에 앉은 서윤은 술을 마시지도 않았는데 양 볼이 발그레해졌다. 만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그녀의 기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오빠! 야경이 너무 멋져요. 여기는 또 언제 예약한 거예요?”
“온라인으로 예약되더라고. 한 시간 정도 있으면 라이트 쇼도 한다고 하니까 저녁 먹고 구경하면 되겠다.”
“오빠, 혹시 선수 아니에요? 저하고는 맨날 회사 근처 백반집 가면서 다른 여자하고는 고급 레스토랑에 가고 그러는 거 아니죠?”
주서윤이 매력적인 미소와 함께 장난스럽게 물었다.
“하하, 내가 다른 여자를 만날 시간이 어딨어.”
“헤헤, 하긴 그러네요.”
유빈은 아이처럼 좋아하는 주서윤을 보는 게 즐거웠다.
생각해 보면 주서윤과는 회사와 회사 근처 식당에서 밥 먹고 이야기하는 일이 전부였다.
아직 고백하지는 않았지만, 영화나 연극을 본 적도 없고 교외로 놀러 간 적도 없었다.
라지브 나라옌 CEO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어머니와 주서윤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일하게 되면 한동안은 볼 수가 없었다.
오늘만큼은 그녀에게 그동안 바쁘다고 못 해 줬던 만큼 잘해 주고 싶었다.
“으음, 메뉴가 많아서 어떤 걸 골라야 할지 모르겠어요. 다 맛있을 것 같은데. 으으…….”
“그래? 그럼 오빠가 골라 볼까?”
“좋아요! 헤헷.”
유빈이 바로 웨이터를 불렀다.
“먼저 애피타이저로 쉐프 플래터 두 개 주시고요. 메인은 오리가 들어간 트러플 펜네 그리고 와규 립아이 스테이크로 하겠습니다. 음료수는 싱가포르 슬링으로 하겠습니다.”
“싱가포르 슬링은 두 잔이시죠? 식사 전에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음식은 쉐어하시겠습니까?”
“네.”
“훌륭한 초이스입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음료수와 식전 빵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유빈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막힘없이 주문하자 웨이터가 싱긋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멀어졌다.
“오빠!”
“어때, 괜찮았어?”
“미리 공부라도 하고 온 거예요? 연습한 건 아니죠? 호호.”
“하하. 이실직고할게. 미리 인터넷 검색해 보다가 블로그에 누가 조금 전처럼 주문해서 올려 놨더라고. 맛있어 보여서 따라해 봤어.”
주서윤이 지긋이 유빈의 웃는 모습을 바라봤다.
유빈은 어느 때라도 자신을 포장하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 그대로가 전부인 사람.
그녀도 여자인지라 일밖에 모르는 유빈이 답답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일에 열중하는 그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때면 그런 마음이 눈 녹듯 사라졌다.
유빈은 일에 집중하고 있을 때가 가장 멋졌다.
그리고 오늘 또 그가 보여 주는 새로운 모습에 주서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둘은 맛있게 식사를 하고 싱가포르 슬링을 한 잔씩 더 주문해 테라스로 자리를 옮겼다.
“서윤이 너는 왜 연애 안 해? 회사에도 너 좋아하는 사람 많은데. 소개팅도 많이 들어오지 않아?”
“많이 들어와요. 호호. 그런데 오빠 입사하고 나서는 한 번도 안 했어요.”
“그래?”
“일이 바쁘기도 하고 남자를 만나도 관계가 오래가지를 않아서요.”
“왜?”
“전에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조금 사귀다 보면 저한테 집착하더라고요. 회식이나 세미나 때문에 일이 늦게 끝날 때도 있고 한데 화를 내더라고요. 옆에 남자가 있는지 꼬치꼬치 물어보고.”
“이해는 간다. 네가 너무 예쁘니까 다른 남자가 집적댈까 봐 그랬겠지.”
“저도 그렇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래도 그런 모습이 싫었어요. 오빠는 어때요?”
“글쎄……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는 않을 것 같아. 내가 그들보다 낫다는 건 아니고. 나는 상대방을 믿을 수 없다면 만나지도 않을 거거든.”
“흐응, 그렇구나. 하긴 오빠는 주변에 나 같은 여자도 있는데 방치하니까.”
칵테일에 들어 있는 알코올 덕분인지 주서윤이 신나서 많은 이야기를 했다.
유빈은 그녀의 말 하나하나에 귀를 기울이며 호응해 줬다.
시원한 바람이 두 남녀를 스치고 지나갔다.
주서윤이 야경을 바라보며 말을 하지 않자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서윤아, 오빠 올해가 끝나면 싱가포르에서 일하게 될 것 같아.”
유빈의 말에 그녀가 고개를 돌려 유빈을 바라봤다.
“…….”
“라지브 나라옌 CEO가 같이 일하자고 하네.”
“……축하해요.”
말과는 달리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걱정하던 바가 현실이 된 것이었다. 그녀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언젠가는 유빈이 얼굴을 보지 못하는 곳으로 날아갈 거라는 불안함이 그녀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너한테 제일 먼저 이야기해 주고 싶었어.”
“……그래서 이런 데서 밥도 사 주고 한 거예요?”
주서윤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기다려 줄래?”
“네?”
“이제 그만 방치할게.”
“…….”
“난 널 믿어. 한동안은 장거리 연애가 되겠지만, 곧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기다려 줄래?”
“……기다릴게요. 그 대신 빨리 와야 해요.”
긴장했던 그녀의 표정이 풀어지며 주서윤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대답에 맞춰 화려한 라이트 쇼가 둘을 축복하듯 시작되었다.
“오빠, 설마 고백 타이밍까지 생각한 거예요?”
“그럴 리가. 하하.”
“전 오빠가 백반집에서 김치찌개 먹으면서 고백했어도 좋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런 곳에서 고백해 줘서 고마워요.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주서윤이 이제는 유빈만을 위한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 * *
“호호, 오빠 내일은 멀라이온 보러 가요.”
호텔에서 나와 두 시간 넘게 야시장에서 공식적인 첫 데이트를 즐긴 두 사람이 묵고 있는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사람들한테 이야기할까?”
“뭘요? 멀라이온 파크 같이 가자고요?”
“아니. 우리 사이.”
“네? 아, 안 돼요!”
“왜?”
“……부끄럽잖아요.”
“뭐가 부끄러워.”
“그럼 조금만 있다 말해요. 저는 항상 비밀 사내 연애해 보고 싶었거든요.”
“나 말고 다른 남자하고도 몰래 한 거 아니야?”
“오빠!”
“농담이야. 농담. 그런데 우리는 말하기도 전에 들킬 것 같아. 너나 나나 좋아하는 티를 너무 내잖아.”
“헤헤, 음, 그럼 우리 사무실에서는 이제 말도 걸지 말아요. 눈도 마주치지 말고.”
“그건 내가 못 할 것 같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지금까지 참았던 감정을 서로에게 표현했다.
“호호. 그럼 내일은 마케팅팀 전부 같이 가요. 제가 물어볼게요.”
주서윤이 신나서 이야기하는데 유빈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오빠?”
양복을 입은 남자가 어느새 나타나 두 사람 앞을 가로막았다.
“실례합니다. 혹시 제네스 코리아 유빈 킴입니까?”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본사에서 왔습니다. 시간이 늦었지만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마치 시간이 늦었더라도 거절 따위는 생각도 하지 말라는 말투였다.
“본사라면 뉴욕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유빈이 남자를 찬찬히 살폈다.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분은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분의 비서이고요.”
“……알겠습니다.”
회사 사람인데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서윤아, 먼저 올라가 있어.”
“알았어요.”
주서윤은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시죠.”
유빈은 앞장서서 걸어가는 남자를 따라갔다.
호텔 로비의 소파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이는 40대 중반? 금발에 파란 눈인 전형적인 백인 남자였다.
“데리고 왔습니다.”
“수고했어. 잠깐 자리 좀 비켜 주게.”
“알겠습니다.”
“미스터 킴. 정말 만나기 힘든 사람이군요. 본사 COO인 톰 로렌스입니다.”
남자가 매끈한 하얀 손을 유빈을 향해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