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404
404화
* * *
“슬슬 저도 가 보겠습니다.”
적당히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시키고 북상하는 와중, 스플리아네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플리아네는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 금방 눈치챘다.
게리소님에게도 비밀로 한 이종족 연합지역과의 비밀 서약. 바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암살행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은 동쪽으로 넓게 퍼지는 것만이 아니라 대륙 전체를 아우르는 일이다. 아니, 굳이 이종족 연합지역까지 도와주러 갈 필요는 없다. 어딜 뱁새가 황새의 사정을 걱정하나.
이종족 연합지역을 제외한, 남쪽과 동쪽 국가의 전선을 초장거리 이동 마법으로 돌아다니며 여태까지 한 것처럼 지휘관 암살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능력 있고 똑똑한 지휘관 암살. 그러는 와중에 마법사나 기사를 눈에 띄는 대로 죽여서 능력자를 줄이는 것.
결국에는 겁쟁이, 비겁자, 배신자만 남기고 그들의 지휘를 받는 오합지졸로 적군을 구성하는 것이 내가 그리려는 큰 그림이었다.
‘병신들만 남겨야 전선을 쉽게 북으로 밀 수 있어.’
피오드하고 약속을 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부터 대륙 단위의 암살행이나 하고 다닐까. 내 처지가 참으로 궁상맞지만, 이렇게 해야 중앙 대륙 포위망을 수월하게 완성할 수 있다.
나는 떠날 준비를 하며 스플리아네에게 농을 걸었다.
“너무 아쉬워하지 마십시오. 한 4~5일에 한 번씩은 들를 테니깐요.”
“누가 아쉬워한다고.”
흥! 하고 콧김을 불며 고개를 획 돌린다. 귀여운 몸짓이지만, 예순이 코앞인 예비 할아버지가 저러니 안면에 주먹을 박아 넣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솟구친다.
나는 솟아오르는 폭력 욕구를 참으며 그에게 물었다.
“저를 대신할 고수는 준비되어 있습니까?”
사실 물어볼 것도 없었다. 나는 이종족 연합지역 병력에 은밀히 숨어있는 무인에게 시선을 던졌다.
몇 개월 전, 헤피와 함께 이종족 연합지역의 대회의에 참가했을 때 보았던 원로원의 소드 마스터. 그 늙은이가 정체를 숨긴 채 이번 출정에 따라왔다.
늙어서 체력이 받쳐줄까 걱정이지만, 다 방법이 있으니 데리고 온 거겠지. 오러의 색은 마법으로 위장하고, 위력도 마법 무구의 힘을 빌리면 나를 못 따라 할 것도 아니다.
내 부탁한다는 시선을 받은 노인네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벙긋거렸다. 나는 그의 입에서 ‘아이몬 데슬리아.’라는 발음을 포착했다.
아이몬 데슬리아. 그것이 원로원 노인네의 이름이었군. 한 번 만나고 헤어질 사이인데 이름 한 번 거창하기도 해라.
나는 아이몬 데슬리아에게 마주 인사를 한 후, 초장거리 비행 마법을 써서 동쪽으로 날아올랐다.
‘어디부터 가서 죽이지?’
동쪽으로 이동하면 대수림 중앙 부근에서 출발한 게리소님 병력을 만난다.
그 중앙 병력의 총지휘관은 다름 아닌 쉘리 반데스. 나도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는 괴물 같은 늙은이가 총지휘관으로 있는 부대이니, 굳이 돕는다고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궁금한데?’
쉘리 반데스를 도와줄 필요는 없지만, 그가 일을 얼마만큼 잘하고 있나 볼 필요는 있지. 비행 방향을 살짝 남쪽으로 틀어서 쉘리 반데스의 부대를 찾는다.
그의 부대를 찾기는 쉬웠다. 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괴물이 쉘리 반데스의 출정부대와 함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건 또 뭐야?!’
나는 쉘리 반데스가 이끄는 부대를 보고는 기겁했다.
쿠르릉! 쿠릉!
아파트만한 보라색 지렁이가 지상을 활보한다. 지렁이의 크기는 웬만한 지하철을 세 대 겹친 수준이고, 그 길이 또한 지하철 8량에 다다랐다.
이 녀석의 외피를 자세히 보니 보랏빛 빛을 내는 가시가 빽빽이 박혀있다. 명백하게 마법으로 만든 인위적인 생명체라는 증거.
‘허이구!’
멀리서나마 저것을 분석하니 더욱더 기가 차다. 쉘리 반데스, 이 인간이 나한테 빌려 간 ‘텅 빈’ 성게 마나석을 이용해서 지렁이를 창조했다. 일종의 자율형 골렘에 속하는 녀석이다.
하지만 말했듯이 지렁이의 구조 유지, 움직임에 사용되는 동력원이 ‘텅 빈’ 성게 마나석이라는 게 나를 가장 놀랍게 했다.
텅 빈 마나석. 중요하니까 한 번 더 말한다. 저 괴물 같은 늙은이가 마나가 텅텅 빈 마나석을 이용해서 마법의 동력으로 삼았다.
‘어떻게… 아! 흡수 기작을 이용한 거군.’
분석하니 굳이 텅 빈 마나석을 쓴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부러 마나석을 ‘비운 상태’를 유지하는 거다. 마나석이 자동으로 마나를 채우려는 흡입력을 이용하는 것.
마법진의 보조까지 써서 흡입력을 몇 배로 키운다. 안 그래도 최상급 마나석보다 품질이 뛰어난 성게 마나석이 마법진의 보조마저 받아 흡입력이 몇 배나 상승하니 마나 흡수력이 기가 막힐 정도로 강해졌다.
즉, ‘텅 빈 마나석-흡입력 발생 및 강화-주변에서 끌어모은 마나로 동력 생성’이라는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3중 구조로 저 괴물 지렁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나를 가득 채운 마나석이 아닌 텅 빈 마나석을 이용한다는 발상. 그야말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다. 하지만…….
‘쉘리 할아버지 너무 오버하셨어요.’
괴물 지렁이의 분석을 끝낸 나는 혀를 차며 쉘리 반데스의 출정 부대를 내려다보았다. 저 지렁이하고 같이 다니는 부대가 불쌍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있다.
쿠르릉! 괴물 지렁이의 위용이 어찌나 장엄한지 쉘리 반데스가 이끄는 수십만의 병력도 지렁이가 움찔! 할 때마다 흠칫 놀라며 지렁이의 눈치를 본다.
“…….”
온갖 마법 무구를 다뤄온 이종족 연합지역의 지원 병력도 쉘리 반데스의 초월적인 마법 능력에 놀라기는 매한가지. 그들도 찜찜한 기색으로 지렁이에서 저만치 떨어져서 걸음을 옮긴다.
쉘리 반데스는 관심병 환자라도 된 듯이 괴물 지렁이의 이마(지렁이가 이마가 있는지는 헷갈리지만, 어쨌든 이마 부위)에 아빠 다리를 하고 앉아서 편히 이동했다.
‘아.’
어이없어하며 출정 부대를 구경하는 와중, 산을 돌아서 출정 부대를 습격하는 적군의 움직임이 내 눈에 띄었다. 방어만으로는 답이 없다 생각했는지 수적 우위를 앞세워서 출정 부대를 뭉개버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쉘리 반데스가 있는 이상 기습은 통하지 않는다. 그의 신호를 받자 병력이 신속하게 전투 준비를 하고, 쉘리 반데스는 여전히 느긋하게 지렁이 이마에 앉아, 건반을 치듯이 신랄하게 손을 휘저었다.
지렁이 조종에 정신적 자원 대부분을 사용하고 있어서 수인(手印) 마법을 쓰는 거다.
꽈드득!
수인 마법이 발동되자 괴물 지렁이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길이가 200미터가 조금 못 되고, 굵기는 지하철 세 대를 품(品)자로 합친 것만 같은 괴물 지렁이가 독침을 뱉으려는 코브라처럼 일어선다.
온몸에 삐죽빼죽 솟아난 가시를 활짝 펼치며 위협마저 하자 ‘와!’하는 소리를 내지르며 돌격하던 적군에 소요가 일었다. 진군 속도가 굼벵이처럼 줄어들고, 방패를 높이 세운다.
아쉽군. ‘저거’앞에서 속도를 줄이면 안 되지. 나는 적군의 명복을 빌어주었고, 그 순간 지렁이가 몸에 난 가시를 발사했다.
파바밧!
사람 몸뚱아리보다 두껍고, 길다란 가시 수백 발이 하늘 위로 쏘아진다. 포물선을 그리는 가시는, 하락하는 와중 열 갈래로 쫙쫙! 쪼개졌다.
수천 발로 늘어난 가시가 수천 발의 투창 공격이 되어 적의 전열에 내리꽂혔다. 뾰족한 가시 앞에선 방패, 방어막, 금속 갑옷 그 무엇도 소용이 없다.
그야 당연하지. 괴물 성게의 갑피로 만든 가시인걸. 방어막은 두부처럼 뚫리고, 물리적인 방어구도 간단히 가시의 침입을 허용했다.
수천 발의 가시 투창 한 번에 천 명이 넘는 적군이 죽는다. 하지만 가시의 공격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땅에 수직으로 내리꽂힌 가시 수천 발이 퉁! 하고 끄트머리에서 작은 폭발을 일으켜 위로 떠 올랐다.
퉁! 투둥! 연이은 폭발에 가시가 상공 수십 미터 위까지 상승한다. 수천 발의 가시가 하늘 위로 떠오르고… 그 자리에서 거세게 폭발했다.
푸화악! 퍼버벙!
가시 하나당 작은 가시 수백 조각으로 쪼개진다. 총 합해서 수십만, 어쩌면 백만이 넘는 가시 조각이 적군을 덮친다.
괴물 성게의 갑피는 그저 무식하게 발사한 것만으로도 마법사의 방어막과 기사의 마법 갑옷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힘이 있었다. 순식간에 아까의 열 배가 넘는 피해가 발생하고, 지상으로 피의 강이 흐른다.
다행히도 가시 조각이 날카롭다지만, 크기가 작고, 발사 속도 또한 그리 빠르지 않은 덕에 근육층까지만 뚫리고 끝이어서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전투력이 급감하는 데에는 그만한 상처로도 차고 넘친다.
당신의 어깨, 복부, 등, 허벅지 등에 엄지손가락 크기의 금속 조각이 박혔다고 생각해보라. 그 와중에도 전력의 50% 이상을 발휘할 수 있으면 그놈은 평범한 병사가 아니라 영웅이다.
그리고 병력 대다수는 영웅이 아닌 평범한 병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끄하악?!!”
“뽀, 뽑아 줘! 아아악!”
백만 발이 넘는 가시 조각에 만 단위의 병력이 무력화되었다. 포로병과 게리소님 출정병, 이종족 연합지역의 지원 병력은 전투력과 사기가 급감한 적군을 허무하리만치 쉽게 물리치고, 절반 이상을 포로로 잡았다.
나머지 절반은 약속한 대로 풀어준다. 그나마 멀쩡한 이들이 전투 물자를 들고 북으로 도망치고, 아군은 도망치는 이들을 굳이 잡지 않고 포로 관리에 힘을 쓴다.
꾸드득! 꾸득!
포로 관리에는 지렁이도 합세했다. 지렁이가 다친 병사들을 위협하듯이 빙빙! 돈다. 가시 조각을 회수하고 새로이 영입된 포로들의 기를 죽이는 거다.
포로가 된 병사들이 게거품을 물며 기겁하는 걸 보면, 효과는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만큼 뛰어난 듯싶었다.
쿠르릉!
한바탕 힘자랑을 끝낸 괴물 지렁이가 병력 후열로 이동했다. 후열로 가자 힘센 이종족 장병이 구슬땀을 흘리며 지렁이의 꼬리에 굵은 밧줄을 묶었다.
밧줄에는 짐마차 수십 대가 연결되어 있다. 짐마차에 탄 승객은 걷기도 힘든 부상자가 대다수.
어디서 저렇게 사람들이 많이 다쳤나 했더니만, 싸우는 걸 보니 부상자가 많이 나오는 게 이해가 된다. 한 번 싸울 때마다 만 단위의 부상자가 나오니 괴물 지렁이든 뭐든 쓸 수 있는 대로 써야지.
파앗!
부상자를 모두 태운 쉘리 반데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광범위 회복 마법장을 깐다. 게리소님 소속 5결 마법사 셋과 이종족 연합지역에서 지원 나온 중위 마법사 둘이 힘을 합치자 병력 전부를 감싸는 넓은 범위의 회복 마법장이 깔린다.
그곳을 향해 여섯 명의 성자단이 찜찜한 표정으로 성력을 전해준다. 성력이 회복 마법장을 타고 널리 퍼지며 부상자의 상처를 돌봐주고, 병력의 체력 회복을 지원해주었다.
이렇게 8결에 다다른 초월적인 마법사의 지원과 성자의 보조에 힘입어서 대수림 중앙을 통과한 출정병은 아무런 곤란함 없이 전선을 북으로 밀고 있었다.
‘저 할아버지는 도와줄 필요가 없겠군.’
내가 그리 여기고 하늘을 날아 동쪽으로 떠나기 전.
찡긋!
쉘리 반데스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어떠냐?’라는 듯이 한쪽 눈을 찡긋 감았다. 상공 10킬로미터 위에 있는 나를 정확히 포착하고 내게 윙크를 날린 거다.
괴물 같은 노인네. 진짜 징그러워 죽겠다. 나는 쉘리 반데스에 관한 걱정을 날린 채로 동쪽을 향해 날았다.
“……”
동쪽으로 날아 이스마일의 부대와 싸우는 병력, 그 위를 포위한 적군 기지로 침입해서 눈에 띄는 걸물을 죽이고 북상한다.
이건 여태까지 했던 일이라서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
라그랑쥬와 맞서 싸우는 빛의 수호자 본대도 만난다. 이놈들은 암살에 제법 애를 먹었다.
이 짧은 암살행으로 빛의 처단자니 뭐니 내 이명이 널리 알려진 탓에 경계가 꽤나 삼엄해졌거든. 하지만 그렇다고 내 발길을 막을 순 없다.
빛의 수호자가 평소보다 몇 배나 많은 자원을 써서 경계를 삼엄히 한 성과는, 열 명 죽일 것을 일곱 명 죽일 걸로 줄여주는 것에 불과했다. 결국, 죽을 놈은 내게 죽었다.
부우웅-!
죽이고, 죽이며. 라그랑쥬를 지나 북으로 간다. 그리하여 데일리케와 싸우는 빛의 수호자 부대와 마주한다.
“와우.”
데일리케와 빛의 수호자 본대. 누가 같은 빛의 수호자 조직원 아니랄까 봐 마법 무구의 수준이 결을 달리한다.
마법총과 기갑부대, 철갑 돌진기사단, 강화 갑옷으로 완전무장한 기사단, 자동형 포대, 원시적인 탱크까지. 판타지의 탈을 썼을 뿐이지 반쯤 현대 화기나 다름없는 전쟁 양상을 보여주는 데일리케와 빛의 수호자 본대였다.
하지만 모순적이게도 그 전장에서 가장 강렬한 빛을 발하는 존재는 원시적인 냉병기를 든 뮤온 보트라였다.
그의 오러가 번뜩이면 수십 톤이 넘는 원시 마법 탱크가 사과처럼 쪼개졌고, 검광이 하늘을 날면 수백 미터 밖에 있는 강화 갑옷 기사단의 목이 잘렸다.
수십만이 넘는 인간이 단 한 번뿐인 삶을 화려하고도 허무하게 불태우는 전장 속에서 뮤온 보트라가 생명을 수확하는 잔혹한 춤을 추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신위.
“으아아!”
빛의 수호자는 뮤온 보트라 일개 개인을 감당하기 위해 기꺼이 수천 명의 일반 병사와 수백 명이 넘는 마법 무구 무장 정예병력을 바쳤다.
그것은 마치 모닥불로 날아드는 수만 마리의 나방을 보는 것만 같았다. 또는 말벌 하나를 죽이기 위해 수천 마리의 꿀벌이 달라붙는 것과도 비슷했다.
그렇게 그의 체력을 깎고, 사소한 상처를 누적시킨다. 뮤온 보트라의 일검에 죽는 생명이 스물에서 열아홉으로, 열아홉에서 열여덟로 조금씩 줄어든다.
한 명, 두 명씩 죽는 인원이 줄어들 때마다 그의 갑옷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격이 늘어난다. 그런다고 과연 뮤온 보트라가 위기에 몰릴까?
천만의 말씀. 그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인 가이노스가 있었다.
푸슉!
뮤온 보트라 옆에서 터지는 작은 피 분수. 늘 내가 빡대가리에 돌대가리에 개대가리라고 놀렸던 가이노스의 검격이다.
그녀는 성격만 소심한 찐따일 뿐, 검사로서의 본성은 르데앙도 위협할 만한 검귀(劍鬼). 그 탓에 실험체들끼리 붙였던 별명도 검귀 가이노스 아닌가.
가이노스는 검귀라는 이명에 걸맞게 뮤온 보트라와 합을 맞추며 잔혹한 피의 길을 열었다. 내가 얼빵하다고 놀려댔던 이전의 모습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기계처럼 인간을 썰어 죽이는 괴물이 그녀의 내면을 가득 채웠다.
45년도 더 전, 실험실에서 노슬리아의 죽음에 절규하던 소심한 년은 사라지고 수십만의 군대를 농락하는 노련한 검사가 저곳에 있었다.
파앗!
두 사제의 삼엄한 기세에 포위망이 잠시라도 흔들리면? 그때는 바로 성력 작렬이다. 가이노스의 성력이 뮤온 보트라와 그녀의 체력을 채워주고, 미세한 잔상처를 씻은 듯이 깨끗하게 지운다.
마나 회복력도 몇 배나 상승하고, 지쳤던 정신력도 쌩쌩하게 회복된다. 단 1초의 여유가 만들어낸 지옥 같은 풍경이었다.
1초 만에 체력을 완벽에 가깝게 회복한 두 사제는 다시 빛의 수호자를 상대로 피의 길을 열었다. 빛의 수호자는 그 둘과 둘을 보조하는 지원 기사단에게만 수천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낸 끝에, 상처뿐인 후퇴를 결정했다.
저 싸움을 보니 게리소님의 전장이 애들 장난 같군. 진귀한 구경거리를 보여준 보답을 해 줘야겠어.
사박!
나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데일리케와 마주한 적 군기지에 몰래 스며들었다.
땅을 파고, 화장실에 숨어서, 식당 한편에 처박혀서. 근 삼일을 기지에 머무르며 인근 수백 킬로미터 내에 있는 빛의 수호자 부대 지휘관을 걸리는 대로 죽인다.
뻥!
“꺼…….”
그렇게 데일리케에서의 암살행을 끝내고 북으로 향해, 알테어와 마주한다. 데일리케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빛의 수호자 본대와 싸우는 그들.
전면에서 방어 전용 마법 무구를 착용한 익스퍼트 기사단이 열렬히 쏘아지는 마법총 세례를 뚫고, 적군 본진을 관통한다. 소드 마스터가 적 진영 한가운데에 들어가서 일분에 수백 명이 넘는 사상자를 일으키며 대열을 헤집어 놓는다.
창과 화살로 무장한 나약한 인간과 격투기를 배운 고릴라 부대와의 싸움이 이러할까? 예시가 된 인간에게는 불행한 말이지만, 싸움은 고릴라의 압승이었다.
고릴라, 알테어는 익스퍼트 몇 명만 사소한 상처를 입은 채로 빛의 수호자를 패퇴시켰고, 그들이 입은 부상도 성자단의 지원에 힘입어 금세 치료되었다.
고릴라가 힐펙까지 장착했으니 창하고 화살 따위나 든 인간이 버틸 리가 있나. 나는 알테어의 싸움을 구경하다가, 밤이 되었을 때 그들에게도 작은 도움을 주었다.
암살이라는 이름의 도움을.
우득!
“처, 처단자…! 네가……!”
죽이고, 계속해서 죽인다.
근 2개월 동안. 내가 했지만, 모순적이게도 나는 감히 셀 수도 없는 무수한 미래의 영웅들이 내 손에 유명을 달리했다.
빠드득!
“이런 썅! 마법사아아! 빛의 처단자가 왔지 않나! 소드 마스터의 침입도 감지할 수 있는 경계 마법은 무슨……!”
함정도 수도 없이 팠지만, 내게는 통하지 않는다. 함정도 내가 대놓고 테러리스트 활동을 할 때나 의미가 있는 거지, 마음을 깔끔하게 비우고 암살에만 집중하는 나를 잡을 수 있는 함정은 없었다.
유능한 이들은 점차 줄고, 조금만 피해가 발생해도 후퇴를 입에 담는 무능한 놈들이 늘어난다. 그들을 보좌하는 기사와 마법사들도 하나둘 내게 처리되고, 빛의 수호자와 연합국의 능력자는 점차 자취를 감춘다.
포위망은 점점 견고해지고, 빛의 수호자의 영역은 하나둘 줄어간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하다. 빛의 수호자를 없앤다. 그것 하나만을 노리고 유능한 이들을 용서 없이 죽인다.
서걱!
“허… 너, 너는…….”
분명히 적군의 유능한 지휘관 중에서도 인류를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과연 중앙 대륙의 명령을 따르는 게 맞는지 고민하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망설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푸북!
“끄흑……!”
“아, 암살자다! 그 녀석이 우리 부대에도 왔다!”
내가 그들을 설득하지 않고 죽이는 것이 과연 올바른 일일까?
내가 죽인 이들 중에서, 전쟁이 아니라면 나 같은 기인보다 더 세상에 도움을 주는 녀석이 있지 않았을까? 아니, 가정이 아니다. 분명히 있겠지.
피오드가 그럴듯한 말로 나를 설득했다고 해서 괜히 허파에 바람이 차면 곤란하다.
착각해선 안 된다. 내가 하는 일은 내 개인적인 욕심으로 숨겨진 가능성의 덩어리를 싸늘하게 식어가는 유기물로 만드는 일이다.
스륵!
“아……!”
“마법사! 제기랄! 경계 마법을 강화했다더니만 이게 무슨 일인가!”
“아니?! 부, 분명히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자도 걸릴 수밖에 없게 마법진을……?”
그래도 나는 죽인다.
대의니 인류애니 뭐니 하는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미래의 나를 위해서. 향후 더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명성이 자자한 빛의 처단자가 내게도 왔군.”
“와우. …내가 올 걸 어떻게 알았지?”
“아니, 그냥. 슬슬 나한테도 올 시기가 되지 않았나 찍어본 건데. 설마 진짜로 모습을 드러낼 줄은 나도 몰랐소.”
“……어?”
“후후! ‘드디어 왔군.’, ‘슬슬 모습을 드러내시지요.’, ‘손님이 오셨나?’ 하루에도 이런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는지 모르겠소. 그래도 덕분에 그 누구도 본 적 없는 빛의 처단자를 보았으니, 영 쓸데없는 짓은 아니었군.”
“흐흐! 그런 수작에 놀아나다니. 나도 멍청했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가능할지?”
“너라면 자격이 있지. 알람, 정보전달, 경계신호 마법은 전부 차단했으니 10분 정도는 자유롭게 대화할 시간이 있을 거야.”
“……무시무시하군.”
그래. 이놈도 있었지. 무슨 왕국의 삼 왕자라 했던데. 영 나쁜 놈은 아니었어. 지금처럼 전란의 시대가 아니었더라면 아주 크게 될 놈이었다. 이름이 틴토라고 했나?
하지만 그는 인생의 TPO를 잘못 잡았고, 불행하게도 나와 적이 된 덕분에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내게 무참하게 짓밟혀야 했다.
틴토와 같은 예가 얼마나 될까. 나는 미래의 영웅을 몇 명이나 죽인 걸까? 세상의 역사를 뒤바꿀 걸출한 위인을 몇 명이나 죽였을까.
내가 죽인 미래의 피오드는 몇 명이고, 내가 가능성을 짓밟은 미래의 가이노스는 몇 명일까.
이제는 의미 없는 가정이다. 어느 한쪽이든 완벽한 승리를 달성해야 전쟁은 끝이 나고, 그들에게는 불행한 말이지만 나는 빛의 수호자가 지기를 바란다.
내가 마음을 비우고, 무음무색(無音無色)으로 대륙 전역을 아우르는 암살행을 떠난 지 약 3개월이 지났을 무렵. 출진 4개월째.
우리는 중앙 대륙 오대 강국, 창 연합국에 발을 디뎠다.
마침내 중앙 대륙 포위망이 완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