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in Pil Heaven RAW novel - Chapter 123
신필천하(神筆天下) 123화
9. 북평에서
진양은 긴 동굴을 벗어난 뒤 숲을 헤치며 한참 동안 걸어갔다. 처음 한동안은 초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없는 길을 만들어서 가야 했다.
하지만 반나절을 더 걷고 나자 사람이 다녔던 것으로 보이는 작은 오솔길이 나타났다. 그 오솔길을 따라 마을까지 내려오고 보니 바로 산서(山西) 지역의 오태현(五台縣)이었다.
진양은 곧장 대별산으로 향했다.
북평으로 먼저 가서 유설의 사정을 알아볼까 생각했지만, 이미 시간이 많이 흐른 터라 학립관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을 듯했다.
쉬지 않고 달린 진양은 머지않아 하남 지역으로 들어섰다.
대별산 아랫마을까지 다다른 진양은 곧 유설을 만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들뜨고 기쁘기가 한량없었다.
진양이 빠른 속도로 경공술을 펼쳐 학립관 정문까지 올라가는데, 마침 정문 계단에 쪼그려 앉아 있는 여인이 보였다. 진양이 가까이 다가가 보니 바로 유설이었다.
유설은 진양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의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금세 그렁그렁 맺혔다.
유설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당신인가요?”
오랜만에 유설과 다시 재회하자 진양도 마음속 깊은 곳에서 격한 감동이 일어났다.
진양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오래 기다렸소?”
“지금……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지요?”
“물론이오.”
“하지만…… 당신은…… 늘 그랬어요. 제 꿈에 나타나서 돌아왔다고. 그런데 눈을 뜨면 전 늘 혼자였죠. 이번에도…… 또 제가 속는 건 아니겠지요?”
유설의 말에 진양은 가슴이 저려왔다.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에서 얼마나 자신을 기다렸는지 대략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진양이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손을 내밀어 유설을 잡으려는 순간, 그녀가 뒤로 흠칫 물러났다. 진양이 의아하게 바라보니 유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만약 또 꿈이라면 깨기 싫어요. 차라리…… 지금 이대로 더 있을래요. 당신이 내 손을 잡기만 하면 깨버리는 걸요.”
진양은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마음에 유설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으스러지도록 껴안았다.
“내가 돌아왔소. 꿈이 아니오. 미안하오. 미안하오.”
“아아……!”
유설은 진양의 품속에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하지만 진양이 그녀가 주저앉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가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았다.
유설은 진양의 품에 안겨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꿈이 아닌 것이다.
이젠 정말 꿈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진양과 몸이 닿기만 해도 꿈에서 깨버리곤 했다. 그리고 무거운 현실이 자신의 어깨를 짓눌렀다.
그런데 지금은 깨지 않는다.
현실인 것이다.
유설이 천천히 손을 들어 진양을 안았다.
두 남녀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는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서로의 감정이 추슬러지자 유설이 가만히 몸을 빼내며 속삭이듯 말했다.
“나빴어요.”
“미안하오.”
“이렇게 멀쩡하면서…… 그렇게 걱정하게 만들고…….”
유설의 귀여운 투정에 진양은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너무 멀쩡하게 돌아와서 섭섭하다면 내 당장 팔 하나를 부러뜨리리다.”
그러더니 오른손으로 왼팔을 잡았다. 그가 정말로 당장에라도 부러뜨릴 듯 움직이자 유설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그런 말이 아니에요! 제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
유설이 안절부절못하면서 우물거리자, 진양이 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내가 정말 팔을 부러뜨리기야 하겠소? 장난이었소.”
“뭐라구요? 정말 사람 정신없는 틈을 타서 이런 식으로 못된 장난을 칠 건가요?”
진양은 유설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한번 유설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이제는 절대로 걱정시키지 않으리다. 약속하리다.”
“약속은 하지 말고 다짐만 하세요. 세상 일이 뜻대로 안 되는 경우가 더 많을 테니까요.”
“알겠소. 스스로 굳게 다짐하지.”
“좋아요.”
유설이 처음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진양은 유설을 한 번 훑어보며 물었다.
“낭자는 그 후로 어떻게 돌아왔소? 몸은 괜찮소?”
“전 괜찮아요. 그날 여러 일이 있었답니다.”
“무슨 일이오?”
“이렇게 서서 얘기하기에는 좀 길어요. 당신은 그토록 오랫동안 내 애간장을 녹였으면서 그 잠시를 기다리지 못하나요? 먼저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눠요.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나면 모두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를 거예요.”
“하하, 오히려 두드려 맞지 않으면 다행이겠소.”
“그래도 별수없어요. 당신이 잘못한 거니까요.”
진양은 그저 빙그레 웃었다.
두 사람이 정문 안으로 들어서자 마당을 쓸고 있는 동자가 보였다. 아이는 진양을 보더니 작은 손으로 눈을 다시 한번 비비고 보았다.
그 아이는 평소 재능이 출중해서 진양이 눈여겨보던 진운생이었다.
“사…… 부님?”
“그래, 잘 있었느냐?”
“사부님! 사부님!”
진운생이 빗자루를 내던지고는 진양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마침 건물을 돌아 나오던 단지겸이 진운생을 보고 혼을 냈다.
“생아, 마당을 쓸다 말고 어딜 가는 것이냐? 네가 쓸어놓은 것들이 네 발에 밟혀 다 흩어지지 않느냐? 어서 돌아와서…….”
소리치던 단지겸은 진운생의 뒤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가 진양과 눈을 마주쳤다.
순간 단지겸은 말을 뚝 끊어 버리고는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벼루가 바닥에 툭 떨어졌다.
“자네…….”
“오랜만일세.”
“……돌아왔구나.”
“그동안 고생 많았지?”
단지겸은 얼른 정신을 차리더니 버럭 소리쳤다.
“이 나쁜 놈!”
하지만 그의 얼굴은 웃고 있었다.
그날 학립관의 모든 사람들은 진양의 귀환을 크게 기뻐하며 풍성한 잔치를 벌였다.
잔치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다.
학립관에는 새로운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석가장에서 보았던 가신풍과 조위강이었다. 유설의 말에 의하면 이들은 북평에서 돌아올 때 함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진양이 자세한 것들을 묻기에는 술자리가 워낙 떠들썩하고 자신에게 쏟아지는 질문도 많았기에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났을 때, 진양은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와 대학당 대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비연리를 시켜 유설과 사상이괴, 그리고 가신풍과 조위강을 불러오도록 지시했다. 또 흑표와 단지겸, 그리고 전학수를 비롯한 무인 몇 명을 더 불러오게 했다.
잠시 후 대청으로 사람들이 모이자, 진양이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제가 없는 동안 여러모로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한 말씀 드립니다.”
그러자 전학수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닙니다, 관주님. 관주님께서 이렇게 무사하신 것만으로도 저희에게는 큰 축복입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때 진승이 물었다.
“한데 아까 말씀하셨던 기연이라는 것은 어떤 인연이었는지요?”
진양은 술자리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에 귀한 기연을 얻었노라고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진양이 웃으며 답했다.
“말씀드리면 모두 놀라실 겁니다.”
“허허, 더욱 기대되는군요.”
“무당파의 조사이신 장 진인을 만났습니다.”
그의 말에 사람들 모두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서요평이 불쑥 소리쳤다.
“그 영감은 아직도 죽지 않았단 말이더냐?”
“예.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기운이 넘치셨습니다.”
“흥! 불로장생의 비법이라도 알아낸 건가? 죽었단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살아 있다는 소식은 실로 오랜만에 듣는군.”
진승이 맞장구를 쳤다.
“저도 그렇습니다. 대략 십 년 전에 황제가 장 진인을 황궁으로 초빙했을 때 그분이 거절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요. 그 후로는 그분의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관주님께서 만나셨다니…… 실로 귀한 인연이군요.”
서운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허허허! 평소 양 관주는 덕이 높고 도량이 넓어 하늘이 그분과 인연을 맺어준 듯싶소. 그분을 만났다는 것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으셨겠소. 감축드리오.”
“선배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저는 그분께 많은 깨달음을 얻었고 또 목숨까지 얻었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지요.”
전학수가 궁금한 듯 물었다.
“그분께서는 어떤 가르침을 내리셨는지요?”
“글쎄요. 어찌 표현해야 할지…….”
진양이 잠시 생각하더니 곧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예?”
전학수는 물론 주위 사람들 모두 생뚱맞은 표정으로 진양을 보았다.
하지만 진양은 이 이상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단지 그냥…… 살아가라고 하셨습니다.”
“흥! 도대체 그게 무슨 가르침이냐? 그딴 말은 나도 하겠다! 자, 모두들 술이나 마시면서 살아가세! 어떤가? 내 말이 훨씬 멋지지?”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어댔다.
진양도 함께 웃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불초해서 그분의 뜻을 당장 전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여러분께 그분의 뜻과 깨달음을 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방금 말씀드린 부분에 대해서는…… ‘그냥’이 중요한 겁니다. 모든 것을 내려두라는 의미로 받아들이시면 조금 더 쉬울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역시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전학수가 포권하며 말했다.
“장 진인은 백 세가 훌쩍 넘으신 신선 같은 분이 아닙니까? 그 오랜 세월 동안 깊은 생각 속에서 탄생한 깨달음을 어찌 한마디 말로 전할 수가 있겠습니까? 질문한 저희가 어리석었습니다. 관주님은 괘념치 마십시오.”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진양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언젠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겠노라고 다짐했다.
진양은 유설을 돌아보며 물었다.
“낭자, 그럼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시겠소?”
“네, 말씀드릴게요.”
그러더니 그녀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계신 다른 분들도 함께 아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제가 오늘 낮에 관주님께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저는 여러 달 전에 관주님과 함께 십지독녀의 행방을 찾아 학립관을 떠났습니다. 이 사실은 모든 분이 알고 계실 겁니다. 우리는 여러 영웅의 도움을 받아 북평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죠. 그리고 관주님께서 사라진 그날 밤의 일입니다.”
유설은 피곤한 몸을 누이자마자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금방 잠에서 깨어났다.
문득 방 안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던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주 잠깐 자신이 잠든 사이에 누군가 방 안에 들어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듯 은밀하게 접근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반가운 손님이 아니라는 뜻일 터.
유설은 잠자는 척하며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팔을 뻗어 침상 곁에 놓아둔 검을 잡으려는데,
“내가 치워뒀소.”
언젠가 들은 적이 있는 듯한 목소리가 방 안에서 들렸다.
결국 유설은 단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한 인영이 창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곁에는 두 사람이 더 있었는데, 스며드는 달빛이 희미해서 당장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조금 전 말을 꺼낸 사람만큼은 누군지 똑똑히 알 수 있었다.
유설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제 앞에 나타나시다니 배짱이 좋군요. 천상련에서 당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나요?”
그는 바로 곽연이었다.
곽연이 창틀에 걸터앉으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오만한 여유였다.
“왜 모르겠소? 하지만 천상련 따위, 어떻게 나오든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오.”
유설은 눈썹을 슬쩍 찌푸렸다.
괜한 허세를 부리는 것은 아닌 듯했다.
그에게서 풍겨지는 묘한 기운이 예전과는 사뭇 달랐다. 아마도 그사이에 천상무운신공을 익힌 것이리라. 물론 몇 개월 만에 신공을 대성하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띄는 변화는 분명히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 온 두 사람의 무공도 상당히 고강한 듯했다.
“상당한 자신감이군요. 천상련을 상대로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되지 않을 거예요.”
“하하하! 천상련이 그리 대단한 것이오? 머지않아 천상련은 내 발아래 무릎 꿇을 날이 올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