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99
98화. 고요한 여름 바다
에피소드 12.
삐비빅. 단조롭게 울리는 알람을 끄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오늘 일정을 생각하니까 도무지 일어나고 싶지 않아서 이미 알람이 울리기 전에 깼는데도 늑장을 부리던 거였는데, 슬슬 나설 채비를 해야 했다.
‘아이고, 내 팔자야….’
최근엔 잠도 제법 잤고, 일감도 다소 줄어서 몸은 평온했는데, 세면대 거울에 비치는 얼굴이 초췌하기 짝이 없다. 이게 다 오늘 일에 마음을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게 틀림없다.
뭉그적거리며 세안하고, 머리를 정돈한 뒤 빠른 준비를 위해 미리 꺼내놨던 옷을 갈아입었다.
아침은 꼭 먹으라고 나를 쪼아대던 친구들에게 잔소리 듣지 않기 위해 우유 한 팩을 뜯으면서 업무용 휴대폰을 확인했다.
‘음…. 출장을 갈 날이 머지않았으니까 준비해달라는 진예신 문자가 세 통, 오늘 용궁 가는 거 잊지 말라는 윤혜아 문자가 다섯 통이군. 둘 다 내가 일정을 못 지키는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그들 눈에는 내가 속을 썩이는 후배겠지만, 이래 봬도 난 시간 약속은 어겨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메신저의 가장 위쪽을 차지한 두 사람에게 준비는 미리 해뒀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장을 보내고 보안부 직원들이 올려둔 간략한 일일 보고를 확인했다.
‘겉으로 보이는 문제는 없고, 결계석도 수리가 끝났고….’
교대로 수리가 완료될 때까지 24시간 대기를 섰던 직원들에게 각자 이틀씩 원하는 날에 휴가를 쓰라는 말을 단체 공지로 올려뒀다.
오늘은 드물게 내가 출근을 안 하는 날이라 늦잠을 잤고 지금은 다들 근무 중일 시간인데도, 곧장 메신저 창에 감사 인사가 우후죽순 올라왔다. 나는 한눈팔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며 괜히 트집을 잡았다.
열심히 하고 있다는 직원들의 성토에 적당히 대꾸해주고, 이번엔 개인용 휴대폰을 켰다.
‘오늘 만나는데 만나서 얘기하면 되잖아. 뭐가 이렇게 지금 할 말이 많은 건데?’
일어나자마자 대화를 시작했던 건지 박호승, 이세환과의 단체 메신저 방에 미확인 메시지가 잔뜩이었다.
얘들은 원래 이렇게까지 메신저를 즐기지 않았었던 것 같은데….
문자보다는 전화를 더 선호하는 애들이어서 이 상황이 몹시 낯설었고, 동시에 살짝 즐거웠다.
바쁜 협회 일에 지치고 숨이 막히더라도 가끔 마주하게 되는 이런 평화로운 일상에 숨통이 트인다.
메신저를 누르고 무슨 말을 그렇게 하고 있었는지 스크롤을 내려가며 하나씩 읽었다.
뜯은 채로 손에 계속 쥐고 있어서 약간 미지근해진 우유를 한 번에 비우고, 내가 메시지를 드디어 확인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애들한테 짤막하게 답장했다.
-너희 아침부터 말이 너무 많아.
그 말에 먼저 반응한 사람은 짧은 메시지를 연속해서 보내는 게 습관인 박호승이다.
-와, 김요한
-진짜 너무하네
-내 생일인데
-당연히 들뜨지
-글고 용궁은 처음이라고
-궁금한 거 완전 많다고
-너만 덤덤한 거야
-너만.
마침표는 잘 쓰지 않는 박호승은 꼭 서운하다는 티를 내고 싶을 때 말끝에 점을 찍었다.
용궁이 궁금하다는 말도 꺼내는 걸 봐서는 질문 몇 개 좀 받아줘서 자기 기분을 풀어달라는 표시였지만 굳이?
어차피 금방 잊고서 떠들 걸 알고 있기에 주르륵 올라가는 메신저 창을 흘려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그놈의 용궁 때문에 심란한데, 질문에 답하다가 얘한테 뭐라고 투덜댈지도 모르니까 아예 무시하는 게 낫다.
얘들하고 있으면 나도 좀 유치해지는 편이라.
셋만 있는 단체방에서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박호승의 메시지가 몇 개인가 더 오고, 그 뒤를 이어 이세환이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가 평소보다 너무 들떠서 일찍 일어나버렸거든. 혹시 요한이 네 잠을 깨웠을까? 그렇다면 정말 미안해. 호승이 생일이기도 하고, 밤에 있을 생일 파티도 기대되고, 또, 용궁을 가게 된 것도 꿈인 것처럼 너무 신나서 떠들게 됐어.
사람을 배려하는 행동이 몸에 배어있는 이세환다운 메시지다.
글은 순식간에 읽었지만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지 고민된 나머지 애꿎은 우유 팩을 구기는데, 정적을 용납하지 않는 박호승이 먼저 우다다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
-있는 단체방에서
-좀 떠든 게 뭐가 문제?
-글고 넌 쟤랑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것도 아니고
-뭔 사과를 하고 그래
-내가 장담하는데
-김요한은 이 방 알림 꺼놨음
오, 어떻게 알았지. 박호승의 눈치가 빠르기는 하다만, 내 패턴이 그렇게 알기 쉬웠나.
단체방의 오른쪽 위 구석에 있는 종 모양의 알림 표시가 회색인 걸 물끄러미 쳐다봤다. 양쪽 휴대폰 모두 메신저는 알림을 꺼뒀고, 전화나 문자는 진동으로 해뒀다.
기다리는 연락이 있을 때는 소리를 키워두지만, 일반적으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서 소리를 꺼둔 것이다.
집무실에 사람이 많이 오가는 건 아니지만, 갑자기 소리가 들리면 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래도 외출할 때는 켜두니까. 비상 연락은 애초에 소리로 울리고.’
그 누구도 알림을 꺼놓은 게 잘못이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괜히 속으로 변명하게 됐다.
그래서일까. 평소였다면 딱히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았겠지만, 장담한다는 말도 묘하게 괘씸했고 이래저래 스트레스도 살짝 쌓여 있었기에 심술을 담아 답변했다.
-아닌데.
-너야말로 하루 이틀 알고 지낸 게 아닌데
-날 너무 모르는 거 아니냐?
박호승의 발끈하는 대답을 기다리며 우유 팩을 재활용 상자에 던져 넣는데, 의외로 이세환이 먼저 반응했다.
아무래도 내 답변에서 장난이 아니라 서운함을 읽어냈나 본데?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기색이 여실히 느껴지는 이세환의 답변은 박호승의 적절한 태클에 무마되었다.
워낙 연속으로 메시지가 많이 와서 정신이 없었지만, 박호승의 말로 간단히 줄이자면 김요한이 장난친 거니까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쟤 기분을 신경 써 줄 시간에 자신을 신경 써달라는 징징거림이다.
세환이 또 휘말릴 기세라서 적당히 끊어낼 겸, 화제도 바꿀 겸 대뜸 맥락에서 동떨어진 메시지를 보내고는 나가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배터리를 채울 셈으로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았다.
-자정에 바빠서 말을 못 했는데.
-생일 축하한다, 박호승.
-선물은 만나서 줄게.
성공적으로 방향을 바꾼 대화가 주르륵 올라오는 게 보였지만 무시하고 나갈 채비를 끝마쳤다.
보관함 속에 몇 개 남아 있지 않았던 아이온 보충제를 채우고, 두 친구를 포함한 오늘 용궁 나들이를 할 사람들에게 배부할 방어구를 확인한 후, 이틀 전에야 겨우 마련할 수 있었던 박호승의 생일 선물까지 챙겼다.
‘좋아, 빠진 건 없지?’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여 미리 적어놨던 준비물 리스트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유독 방어에 유용한 물품이라고 적힌 부분에 몇 번이고 그어진 밑줄에 시선이 갔다.
원래도 언제 어디서 균열이 터질지 몰라서 방어 물품은 준비하고 다니지만, 오늘을 위해 준비한 건 다소 특별한 물품들이었다.
이를테면 아이온을 사용할 줄 모르는 일반인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을 호신용품 같은 거라고 할까.
‘용왕이 그런 조건을 걸지만 않았어도 바쁘게 굴 필요가 없었는데.’
문득 생각이 이 사태를 초래한 용왕에게로 튀었다.
때는 바야흐로 용왕의 여의주를 무사히 배달했던 7월 3일의 야심한 새벽. 뜬금없이 용궁으로 초대하겠다며 미소를 지었던 용왕은 대신 ‘특별한 조건’을 걸었다. 나한테는 그 특별한 조건이 매우 신경 쓰였다.
용왕이 건 조건은 정확히 두 개.
‘협회의 인물은 나와 윤혜아, 강나비 단 셋만 올 수 있고 각자 감응자가 아닌 일반인을 데려와달라고 했지.’
협회에서 갈 수 인물을 제한 한 건 상관없지만, 일반인 두 명을 함께 데리고 오라니. 당장에 윤혜아와 내가 반발하려고 했지만, 용왕은 그런 반응까지 예상했던 건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용궁은 죄가 없는 평범한 사람에게 이유 없이 손을 대면 처벌을 받는다고 한다. 그리고 동행인으로 일반인이 있다면 협회의 인원들도 불필요한 전투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신경 쓸 테니 서로의 안전을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서로의 안전장치로 극단의 조처를 하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 용왕은 우리가 뭐라고 말을 떼기도 전에 통신을 끊었다.
‘윤혜아 반응이 일품이었지….’
어떤 분야의 경지에 이른 자들에게 흔히 아우라가 있다고 표현하듯이 현재 아이온 연구 분야의 최정점에 서 있는 윤혜아는 감응자임을 제하고서도 엄청난 존재감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대뜸 믿고 있던 용왕에게 뒤통수를 맞은 셈이었으니 분노하는 건 당연했다.
순식간에 싸하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무려 그 직전까지 발랄하게 움직이던 선옥이 냅다 토끼의 모습으로 변해서 달맞이꽃 사이로 숨어버렸다.
꽃 사이의 토끼는 퍽 귀여운 그림이었지만 바들바들 떨고 있었기에 안쓰럽기만 했다.
‘당했다며 이를 가는 게 살벌했지…. 보름 전에 초대장이 도착했을 때도 만나서 두고 보자며 주먹 쥐던데, 오늘 진짜 전투가 안 일어나는 거 맞겠지?’
윤혜아가 분란을 일으키는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고 있고, 일반인들 앞에서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서 초대장이 도착한 당일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히 함께 갈 일반인을 물색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학교에 얼굴도장이나 가끔 찍는 나한테 일반인 인맥이라고는 박호승과 이세환밖에 없었다.
둘을 위험할지도 모르는 장소에 데려가는 일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울며 겨자 먹는 식으로 둘에게 용궁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함께 하겠냐고 했더니 좋다고 승낙하더라.
‘나 같아도 갑자기 용궁 같은 데를 가자고 하면 좋다고 하지.’
이전 세계였다면 공부로 인한 스트레스가 심해서 헛소리를 하는 거냐며 안쓰러운 시선을 받았겠지만, 여긴 아이온이 존재하며 비현실이 당연하게 이뤄지는 세계다.
중간에 영혼이 바뀌어버린 나와는 달리 이 세계의 원주민이나 다름없는 상태의 두 사람은 용궁도 있을 수 있다며 빠르게 긍정했고, 내가 어떻게 초대장을 얻었는지보다 용궁이 어떤 곳인지를 더 궁금해하며 크게 기대했다.
‘거기에 날짜가….’
침대 협탁 위, 일정 기록은 아날로그 형식을 선호하는 편이라 사다 두었던 작은 달력에 시뻘건 색으로 동그라미가 크게 그려진 오늘을 쳐다봤다.
8월 8일. 얼마 전 장마가 끝나서 더 후덥지근해진 한여름이자, 매번 잊으면 안 된다고 사흘 전부터 메시지를 투하하는 박호승의 생일이다.
올해의 생일은 무엇보다도 특별해졌다며 벌써 기뻐하는 티를 팍팍 내는 박호승과 더불어 감응자가 아님에도 신비한 공간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으로 들뜬 이세환이 그새 가득 채운 단체방을 보며 한숨을 삼켰다.
‘그래, 너희라도 좋으면 됐다….’
내가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오늘은 분명 괜찮은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새삼스러운 다짐을 하며 나를 데리러 가고 있다는 박호승의 메시지에 금방 나갈 채비를 했다.
바깥은 따가운 햇빛으로 벌써 후끈 달아오른 온도에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었지만, 의외로 불쾌하지는 않았다.
요즘 손에 쥐고 사는 부채로 차양을 만들어 햇빛을 가린 채 정문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예전에 꽤 신세를 졌던 박호승네 리무진이 보였다.
부드럽게 멈추는 차 안으로 들어가자 제법 신경을 쓴 티가 나는 옷차림의 두 사람이 열렬하게 나를 반겼다.
“둘 다 오랜만.”
네 소식을 뉴스에서 접하는 게 더 빠른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며 옆구리를 연신 찌르는 박호승도, 얼굴 한 번 보는 게 너무 힘든데 여름휴가를 더 길게 받으면 안 되냐며 눈을 빛내는 이세환도 웃는 얼굴이었다.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저절로 긴장이 풀려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기쁜 건 얘네들만이 아니었다. 오늘 아침, 어쩌면 며칠 전부터, 나 역시 기대한 상태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