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uck in the Tower RAW novel - Chapter 795
794화 잊혀진 것
하이덴은 말했다.
자신의 부끄러움은 숨는 것이고 나의 부끄러움은 숨기는 것이라고.
나도 그 부분은 인정한다.
그동안 난 쁘띠공듀인 걸 들키지 않으려고 행동했으니까.
그렇다 해도.
‘정말 그게 다일까?’
내가 생각하는 부끄러움이라는 게 그걸로 끝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는 건 어렵기에, 나도 나라서 더 모르는 부분이 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따지고 보면 나는 남의 행동, 혹은 내 행동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섹시가이가 하는 짓거리를 보고 내가 대신 부끄러운 것.
그때도 개념이 반응했었다.
뭐 하나로 딱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난 쪽팔리게 살기 싫더라.”
비겁하게 살기 싫었던 걸지도 모른다.
대격변이 사람을 이렇게 만든 걸지도.
못 볼 꼴을 많이 봤다.
남들 뒤통수 치며 살아가는 놈들 보면서 저렇게는 살고 싶지 않다고 은연중에 다짐했다.
사람보다는 재앙을 일으킨 몬스터를 원망하고, 빌어먹을 공략법으로 사람들을 죽였던 대형 길드와 정부에 반발했다.
기습당하고 부조리한 일을 겪으면 되갚아 주려 한 이유도 비슷하다.
그리고 지금.
“추하다, 베드록 바알루제.”
진정으로 혐오스러운 인생으로 점철된 존재를 마주했다.
정말이지.
“너처럼은 되기 싫다.”
원래도 그랬지만 더욱 확실해졌다.
난 혼돈의 파편 따위는 되지 않는다.
비교적 멀쩡한 이들도 만났었지만 글쎄.
그 몇몇이 괜찮다고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진 않아서.
여전히 난.
“밖에 나가서 잘 먹고 잘살란다. 몬스터든 뭐든 다 때려잡고.”
그러고 싶다.
【…확고하구나. 나 또한 그런 시절이 있었지.】
처음과 같은 웅장함은 없었다.
그저 쪼그라든 시체 하나가 위태롭게 왕좌에 앉아 있었지.
이곳은 영혼의 세계.
객관적인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 형이상학적 공간이었으니 내가 어떻게 마음먹느냐에 따라서도 바뀌기 마련.
【확실히 하이덴과는 다르군. 그 겁쟁이는 영혼의 세계에서조차 모습을 숨겼으니.】
아무래도 하이덴은 나와 다른 방식으로 영혼 세계를 극복한 모양.
처음 말할 때는 뭔가 대단한 것처럼 말하더니만.
하기야 그러니까 위선이지.
별 불만은 없다. 놈이 내게 가르침을 준 건 사실이었고 부끄러움을 얻게 된 것도 사실이니.
[개념, 부끄러움이 눈앞의 대상을 경멸합니다.]처음으로 개념, 부끄러움이 명확한 자신의 의사를 밝혔다.
-촤라라락.
녀석이 다시 저주와 개념이 담긴 사슬을 날렸다.
어째서인지 힘이 빠진 거 같다.
아니면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거나.
중요한 건.
-터럭.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는 것.
몸에 달라붙은 벌레를 쳐 내듯 조금은 신경질적이게 손을 털어 냈다.
-쿠구구궁!
요란한 소리와 함께 구석에 처박히는 사슬.
이어 한발 디디며 검을 휘둘렀다.
수평으로 뻗어 나간 검격이 녀석의 앞을 훑는다.
-터억.
놈 또한 가볍게 손을 뻗어 검을 막았지만 실금이 남는다.
조금이지만 녀석의 비대한 영혼에 대미지가 들어가고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지 더욱 찌그러지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이죽거렸다.
“왜 자꾸 네 것도 아니면서 쓰고 그러냐.”
【내 것이 아니라. 그래.】
변화가 생긴 건 그때였다.
왕좌에 앉아 있던 녀석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그와 함께 잠잠해졌던 존재력이 급격히 팽창하며 광풍이 몰아쳤다.
‘저 자식 못 일어나는 거 아니었나?’
계속 앉아 있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놈의 아우라가 검붉게 타오른다.
명백한 분노와 살의, 악의가 가득했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네놈의 영혼에 영벌을 가한 후 교화시키겠다.】
무기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스스스스.
시체였던 몸에 살이 돋는다.
말라붙은 스펀지가 물기를 머금듯 놈의 거체가 부푼다.
자극을 너무 했나.
시체였던 녀석의 마음에 선명한 감정이 뿜어지며 생기를 되찾는다.
“갑자기 열정적이냐, 자식아. 계속 앉아 있어.”
슬쩍 권유해 봤지만 놈은 무시했다.
거, 사람이 말을 하는데.
영혼 상태임에도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다.
‘이 새끼, 진짜 화났나 본데.’
그만큼 차원이 다른 압박감이다.
게다가 저거.
-차아아아앙!
어느새 놈의 몸에는 황금빛 갑옷과 대검이 들려 있다.
과거 생전에 왕이었을 때의 모습인가.
깊게 눌러쓴 투구 너머로 순수하게 웃는 녀석의 얼굴이 보였다.
【내가 얻은 이 모든 게 남의 것이라 했느냐?】
단순히 쥐고 있는 검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생동감이 넘친다.
확실해졌다.
놈은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무료하게 탑과의 거래를 이행하던 녀석이 자신의 욕망을 섞었다.
【승리하고 무너트리고 패배한 쓰레기들의 전리품을 얻는다!】
후웅.
놈이 검을 내리쳤다.
【그것이 멸망한 세계의 왕! 이 몸이 이룬 정복의 역사다!】
[개념, 왕이 굳건하게 일어섭니다!] [개념, 정복이 정벌의 의지를 드러냅니다!]-콰아아아아앙!
단 한 번의 일격.
직접 닿지도 않았으나 엄청난 충격파가 몸을 스친다.
압박감이 아니다.
이건.
‘칼날!’
놈의 흉폭한 영혼은 그 자체로 무기였으며.
【세계 최후의 왕국은 영원불멸을 얻었으니 나의 역사도 영원하리라!】
지금껏 존재해 온 놈의 진짜 삶이었다.
투쟁. 전쟁. 정복. 승리.
탐욕스러운 왕의 근간에 존재하는 것들.
놈에게 있어 그가 부리는 온갖 개념들은 전리품인 동시에 풍화된 영혼을 달래는 장난감이었을 뿐.
삐뚤어진 놈의 욕망이 내게로 향한 이상.
【하이덴의 잔해를 뽑아 내고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마.】
놈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내 개념까지 뽑아 버리겠다고 날뛴다.
-쿵! 쿠우웅!
-후우욱!
쉴 새 없이 몰아치는 검격.
하나하나가 묵직하다.
대검이라는 게 무색하게 엄청난 속도.
영혼에 각인될 정도의 무기다. 이미 한 몸이라 봐도 무방하겠지.
그래도.
-쩌어어어엉!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놈의 대검과 혼돈검이 격돌했다.
세상이 일렁거릴 정도로 강한 충격이 일대를 휩쓴다.
눈에 보이는 것에 현혹되지 마라.
남이 더 커 보인다는 건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는 것이니.
놈이 어떤 세월을 보내고 어떤 업적을 이루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각자의 삶에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자신뿐.
딱 하나.
내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쩌저저적.
-콰아아아앙!
나보다 놈이 영혼 세계에 더 익숙하다는 것.
팔이 튕겨 나간다.
이어 재차 휘두르는 걸 몸을 꺾어 피하고 앞으로 폭발.
-콰아아아앙!
불길을 뚫고 쇄도하는 녀석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반 박자 빠른 타이밍.
놈의 대검이 움직이기 전에 놈의 팔을 붙잡고 그대로 쑤신다.
복부를 향해 찌르기를 날렸으나.
-우우웅!
영혼의 파동이 검을 밀어낸다.
숙련도가 다르다.
놈이 자랑하는 개념을 부수고 나아가도 놈의 영혼 자체가 단단히 버티고 있다.
-촤자자자작!
그거면 됐다.
결국 깎이긴 한다는 건 언젠가는 뚫린다는 것이니.
다만.
-뻐걱!
‘나도 같이 깎인다는 게 문제지.’
소모전으로 갈 수는 없다.
적어도 놈이 세월로 쌓은 영혼의 두께는 확실히 나보다 컸으니까.
아무리 놈을 작게 보더라도 시간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다.
-카가가가각!
연달아 들어오는 공격.
뒤를 노리고 들어오는 습격.
놈이 빼앗은 개념이 비록 남의 삶이라 하더라도 놈은 그것을 전리품으로써 소모하고 있다.
그저 내 눈길을 끄는 데, 작은 상처를 남기기 위해서.
씹다 뱉는 껌처럼 아무런 가치도 없게 던지고 있었다.
“역시 넌 재수가 없어.”
하는 짓 하나하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
쿠웅!
들어오는 공격을 쳐 내고 놈의 갑옷에 기다란 자국을 만들었다.
걱정 마라.
저 갑옷도 결국 영혼의 형상. 대미지 자체는 들어가니.
입꼬리를 올리는 것도 잠시.
-쿠웅!
“쿨럭!”
영혼이 거세게 요동쳤다.
놈과 싸우면서 누적된 충격이 내부에서부터 흔들린다.
【세월은 경험. 곧 힘이다.】
영혼 상태에서 싸운 적은 이번이 처음.
같은 충격을 받더라도 받아들이는 고통이 다르다.
놈은 이미 수없이 이렇게 싸워 온 노괴고.
단 한 번도 멈추지 않았지만 놈은 여전히 굳건하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영혼을 깎아서라도 칼을 갈 괴물.
“딴 사람 세월 훔쳐 쓰는 놈이 말은 잘해.”
애써 웃어 봤지만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지금도 몸이 삐걱거린다.
여기서 몸이 망가지고 있다는 건 곧 영혼이 깨지고 있다는 것.
흐릿한 현실의 광경 속, 내가 피를 토하는 게 보였다.
영혼과 몸이 하나인 건 나도 마찬가지.
-푸슉!
기습적으로 천장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결국 이 망할 영혼 상태도 개념, 저승을 부수면 사라지는 것.
전투로 놈의 눈길을 끈 사이에 일격을 날렸건만.
【말했을 텐데. 이곳에서는 속임수는 통하지 않는다고.】
[개념, 사육이 채찍을 듭니다.] [개념, 기아가 배를 부여잡습니다.] [개념, 기우제가 바라는 바를 이루려 합니다.].
.
.
다시금 개념의 범람이 일었다.
막아야 한다.
여전히 내가 가진 개념과 권능이 울부짖고 있지만 영혼이 흔들리는 지금, 너무나 위태롭다.
뚫을 수 있는가.
의심은 곧 독이 된다.
그만큼 내 영혼과 힘이 쪼그라드니 의문을 집어넣고 검을 내질렀다.
-촤아아악!
하늘을 덮고 내려오는 수많은 개념과 놈의 악의를 향해 비집고 들어가 찌르고 베고 휘두른다.
팔과 다리를 멈추지 않고 오로지 위를 향해.
탑에 오르고 오르며 향한 것처럼 묵묵히.
처음부터 그랬다.
말도 안 되는 시련을 받으면서도 결국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 과정이 고통스러워 온몸을 비틀면서도.
-파삭.
영혼의 일부가 깨져 떨어져 나간다.
나를 상실하는 고통은 끔찍했으나 멈추면 완전히 부서질 것을 알기에 집중을 더했다.
몰입.
하나의 흐름이 되어 오로지 검과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
필요하다면 나 자신도 깎는다.
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해야 하기에 한다.
그렇게 살아왔고 그래서 이곳에 있다.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고 적을 베었으며 써야 한다면 목숨도 서슴없이 썼다.
지금도 그렇게!
-사아악!
끝없이 이어질 거 같은 흐름에도 종말은 찾아오니.
첫 번째 해일을 베어 넘긴 후 나를 찾아오는 건 또 하나의 해일이었다.
“하. 진짜.”
헛웃음을 흘렸다.
멸망한 세상의 마지막 왕이라 했던가.
탑에 들어와서도 정복을 멈추지 않았다더니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것을 집어삼킨 거냐.
지지 말자.
이미 했던 거. 한 번 더 하면 그만이니.
[SSS급 권능, 굴하지 않는 검귀가 포효합니다!]반복.
그건 내가 잘하는 거 아니던가.
한 번으로 부족하면 두 번.
그걸로도 부족하면 열 번이든 백 번이든 한다.
-파아앗!
검이 휘둘릴 때마다 내가 부순 개념이 번쩍인다.
파편에 속 잔념이 환상처럼 어른거린다.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았다.
곁에서 꾸물거리며 머물렀다.
내가 부숴서 화났나?
원망하려면 해라. 그래도 난 해야겠으니.
-우우우웅.
몸은 무겁고 시야는 흐리다.
여전히 세상은 깨져 나간 개념들의 색채로 가득하고 망할 환상과 사념은 몸을 흔들며 말을 걸어온다.
하늘을 뒤덮은 악의를 손가락질하며 중얼중얼 말을 걸어온다.
더 이상 못 알아먹을 비명도 아니다.
자신에 대해, 놈에 대한 원망을 내지르며 악을 쓴다.
귓가가 아니라 영혼에 직접적으로 박히는 외침!
—-!
귀가, 머리가 터질 거 같다.
심장이 몸을 뛰쳐나와 요동치면 이럴까.
괴로운 동시에 생기가 느껴진다.
외침과 격동.
급격히 팽창한 감각과 떨림에 세상이 울렁인다.
-우우우웅!
이윽고 비명과 환호가 절정에 휩싸이는 그때.
보았다.
-스르르르륵.
이제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현실 속의 나.
육체에 검은 그림자가 몰려드는 것을.
그것이 이내 영혼의 세계로 넘어와 나를 붙잡는 것을.
나를 끌어안고 몸으로 감싸며 보호하며 몰아닥치는 개념의 홍수를 막아 낸다.
이게 무엇인지, 왜 나를 지키는지도 알 수 없다.
그저.
[SSS급 권능, 별을 주시하는 눈이 잊혀진 자들을 바라봅니다.]뚜렷해졌다.
산화해 흩어지는 개념들의 형상들과 합쳐져 선명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존재들을.
【이놈들……!】
숭배자의 왕이 노성을 터트린다.
나를 베기 위해 괴성을 지르며 검을 휘두른다.
그럼에도 나를 감싸는 이들은 많아졌으니.
깨달을 수 있었다.
놈이 탑으로 들어와 무엇을 정벌한 것인가.
어째서 놈은 이토록 개념이 많은가.
-꾸드드드득!
나를 중심으로 나무처럼 뻗어 올라가 시커먼 손이 기어코 천장에 닿았고.
-콰직!
[개념, 저승이 부서집니다.]-쩌적! 쩌어어억!
-차아아앙!
영혼 세계가 무너졌다.
느껴진다.
천천히 뛰고 있는 심장이.
차가워지는 몸이.
온몸을 타고 머리까지 짜릿한 통증이.
구사일생이 발휘되었으나 영혼의 타격까지 회복되지는 않았다.
천천히 암전되는 시야 속, 알람이 떴다.
[칭호, 잊혀진 세계의 왕이 울부짖습니다!] [당신은 모든 잊혀진 것들의 관심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잊혀진 것들의 대변자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잊혀진 것들의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잊혀진 자들이 당신에게 향합니다.]잊혀진 자.
그것은 개념을 강탈당하고 빼앗기고 잃은 자들의 이름이었다.
[당신은 사망했습니다.]그걸 끝으로 난 의식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