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s An Obsessive Servant RAW novel - Chapter (184)
5
시간이 흘러 이보는 호넷의 상단주 자리도 되찾았다.
덴카르트 공작의 신임을 얻은 이보는 그의 허락하에 비본을 집안에 가지고 돌아가, 가주의 상징이라는 인장을 찾고 활약을 했다.
과거처럼 암살을 시도하는 형제들도 조용히 마무리 지었다.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자를 새로운 수행인으로 둔 그는 엘카탄과 호넷을 함께 키워나갔다.
그러면서도 작은 일에 신경을 세심히 기울였다.
이보의 두 상단 일원들은 분기별로 뛰어난 의원을 통해 건강을 검진하도록 했다.
상단원 대다수가 국경을 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니, 아픈 곳이 있거든 미리 확인하여 치료하자는 취지였다.
“상단주님 인품은 보통이 아니군.”
모두가 이보의 세심함에 감탄했고 감동했다.
어린 소년이 상단주가 된다는 사실에 염려를 금치 못했던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실상은 로벨의 페러스 증세를 확인하고자 함이었으나, 로벨을 포함한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했다.
“페러스 증세는 없었습니다.”
“……그렇습니까.”
의원과 대화를 마친 이보는 무심한 눈으로 창문 밖을 응시했다.
어느덧 북부 세 거점의 마지막 석판들을 들이고 있었다.
공작의 숙원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그동안 이보는 석판을 들이는 일뿐만 아니라 해석에도 손을 거들었다.
과거 로벨에게서 석판 해석에 대해 들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에드릭 덴카르트도 한 걸음씩 뗄 수 있게 되어 덴카르트 가신들도 이보를 매우 좋아했다.
공작은 물론 예전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같은 생각인지 이보에게 힘을 주고 그의 뜻을 존중해주었다.
그러니, 덴카르트에 남은 빚은 없었다.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이보는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
오늘은 수도에서 판매될 물건을 함께 살펴보는 날이었다.
이보는 플로르 상단이 믿을 만한 동업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밝혔고, 로벨은 누가 봐도 뛰어났다.
그러니 두 사람이 함께 상단을 위해 시간을 보내는 일은 이상치 않았다.
수도 대광장에 도착한 이보는 침착하게 로벨을 기다렸다. 그러다가도 길에 정차한 마차를 보며 머리를 몇 번 더 점검하기도 했다.
평소라면 누가 거액을 주고 시켜도 안 할 짓이었다.
그 과정을 몇 번 마친 이보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일정이 로벨에게 무리가 되지 않게 해야지.’
물론 일정 자체가 반쯤 나들이로 보일 정도로 가볍긴 했다.
게다가 이보는 철저히 준비했다.
살펴볼 길은 미리 다 알아두었고, 식사할 장소며 휴식 장소는 혼자 몇 번이고 가서 확인해보기까지 했었다.
같은 일을 두 번 이상 하지 않는 이보는 그 과정이 만족스럽고 매우 즐거웠다.
은은하게 미소 짓는 그를 주변 여성들이 흘끔거리며 바라봤다.
하지만 이보는 그런 것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생각에 몰두했다.
‘……로벨과 어떤 화제로 대화할까.’
어제도, 엊그제도, 사나흘 전에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지금도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일주일에 한 번, 로벨을 만나는 시간이 극히 짧으니 그 시간 동안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고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었다.
이윽고 약속 시각이 되기 십 분 전쯤, 로벨이 나타났다.
“오라버니!”
저 멀리서 다가오는 로벨을 발견한 이보의 눈이 커졌다.
오늘 로벨은 긴 머리카락을 포니테일로 높게 묶고, 바지와 셔츠 차림이었다.
오랫동안 봐왔지만, 포니테일에 간소한 차림은 처음이라 신기했다.
‘……로벨은 역시 바지가 더 잘 어울리네.’
워낙 팔다리가 길쭉한 게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시원한 것 같았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게 티가 났는지, 로벨이 쑥스럽게 뺨을 긁적였다.
“제가 좀 잘 어울리긴 하나 봐요.”
“응.”
이보는 진심을 다해 답했다.
“정말 예뻐.”
“아니…… 이보세요. 누가 장사꾼 아니랄까 봐. 말은 정말 잘한다니까?”
“난 너한테 파는 것 없어. 우리 계약은 예전부터 정해진 것이고.”
사실이라는 뜻이었다.
그 강경한 대답에 로벨은 기분이 좋으면서도 멋쩍어서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보는 그런 로벨의 변화를 세심하게 눈에 담다가, 그녀와 걸음을 맞춰 걸었다.
이보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단순히 걸음을 맞추는 일이 이토록 기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담스러울 수 있기에 내색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렇게 한참 즐겁게 수도를 돌던 그는 문득 가판대를 발견했다.
장신구를 파는 곳이었다. 자수정이 달린 머리끈이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저건…… 로벨과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이보의 걸음이 느려졌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치겠지만 오늘은 왠지 지나치기 어려웠다.
엘카탄이나 호넷 상단의 이름으로 플로르 상단의 로벨에게 선물을 준 적은 있었지만, 사적으로 선물을 한 적은 없었다.
애초에 상단주가 되면 많은 이의 표적이 되니 로벨을 위험에 끌어들이지 않기 위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두 상단의 힘을 얻은 지금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숱한 물건을 접해왔지만, 무언가를 사기 위해 이렇게 마음이 간절했던 적은 처음이다.
이보는 결심을 마치자마자 욕심껏 행동했다.
“로벨리아, 여기서 기다려.”
이보는 의아해하는 로벨을 두고서 얼른 머리끈을 사 왔다.
그러면서도 짧은 시간 동안 어느 상단의 소속품인지를 확인했다. 그래야 세공사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그런데 시력이 좋은 로벨답게 그걸 다 본 모양이다.
로벨은 재촉하듯 손을 내밀었다.
“얼른 주세요.”
헛웃음을 뱉은 이보는 그녀에게 리본을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머리를 풀며 리본을 바꿔 끼려 했다.
“저도 기다려주세요.”
그 말 후, 로벨이 머리를 풀었다.
긴 은발이 폭포처럼 내려오면서 눈이 아플 정도로 빛났다.
그게 너무 예뻐서 멍하니 바라보자 로벨은 머리끈을 입에 문 채로 웃었다.
그녀가 이상하게 보고 있는 걸 알면서도 이보는 시선을 거두기 힘들었다.
머리를 풀고 묶는 로벨을 보는 것도 처음이라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보는 식사 자리까지 기분이 붕 뜬 것처럼 좋았다.
“저기, 오라버니.”
로벨이 부르고 나서야 그의 상념이 깨졌다.
이보는 바로 지배인부터 부르려 했다.
그러자, 로벨이 만류했다.
“아니, 아니요. 더 먹을 것도, 필요한 것도 없어요.”
그럼 왜 그러지.
의아하게 바라보자, 머뭇거리던 로벨이 불쑥 물었다.
“도련님 어때요?”
“……도련님?”
에드릭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럼 혹시, 과거에 대해 기억이 났나?
아니면 이 반투명한 세계에 로벨도 함께 온 것인가.
그런 생각에 표정이 굳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꺼내면서 로벨이 저렇게 어색하게 웃을 리가 없다.
냉정하게 상황을 판단한 이보는 사사로운 감정을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덴카르트 후계자 자리에 걸맞게 훌륭하신 분이지.”
“음.”
“선량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계시기도 하고.”
“음음.”
묘한 분위기로 봐선 로벨이 분명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자 로벨이 물로 목을 축이더니 말했다.
“그런데요, 오라버니. 혹시 지금 주변이 어떤지 보이세요?”
그 말에 이보는 주변을 살폈다.
격식을 꽤 갖춘 차림의 손님들이 있었다. 이런 식당에서 볼 법한 사람들일 뿐, 수상한 자는 없었다.
로벨의 설명을 기다리자, 그녀가 허탈하게 웃었다.
“오라버니답지 않게 이런 데선 둔하네요. 여기, 정석 데이트 코스로 유명하잖아요.”
***
그 말을 들은 후에 이보는 미안함을 느꼈다.
……기분이 나빴으면 어쩌지.
로벨은 자신에게 이성을 향한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과거에는 지켜주고 돌봐줘야 할 존재, 현재는 배워가며 앞으로 나아갈 동반자 정도로만 봤다.
물론 시간이 흘러 로벨에게 제 마음을 표현할 생각은 있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특히 지위를 이용하여 사적인 자리에 대동하는 것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 아닌가.
다른 일정을 진행하는 내내 제 경솔함을 탓하는데 로벨은 고맙게도 내색하지 않았다.
그런데 로벨의 신발이 눈에 들어왔다.
부츠라서 몰랐는데, 꽤 높은 굽이었다.
이보는 언제 난감해했냐는 듯이 적극적으로 물었다.
“잠깐 여기서 쉬고 갈까?”
로벨은 그런 이보를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한적한 거리의 나무 벤치에 앉았다.
‘조금만 쉬게 했다가…… 전서구를 보내 마차를 이곳으로 오게 해야겠다.’
생각하는데, 쪽 소리가 났다.
이보는 그 소리가 분명히 들렸음에도 자신의 근처에서 나는 소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건 입을 맞추는 소리였으니까.
다시금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들렸다.
뺨에도 무언가 따뜻한 것이 닿은 것 같았다.
이상하다 싶어서 고개를 돌리자, 시선을 피하며 부끄러워하는 로벨이 보였다.
“엄마가 알려주셨거든요. 데이트 하다가 풍경 좋고, 분위기 좋고, 미남 있으면 용기 내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아닌가?”
로벨이 뺨을 더 붉히면서도 불안해했다.
“아니…… 이거 아니었어요? 나는, 우리 둘 다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아니야. 맞아.”
이보는 수줍어하며 고개를 돌린 로벨의 턱과 뺨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무슨 말을 할 새도 없이 입을 삼켜버렸다.
그는 생각이 흐려지는 순간을 싫어했다. 냉철한 선택을 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머릿속이 뜨거워져 아무 생각도 들지 못하는 지금, 그는 극도의 만족감을 느꼈다.
적극적으로 목에 감긴 팔도 좋았고, 맞닿은 체온도 좋았다.
다, 좋았다.
꽤 오랜 시간 후, 하나처럼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졌다.
이보는 시선도 바닥에 떨궈가며 수줍어하는 로벨을 품에 안으며 고백했다.
“좋아해.”
“…….”
“나는 언제나 네가 좋아, 로벨.”
“아니…… 나는, 그걸론, 안 돼요!”
언제 부끄러웠냐는 듯이, 로벨이 그의 어깨를 팍 밀쳤다.
그러더니 당황한 그를 노려보며 따지기 시작했다.
“둔하긴. 상단 언니들이 오라버니를 얼마나 눈독 들이고 있는지 알아요?”
“음…… 그게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지금도 오라버니가 저를 아끼고 좋아하는 거 모르는 사람 있어요? 이제부턴 사랑을 해야죠, 사랑을! 나는 오라버니랑 대놓고 사랑을 할 거예요!! 아주 찐한 사랑!!!”
그렇게 대놓고 연인 티를 내야, 누군지 모를 그녀들이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보는 그게 신기했지만, 어깨를 부르르 떨어가며 화를 내는 로벨이 더 사랑스러웠다.
멍하니 바라보던 이보가 다시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달래듯이 긴 목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그래, 그러자.”
“……구체적인 계획 있어요?”
“계획이야, 있지.”
“그게…… 뭔데요?”
기대하는 로벨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웃고 말았다.
이보는 그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양을 머금은 소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네가 성년 될 때까지 기다리며 열심히 준비해둘게.”
마넬라노 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