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s gone crazy RAW novel - Chapter 204
204화.
디어뮈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것은 쾌검.
말 그대로 빛살같이 뽑아진 검은 시퍼런 오러블레이드를 두르고 공간을 가르고 있었다.
너무나도 빨라서 소리가 따라오지 못할 정도의 검이 일렁이는 공간을 향해 떨어져 내렸고, 그 순간 사람의 상반신을 겨우 가릴만한 원형의 방패가 불쑥 튀어나왔다.
은은한 빛이 서려 있는 것이 보통의 물건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디어뮈드는 코웃음을 치며 더욱더 검속을 가속시켰다.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오러블레이드와 가공할 속도의 조합은 세상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방어불가의 일격이나 마찬가지.
어지간한 오러블레이드나 방어마법 따위는 디어뮈드의 공격 앞에 무력했고, 이 일격이야말로 디어뮈드의 심상이 세상에 풀어진 모습이나 다름없었다.
제아무리 고명한 능력을 갖추고 있는 물건이라도 디어뮈드의 앞에서는 종잇장이나 다름없었으니 그의 자신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쩡!
“뭣?!”
세상 모든 것을 갈라 버릴 것만 같았던 디어뮈드의 일격이 막혔다.
크게 출렁거리며 뒤로 물러나기는 했지만, 흠집 하나 가지 않은 방패는 훌륭하게 디어뮈드의 일격을 막아냈고, 그 순간 눈썹을 꿈틀거린 디어뮈드의 검이 다시금 움직였다.
일격이 안 먹힌다면 이격을, 이격도 막아낸다면 적이 막을 수 없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 벽을 만들 정도의 달인인 디어뮈드의 공격은 한번 막았다고 해서 끝이 아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쾌검을 막다보면 어느새 상대는 난도질당해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디어뮈드의 검이 상대방을 지켜주는 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움직이려는 그때.
“그만.”
아렌의 한 마디와 함께 거짓말처럼 디어뮈드의 검이 멈췄고, 마치 시간을 되돌린 것 같은 움직임으로 물러난 디어뮈드가 아렌의 옆에 시립했다.
하지만 매서운 눈빛과 기세만은 죽지 않고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방패를 노려보고 있었으니 살벌한 기세가 온 공간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으으으.”
신음소리와 함께 방패 뒤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물감이 번지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렌의 눈으로도 제대로 그 원리를 파악할 수 없을 정도.
“…… 신력이군. 권능이 깃든 물건인가.”
아렌의 중얼거림에 디어뮈드가 그제야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는 현대의 마법체계로도 도저히 분석이 안 되는 물건이 제법 있었다.
때문에 호사가들은 그러한 물건들에 등급을 매겨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흔히 말하는 10대 명검이라느니, 불멸의 갑옷이라느니 하는 보물들이 바로 그것.
그렇지만 그중에서도 격이 다른 물건들이 있기 마련이니 세인들은 경외심을 담아서 신물이라고 불렀고, 신물의 대부분은 오래전 만신전의 신들이 직접 자신들의 힘을 담은 물건들이었다.
말 그대로 신의 권능이 담긴 물건들.
제아무리 초인의 위계에 도달한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물건들이 존재했고, 그것들은 대부분 헬리오스의 깊숙한 곳에서 엄중한 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때문에 디어뮈드는 납득한 것이다.
그의 검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를 수 있을 정도로 날카롭기는 하지만, 신의 힘이 깃든 것을 어떻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아. 안녕하세요오.”
방패의 뒤로 조그마한 머리가 슬그머니 솟아올라 아렌을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숙였다.
순하디 순해서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소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놓게 만드는 힘이 있었지만, 디어뮈드는 절대 방심하지 않았다.
상대는 무려 신물의 소유자가 아닌가.
겉모습에 속아서 마음을 놓았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신물은 충분히 그러한 일들을 벌일 수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동시에 아직은 어린 모습이 남아있는 훤칠한 청년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군.”
콜레트와 코린의 모습을 본 아렌이 피식 미소를 지었다.
* * *
“저. 저는 그냥 앞에서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코린이 조심스럽게 가야 한다고 해서 …….”
눈을 내리깔고 한껏 어깨를 움츠린 콜레트가 변명했고, 코린이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경계도 삼엄하고 친분만으로 접근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릴 것 같았습니다.”
“괜찮다.”
주절주절 변명을 내뱉는 콜레트와 코린의 모습에 아렌은 조용히 찻잔을 들었고, 디어뮈드는 실소를 흘렸다.
하나하나의 실력은 대단치 않았다.
나이치고는 충만한 신성력을 가진 소녀와 암살자 수업을 받은 것으로 보이는 소년은 확실히 동년배에 비해서 비범했지만 그것뿐.
지금 디어뮈드가 손을 쓴다면 자신들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숨을 끊어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신물의 존재가 두 소년, 소녀를 소드마스터도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고 있는 것이다.
소녀의 옆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는 방패는 절대의 방어력을 가졌다는 아이기스가 틀림없어 보였고, 소년이 옆구리에 끼고 있는 투구는 세상 그 누구도 착용자의 존재를 눈치챌 수 없다는 퀴네에가 분명했다.
겉모습은 그냥 낡은 방패와 투구지만 실상 두 물건은 신의 허락이 없다면 만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는 신물 중의 신물이니 실력 이상의 무언가가 둘에게 있다는 뜻이고, 그것이 디어뮈드가 방심하지 않고 있는 이유였다.
…… 그런 물건들을 감지해낸 아렌의 경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자신의 주인과 친분이 있어 보이지만 호위기사는 주인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하는 자.
그런 디어뮈드의 날카로운 시선을 느꼈는지 콜레트의 어깨가 조금 더 움츠러들었지만 디어뮈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렌이 반갑기는 하지만 살벌한 눈초리의 아저씨가 무서운 콜레트는 열심히 준비해 온 물건을 꺼내기로 마음먹었다.
슬며시 손을 품으로 가져가는 모습에 디어뮈드가 새파란 눈빛을 줄기줄기 뿜어냈지만 조심스레 움직여 주머니를 꺼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요오.”
“호오.”
익숙한 모습에 아렌이 미소 지으며 기꺼운 마음으로 주머니를 받아 열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올랐다.
“오랜만의 공물이로구나.”
아삭.
그림 같은 자세로 쿠키를 입에 넣은 아렌이 우물거렸고 콜레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꺼워하는 주인의 모습에 디어뮈드가 기세를 내렸고, 코린은 그제야 긴장을 조금 풀 수 있었다.
만사태평한 콜레트는 몰랐겠지만 암살자 수업을 받은 코린은 특유의 감각으로 디어뮈드의 살기와 기세를 그대로 느낄 수 있었고, 식은땀으로 전신이 축축이 젖어 있었던 것이다.
디어뮈드가 기세를 풀자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콜레트는 한껏 편해진 표정으로 조잘대기 시작했다.
이단심문관들에 의해 스카우트된 둘은 곧바로 헬리오스로 향했고, 간단한 적성 검사 후 집중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유피테르에 입학한 시점에서 재능은 증명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거의 초인에 준하는 싸움을 옆에서 보고 겪은 둘은 일반적인 동년배와는 차원이 달랐으니 교육을 맡은 자들은 크게 기뻐했으며 둘 역시 열성적으로 교육에 임했다.
콜레트와 코린 역시 힘에 대한 갈망이 강했던 것이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모두 열의가 가득하니 둘은 빠르게 지식을 흡수했고 이대로라면 최연소 이단심문관 기록을 갈아치우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닌 상황에서 사건이 터졌다.
로티컬이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게하르가 그라인드을 집어삼키려다가 실패했다.
다렌이 제도로 가는 와중에 습격을 당했고, 그 배후세력에는 황자들이 있었다.
급기야는 메카니와 그라인드가 혼인을 맺는가 싶더니만 악마가 소환되지 않았나.
결국 귀족연합군이 결성되어서 제도로 쳐들어갔고 현 상황에 이른 것이다.
헬리오스에서는 이 일련의 상황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았다.
황제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것은 진작 인식하고 있었고, 금지되어 있는 마법과 실험을 벌이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물증이 없었다.
제아무리 만신전의 권위가 드높고 이단심문관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지고 있다지만 상대는 황제.
제국을 이룩해낸 위대한 황제를 향해서 심증만으로는 이빨을 들이댈 수는 없었고, 그저 마음속으로만 삭히며 이를 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고, 급기야는 악마가 소환되었으며 모든 사건의 화살표가 황제를 가리켰다.
당장이라도 들고 일어나서 황제에게 성스러운 물고문을 선사하고 싶었지만 예전 마룡토벌 때 희생되어진 전력을 아직도 복구하지 못했다.
거기에 대륙 각지에서 악마가 소환되었으니 그나마 남아있던 성직자들과 신관들도 사태 수습을 위해 분분히 흩어져야만 하는 상황.
손발이 완전히 묶여버린 셈이니 분통이 터질 만도 하건만 교황은 냉정하게 상황을 다시 되짚었고, 결국 모든 것의 열쇠라 할 수 있는 이름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렌 드 그라인드.
갑작스럽게 나타난 괴물은 최근 벌어진 모든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고, 신과 가장 가까운 교황은 그 강대한 신성력으로 아렌의 중요성을 직감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신들의 시선과 의도가 교황에게 전해졌고, 고민하던 교황은 콜레트와 코린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헬리오스와 연결점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아렌에게 유일하게 접점이 될 수 있는 둘.
신의 배려에 감사하며 교황은 아직 교육 중인 둘을 불렀고, 하나의 임무를 맡겼다.
그 임무를 위해서 엄중히 관리되던 신물을 방출할 만큼의 중요한 임무를.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콜레트의 이야기를 들은 아렌이 고개를 끄덕였고, 디어뮈드는 흥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아무리 주인을 절대 명제로 삼고 있는 호위기사이기는 하지만 신앙은 다른 이야기가 아닌가.
주인의 영광은 곧 기사의 영광이다.
그런 신들의 지상대리인인 교황이 콕 집어서 아렌을 지목했다는 것이 그의 자부심을 가득 채웠다.
“이것입니다.”
자세를 바로 한 코린이 품속에서 조심스레 뭔가를 꺼냈고, 콜레트도 미소를 지우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코린이 꺼내서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것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평범해 보이는 상자였지만, 상자 주변을 온통 둘러싸고 있는 봉인은 내용물이 절대로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었다.
“내용물은 아느냐?”
“모릅니다. 교황께서는 그저 아렌님에게 전해주라고만 하셨습니다.”
“흠.”
코린의 말이 맞는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콜레트의 모습에 아렌의 눈이 깊어졌다.
“재미있군.”
아렌의 눈으로도 내용물을 볼 수 없었으니 겉에 붙여진 봉인은 신의 권능이 가득 들어간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내용물은 무려 신의 권능으로 봉인해야만 하는 물건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아렌과 같은 눈은 없었지만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디어뮈드가 아니었고 저절로 표정이 굳었다.
“…… 위험합니다.”
신앙과 주인 사이에서 갈등하던 디어뮈드는 주인을 택했다.
“헬리오스에서 도련님에게 해를 끼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엄중한 물건을 아무런 방비도 없이 취급할 수는 없습니다.”
무려 교황이 내려준 물건을 위험하다고 치부하는 디어뮈드의 모습에 일순 발끈한 콜레트와 코린이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들도 납득했다.
단순히 이동하는 것에 신물을 내어줄 정도의 물건이다.
모든 것을 막는 방패인 아이기스는 물리적인 것은 물론 저주와 마법, 심지어 인간의 의심까지 막아주었고, 세상 누구도 눈치챌 수 없다는 퀴네에는 둘의 모습을 세상의 인식에서 멀어지게 했으니 실상 콜레트와 코린이 아렌에게 접근하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디어뮈드의 한 마디에 그들도 새삼 깨달은 것이다.
둘이 전달한 물건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를.
“괜찮다.”
하지만 아렌은 웃었다.
내용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짐작 가는 것은 있었고, 아렌이 생각하는 것이 맞는다면 이 물건은 그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도움이 될지는 봐야겠지만.’
생각과 함께 아렌의 손이 봉인에 닿았고, 그 순간 휘황한 빛이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