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42
42화
그리고 아주 드물게, 아주 드물게– 빈센트 가문에서도 제국의 황가만이 가지고 태어난다는 신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이들이 있었는데 몇백 년 동안 그 신의 가호를 이어받은 자가 태어나지 않아 명맥은 끊긴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모르크 제국의 고위 가문들은 알고 있었다. ‘빈센트’ 가문의 그 뿌리를, 시작을. 해서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황제파에서도 엘리자벳을 히든카드로 두는 또 다른 이유였다. 그리고 그녀를 쉽사리 버리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아, 협상 카드론 뭘 제시하실 것입니까.”
“펠르탄 제국의 황위 계승 문제를 제시할 것이다. 저들이 제시한 것은 펠르탄 제국의 첩자가 왜 하필 루시엘라 가문에 들어와서 오즈번 루시엘라를 죽이려 했는가에 대한 답일 뿐. 직접적으로 황위 계승의 실세가 1황자도 3황자도 아닌 2황자라는 사실은 아무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카를시아는 아나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의 홍차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아나이스가 제시하고자 하는 협상 카드가 무엇인지 이미 파악이 끝난 그이기에 아나이스와 아라한의 대화를 좀 더 들어 볼 요량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2황자께선 아직 타이놀 제국에 볼모로 잡혀 있는 줄 압니다만……. 그게 과연 승산이 있는 걸까요. 애초에 2황자를 배제한 황위 계승 아닙니까.”
“우리가 그 2황자를 밀어준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애초에 볼모로 잡힌 것이 왜 1황자가 아니라 2황자일까. 1황자가 황위 계승 1순위라서? 그렇다면 애초에 태자 자리를 책봉받았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타이놀 제국 황제라면 황위 계승 1순위인 1황자를 볼모로 잡았을 터.”
“…그렇네요. 확실히 2황자 쪽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저들이 내민 1황자와 3황자의 황위 계승 문제로 첩자가 넘어왔다는 것을 펠르탄 황제에게 뿌린다면 꽤 볼만하겠군.”
“자신들의 거짓말이 들통나지 않도록 벨루아 후작은 어떻게든 우리가 내민 조건에 승낙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은 엘리의 후계자 문제일 것이고 말이지.”
아나이스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아라한과 카를시아는 생각했다. 엘리자벳이 독을 먹고 쓰러진 이상 귀족파의 권력이 더 커지게 둬서는 안 되겠다고. 그리고 엘리자벳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넣은 각설탕 하나가 엄청나게 큰 여파로 자신에게 다가올지.
만약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각설탕이고 뭐고 아예 독살 시도를 하지 않았을 테지만.
* * *
근위대에게 안내받은 대로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에인을 찾았다. 대장답게 기사들을 훈련시키고 있던 에인이 내가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훈련을 중지시키고 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몸은 괜찮으시죠?”
“응? 아아, 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가 올 때까지 잠시 다녀올 곳이 있는데.”
“음? 어디요?”
“지하 옥사.”
“…설마 그 죄인을 만나러 가시려는 겁니까.”
“말조심해. 죄인 아니야. 진범이 나타났어.”
“그래도 아가씨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변함없습니다.”
“그런 거 아니래도. 할아버지가 알면 기함할 것 같아서 몰래 다녀오려고 했는데 그러면 에인, 네가 또 불안해할 거잖아.”
“물론이죠. 하아…. 단장님께서는요?”
“폐하랑 할 이야기 있다고 하셔서 먼저 연무장으로 보내셨거든.”
“…후우, 빨리 끝내셔야 합니다.”
“알겠어~.”
결국, 내 말을 이기지 못한 에인이 나에게 지하 옥사를 안내해 주었다. 독 사건 하나의 여파가 이리도 클 줄이야. 자칫하면 주인공을 죽일 뻔했으니 이거야 원. 원작대로 죽는 건 고사하고 이러다가 내가 하는 짓마다 다 오즈번의 죄가 될까 두렵다, 두려워.
그렇게 옥사에 도착한 나는 에인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가 독방에 갇혀 있던 오즈번을 바라보았다. 감옥 안에 있음에도 금빛 머릿결과 푸르른 녹안은 빛을 잃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옥사의 어두움을 밝혀 주듯 ‘빛’ 그 자체를 뿜고 있는 듯 성녀라는 타이틀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영애…!!!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나요?! 독은…! 그…!! 어떡해……. 야윈 것 봐…….”
옥사에서 침울하게 고개를 떨구고 있던 오즈번이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고 인기척의 주인이 나인 것을 확인하자마자 감옥의 창살 사이로 얼굴을 가져다 댄 채 자신을 꺼내 달라고, 나는 죄가 없다는 말보다 나의 안위를 먼저 살피는 그녀였다. 그러나 그것마저 경계하던 에인이 내 앞을 막아서곤 매서운 눈동자로 오즈번을 바라보았다.
“에인, 물러나도록 해. 아까도 말했잖니.”
“저의 일은 아가씨를 지키는 일인지라 이것만큼은 양보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아.”
일단 오즈번의 상태가 괜찮은 것으로 보아하니 고문이나 추궁을 위한 협박을 받지 않은 것 같아서 안심이라고 해야 하나. 이 일로 당분간 오즈번을 보기 힘들 것 같은데. 하긴 이제 꼭 오즈번을 괴롭혀야 한다는 굴레에서 벗어났으니 조금 여유롭게 지켜보도록 할까.
“이제 곧 단장님께서 돌아오실 겁니다.”
“알겠어. 돌아가도록 하자.”
무언가 더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딱히 나눌 만한 질문도 떠오르지 않았고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앞으로 있을 즉위식과 계승식이겠지. 어쩌다가 판이 이렇게 커진 걸까. 공녀가 돼서 반역을 일으키는 게 더 빠를 것 같은데.
“그럼, 영애. 다음에 봅시다.”
나는 그 말만을 오즈번에게 남긴 채 돌아섰다. 그렇게 걸음을 옮겨 연무장에 도착한 나는 아나이스를 기다리기로 하고 연무장을 정리하는 에인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후계자가 되면 매일 검술을 수련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젠장!’
악녀로 죽을 때까지 조금은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했건만. 물론 애초에 악녀로 죽는다는 것 자체가 편안한 일은 아니다마는 서도 이렇게 후계자가 돼서 굳이 검을 잡고 싶진 않았다고. 돈 많고 인물 훤칠한 아가씨가 굳이 검으로 악녀 짓을 해야 하냐고!!
“하아….”
“이런, 이 할아버지가 많이 늦었나 보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는 나의 뒤로 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아나이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휙’ 하고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아나이스의 표정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짓고 만다.
“아니에요~ 에인이랑 재미있게 놀았는걸요. 할아버지야말로 이야기 잘하셨어요?”
“그래, 일단 어서 돌아가자꾸나.”
“네에~.”
그렇게 연무장 정리를 끝내고 복귀한 에인과 함께 마차로 이동한 나는 아나이스와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역시나 푹신한 마차의 소파란. 크으, 돌아가서 대중교통을 탈 수나 있으려나.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할아버지 집에서 자자꾸나.”
“……네.”
“피곤하진 않고?”
“……음. 네-.”
나는 간결하게 대답하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불안해하던 아나이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냈다.
“너에게 의견도 묻지 않고 덜컥 후계자 이야기를 해서 미안하구나.”
“아, 다 저를 위한 일이잖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아나이스는 그런 사람이었다. 손녀에게 한없이 착하고 부드러운. 그 흔한 잔소리도 싫은 소리도 안 하고 그렇게 엘리자벳이 사고를 쳤는데도 버리지 않는. 그래서 더 안타까웠던 인물이었다.
언제 이러한 사랑을 받은 적 있던가. 익숙하지 않은 사랑이면서도 그리워했던 사랑을 보여 주는 이 미중년 할아버지를 어쩌면 좋을까. 엘리자벳이 죽으면 비통함에 목 놓아 울진 않을까. 정을 붙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사랑받는 것에 익숙해지면……. 미련이 생기진 않을까.
여러 가지 복잡한 심경이 목 언저리와 가슴 깊숙한 곳에 박혀 무어라 말하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
“응? 왜 그러느냐.”
“그……. 즉위식은 언제 하시려고요? 물론 귀족 재판 이후에 할 것 같지만…….”
그 귀족 재판을 언제 여는지 모른단 말이오!! 아니, 왜 나 아는 것이 하나도 없어!! 이미 틀어져서 무용지물이 된 원작만 생각나냐고!! 엘리자벳의 기억이라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뭐,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아나이스가 이해할 순 없겠지만. 흑…….
“흠. 그렇구나. 귀족 재판이 끝나고 신전에 연통을 넣어야 하니 일주일 정도는 걸릴 것 같구나.”
“신전은 왜……?”
“그야 즉위식을 할 때, 대사제의 축복이 필요하니까.”
원작에서는 빈센트 가문이 공작가가 되는 일이 없었기에 즉위식에 사제의 축복이 필요하단 걸 몰랐고 이건 나에게 좋은 기회였다. 신의 뜻대로를 운운한 그자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 테니까.
또, 그 광석이 신전에서 매번 정화하는 아그리아스 습지대에 있다는 걸 안 이상 가벼이 넘길 순 없는 상황이었다. 뭐가 되었든 엘리자벳이랑 연관이 있을 것 같으니까.
“그럼 제가 신전 한번 가도 돼요?”
“……네가?”
“네. 어차피 후계자 임명에도 사제의 축복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
“그건 그렇지만…… 엘리. 말이 후계자지 이 할아버지는 널 그런 위험한 날붙이 사이에 두고 싶지 않구나.”
“그래도 형식적인 모습은 보여 줘야 귀족파들도 의심을 안 할 것 같은데…….”
“……하아. 엘리.”
아나이스는 말없이 날 끌어안고는 한동안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귀족파들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할 엘리자벳의 운명을.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후회하며 또 죄책감을 느끼며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나 빈센트 가문의 외손녀로 태어난 이상 늘 귀족파들의 먹잇감이 되었던 엘리자벳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늘 미안해하던 아나이스였고. 문제는 귀족파들은 엘리자벳이 검술의 영재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 정도겠지.
황제나 아라한도 모르던 내용이니까. 물론 책을 통해 그 부분을 이미 읽은 나는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어떠한 파장을 일으킬지는 모르겠다.
‘일단, 곱게 죽기 그른 것 같다는 건 확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