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64
“실레나 님. 무엇인가를 보셨습니까?”
“아닙니다, 아무 것도. 그런데 지금 당신의 집으로 들어오는 이는 손님인가요?”
“예.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와야 할 듯 합니다.”
“혹, 실례가 되지 않으면 저도 같이 가도 될까요?”
“물론이지요. 모든 것은 실레나 님의 뜻대로 될 겁니다.”
그 말에 얇은 천으로 눈을 가린 채 앉아있는 여인이 화사하게 웃었다.
그러자 마치 수천 송이의 꽃이 핀 듯한 향기가 방 안에 진동했다.
‘인간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시는 건 처음인데.’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여인을 향해 내내 공손한 태도를 유지한 것은 다름아닌 이 저택의 주인이자 도미닉이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대상인, 사하르였다.
사하르가 눈짓을 하자 십 수 명의 하인들이 그녀를 돕기 위해 도열했다.
“가시지요.”
사막의 부호들의 저택은 특이한 구조였다.
저택 안은 마치 미로처럼 길이 꺾여 있었고 이 미터가 넘는 담장들은 공간을 한 눈에 담지 못해서 자신이 어디 쯤 있는 것인지 파악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눈을 가린 여인은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것처럼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을 향해 망설임없이 걸어나갔다.
응접실은 대상인의 칭호에 걸맞게 화려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최상급 대리석과 장인이 한 땀 한 땀 직접 짠 카페트,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가 가득한 그릇과 커튼, 벽 장식들.
그 사이로 얼핏 보면 벽처럼 보이는 분리된 공간이 있었다.
실레나라고 불린 여인은 이 공간 안의 방석 위에 자리잡았다.
사르륵-.
동시에 붉은 레이스 천이 내려와 그녀의 실루엣을 감추었다.
“사하르 님을 뵙습니다!”
“사하르 님을 뵙습니다!”
곧이어 응접실 안에 경비대장과 도미닉이 들어왔다. 그 뒤로 카림과 이안도 수행인의 자격으로 함께였다.
경비대장은 정말로 사하르가 시간을 내어줄 줄은 몰랐다는 듯 잔뜩 긴장해서 삐걱거리는 중이었으나 도미닉은 다른 의미로 긴장을 한 참이었다.
“이렇게 시간을 내어주시다니요, 감사인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사하르 님!”
경비대장이 먼저 사하르에게 말을 건넸다.
사막 왕국의 수도, 그 중에서도 부유층이 머무는 지역의 경비대장을 맡고 있었지만 그런 그도 사하르 쯤 되는 유력인사를 직접 마주하는 건 여전히 떨리는 일이었다.
“제국의 젊은이들이 사막의 법도를 지키고자 하니 내 어찌 무시할 수 있으료. 하물며 그들이 이미 이 노구와 연이 닿은 자들이니 기쁘게 맞이할 뿐.”
“번거롭게 하여 송구스럽습니다. 여기, 이 주머니를 받아주시고 부디 용서를.”
도미닉이 품에서 주머니를 꺼내 내밀었다.
사하르가 비단으로 만들어진 주머니를 보며 빙긋 웃고는 자신의 품 속으로 집어 넣었다.
“삿된 마음으로 가져간 것은 아닐 것이라 믿으니 용서할 것이 어디 있겠냐마는, 사막의 지고한 법률이 반드시 용서가 필요하다니, 능히 그대들이 바라는 용서를 내어주지. 경비대장, 이것이면 되겠나?”
“예, 사하르 님. 다만, 훗날 괜한 시비가 있을 수 있으니 여기에 서명을 좀 해 주시면…”
경비대장이 문서 하나를 꺼냈다.
이번 자수와 관련하여 절차를 제대로 끝냈다는 일종의 확인서였다.
“여기 있네. 치안을 유지하느라 애쓰는 그대에게 늘 감사하고 있음을 알아주길.”
짝!
사하르가 말은 마친 뒤 박수를 치자 얼른 수하가 앞으로 나서며 경비대장에게 금패 하나가 놓인 은쟁반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마침 좋은 낙타가 들어왔으니 바꿔가시게나.”
“아이고, 아닙니다! 사하르 님!”
“공무에 힘써달라는 사하르 님의 뜻입니다. 상회에서 정식으로 후원 목록을 정리하여 관청에 올리고 세금 납부도 마칠 것이니 혹시나 책이 잡힐까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 그러면, 잘 받겠습니다!”
시종이 부연설명을 해 주고서야 환한 얼굴로 일어서서 응접실을 나가는 경비대장이었다.
도미닉은 사막의 관리들이 제법 청렴하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법이 엄한가?’
뭐가 됐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나를 보면 둘을 안다고, 적어도 이 동네가 상식이 통한다는 점이었으니까.
“자, 이제 편히 말해보라. 어찌 이런 번거로운 일을 벌여 나를 찾아왔느뇨?”
“아, 역시 아셨습니까?”
“이것은 내 것이 아니니 돌려주지.”
사하르가 다시 주머니를 꺼내주었다.
애초에 그의 주머니를 훔쳤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 정도는 모두 파악한 듯 했다.
‘무슨 말을 해야 휘말리지 않고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도미닉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가장 시급하게 확인해야 하는 것은 그레이톤 상회가 남부에 지네를 풀어놓은 장본인임을 밝히는 것이다.
그레이톤 상회가 벌인 일임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 두 가지.
첫째는 직접적인 물질증거를 확보하는 일이었다. 지금 안톤이 여러 루트로 열심히 조사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 단서를 얻거나 증인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도미닉은 그 가능성을 낮게 보았다. 그래도 제국 후작가의 비호를 받는 이들이다. 그리 쉽게 단서를 넘겨주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 뿐이야.’
두번째는 벌레 전문가인 거지꼴의 모험가의 말이 모두 진실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사막에서 태초의 도시가 발견되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결계를 뚫기 위해 비슷한 결계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는 멜번 자작령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라면!
그래서 사하르가 직접 멜번 자작령으로 행차를 했다면!
이런 엄청난 움직임을 눈치 챈 제국 수도의 귀족들이 그레이톤 상단을 움직여 사막인들이 꽁꽁 감추고 있던 태초의 도시 근처에 접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전리품처럼 지네를 얻은 뒤 남부에 투척해 놓은 것이라면,
‘그럼 믿을 수 있지. 지네 한 마리의 경위를 숨기자고 이 엄청난 거짓말을 지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자, 그럼 이 사실들이 모두 진실이라는 걸 밝혀내려면 무슨 질문을 어떻게 해야 할까?
도미닉은 노회한 정치인이기도 한 대상인을 바라보았다. 그의 깊은 눈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저히 읽어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찾아온 것인 줄 알았는데.”
사하르의 목소리에는 언뜻 실망이 감돌았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찾아온데다 그 분께서 관심을 보인 인간이라 기대를 한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도 꽤나 영악하게 자신의 이목을 끌었던 자였으니 더욱 그랬다.
“정령입니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는 사하르에게 선문답같은 질문이 날아왔다.
“지금 뭐라고 했느뇨?”
“아, 정령 쪽은 아니군요.”
“그대…”
“그럼 드루이드? 마탑의 한 갈래로 흡수 된 영역이라고 들었는데요.”
“지금 무슨 말을…”
“이것도 아니군요.”
도미닉의 결심을 한 듯 말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사하르가 말려들었다.
그 모습을 뒤에 서서 지켜보던 이안과 카림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눈빛을 교환했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도미닉의 진짜 모습이 나온 것이다.
상대가 누구든 허를 찌르며 핵심을 파고들어 당황시키는 도미닉 특유의 대화술.
“총명한 젊은이라 생각해 시간을 내주었거늘, 그저 아무렇게나 떠들어대는 시정잡배와 무엇이 다를꼬. 실망이 크도다, 이만 자리를 무르고…”
“설마 엘프입니까?”
쿵-.
자신의 말을 자르고 들어오는 도미닉의 질문에 사하르는 심장이 저 발 끝으로 쿵,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착각이 잠깐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의 머뭇거림은 도미닉에게 확신을 주었다.
“엘프군요.”
“자네…!”
“태초의 도시가 엘프들의 도시였다니. 역시 세상은 넓고 신기한 일은 많네요.”
딱-.
사하르의 눈이 매섭게 변하더니 손 끝을 한 번 소리내어 튕겼고 어디에선가 나타난 무사들이 응접실의 문과 창을 모조리 막아섰다. 손에는 곡선 형태의 검이나 짧은 단궁, 창 따위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날붙이의 예기가 예사롭지 않은 것을 보면 전사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위가 어느정도의 경지인지 짐작케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묻지 않겠다. 아까운 일이로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챙!
이안도 얼른 검을 꺼냈지만 머릿수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어떻게든 길을 뚫을 테니 뒤를 보지 말고 뛰어라.”
도미닉에게 으르렁거리듯 낮게 속삭이는 이안.
그러나 그는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아, 아. 이 정도면 자백이나 마찬가지죠? 노영주님?”
– 그래. 내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도미닉이 품에서 작은 수정구를 꺼냈다.
통신용 마법구였다.
‘아, 원래 스파이 노릇 할 때는 도청기 하나쯤은 필수 아니냐고.’
K-범죄 드라마의 필수품, 도청기와 무전기.
일체형으로 품에 넣어서 다닐 만 한 작은 크기는 무려 금화 수백 개 짜리였다. 통신 가능 시간은 십 분도 채 되지 않는 주제에 금화 수백 개는 미쳤다 싶은 가격이 분명했지만,
‘어차피 내 돈 주고 산 것도 아닌데 뭐 어때.’
노영주한테 받아낸 것이니 아까워 할 필요가 뭐가 있겠나.
“자, 이제 협상해 볼 마음이 좀 생기셨나요, 사하르 님?”
도미닉의 품에서 마법구가 나온 직후, 이미 전사들을 모두 물린 사하르.
확실히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이었다.
이제야 막 태초의 도시의 결계를 넘을 수 있는 고대 엘프의 후손을 수소문해 사막으로 모신 참이었다.
사막의 거상이 긴장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뇨?”
“예, 뭐. 그러질 않길 바라긴 했습니다만.”‘
“어떻게?”
“얻은 정보를 조합해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순서대로 찍었습니다.”
도미닉이 엘프를 떠올린 건 얼마 전 에버그린에 정착한 스톤해머 덕분이었다.
그동안은 알아도 본 적이 없으니 그저 전설 쯤으로 취급하며 살던 이종족을 눈으로 직접 보게된 이후, 엘프나 수인족들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던 것이다.
‘딱 사이즈 나오잖아. 메마른 사막 땅에서도 밀림을 유지할만큼 나무와 친한데다 도시라고 불릴 만한 규모를 유지한다면 지능과 능력이 모두 막강한 이들일테고. 무엇보다 멜번 자작령의 풍요로움의 근간과 연결되는 것이라면, 엘프가 딱이지. 음. 나올 때가 됐어.’
드워프와는 달리 엘프는 그들의 도시가 알려져 있지 않은 종족이었다.
비밀이 많은 신비로운 이종족, 엘프.
그들의 존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일을 아는 자는?”
“사막에선 적어도 우리 일행들 뿐입니다. 하지만 보셨죠? 저희 노영주님께서 모두 들으셨으니 저희를 어찌하신다면 순식간에 이 비밀이 퍼져 나갈 거예요. 그러니까 저희 좀 살려주셨으면 좋겠는데. 털 끝하나 다치지 않고요. 아픈 걸 잘 못참거든요, 제가.”
“으하하하! 재밌는 자로다, 재밌는 자야!”
도미닉의 너스레에 사하르가 결국 무릎을 치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곤 은근하게 덧붙였다.
“나에게 결혼하지 않은 딸이 스물이 있는데 모두 하나같이 사막에서 유명세를 치르는 미인들인데다 어지간한 사내놈들보다 훨씬 똑똑한 아이들이야.”
“예?”
“그 중 하나를 그대에게 주지. 금화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나룻배를 띄워 뱃놀이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지참금도 함께. 그러니 바닷가 촌장 노릇은 관두고 내 사위가 되어 사막으로 적을 옮겨보는 건 어떠료?”
순간 일행들의 입이 벌어졌다.
파격적인 스카웃 제의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돈 좋아하는 도미닉의 성격을 알기에 이안은 진심으로 조마조마했다.
“아휴, 전 아직 결혼 생각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만 휘장 뒤의 저 분도 나오셔서 함께 이야기를 하시면 안되겠습니까?”
“이제와 무엇을 숨기겠느냐만은 아직은 때에 이르지 않았음이니.”
휘장 뒤의 여인이 고개를 살짝 가로 젓는 것을 본 사하르가 거절의 뜻을 비추었다.
“그렇습니까.”
“입을 다물어 주겠나?”
“예. 저희도 다른 것을 찾다 여기까지 온 것이라 사실 사막의 비밀을 파헤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사막의 부흥은 곧 제국의 위험이 되는 법인데도?”
“제국이 아니라, 제국의 수도 귀족들에게 위험한 일일 것 같은데요.”
한 번의 망설임도 없이 나온 도미닉의 말에 사하르가 크게 기꺼워했다.
“충성심이라곤 없는 자로군. 아주 마음에 들어. 좋아, 내 딸, 둘을 내어 주겠네. 지참금도 두 배가 될 테지.”
“부인 하나도 싫은데 둘을 어떻게… 그보다 더 쉬운 결심 하나만 해 주시면 되는데 말이지요.”
“음?”
“카팜 열매, 제가 단독으로 제국에 가져 갈 수 있도록 좀 도와주십시오.”
“…카팜 열매?”
사하르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의 딸을 거절하고 고작해야 열매 하나의 무역권을 달라니.
“그것만 해결해주시면 엘프? 머릿속에서 싹 잊어드리겠습니다. 아, 진짜로!”
지금도 해야 할 게 많아서 바빠죽겠는데 엘프 고향 찾는 일까지 건들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요, 하는 도미닉의 속마음은 아마 응접실에 있는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도미닉은 정말로 이제 이런 일에 그만 좀 휘말리고 싶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나 얼른 한 잔 먹고 싶네.’
엘프? 알아서들 하셔.
난 이제 좀 집에 갈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