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of another world is well fed RAW novel - Chapter 96
“내 성의를 끝까지 무시할 텐가?”
“미안하지만 나는 그것을 먹지 못한다고 아까부터 계속 말해오지 않았나요?”
“글쎄, 한 입만 먹어보라니까!”
한쪽 눈만 간신히 가리는 가면을 쓴 남자가 한 여인에게 윽박을 질러대는 중이었다.
“먹을 수 없어요. 차라리 저 쪽에 있는 샐러드를 먹을 테니 그것은 그대가 먹는 게 어떻겠어요?”
“지금 이 몸이 주는 걸 그냥 거부하는 것도 아니고, 설마 의심을 하는 거야, 이런 경을 칠…!”
“의심이라니요?”
고운 목소리의 여인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사내를 더 자극한 듯 했다.
“퉤! 먹으라면 먹을 것이지, 말이 많아! 먹어.”
“그럴 수 없다 말씀 드렸습니다.”
“꼴을 보아하니 귀족은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상회의 고명딸? 아니면 마법사인가? 어느 쪽이든 내 말을 듣지 않으면 후회할 텐데. 그러니 마지막 기회다. 먹어.”
누가 봐도 억지였다.
사내의 언성이 높아지자 근처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하지만 목소리로 사내가 누구인지 눈치채곤 슬쩍 자리를 피할 뿐이었다.
“오늘은 저 아가씨가 타겟이 되었나 보네요.”
“차림새를 보아하니 귀족이 아닌 것 같은데, 음. 마법사이려나요?”
“남부에서 온 여인일지도 모르지요.”
“쯧쯧-. 하필이면 데릭 공자에게 걸리다니요. 운도 없지.”
몇몇 사람들이 수근댔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는 있지만 수도 사교계의 사건사고를 좀 안다하는 사람들이 데릭의 목소리를 몰라볼 일은 없었다.
수도 사교계 인사들에게 젊은 구제불능 망나니를 셋 꼽아보라고 하면 누구나 이야기 하는 이름이 있었다.
하나는 재능은 쥐뿔도 없으면서 마검사가 되겠다고 설치고 다니는 백작가 아들.
그래도 여긴 조롱의 대상이 될 뿐 딱히 피해자가 나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데릭은 달랐다. 피해자가 수도 없이 많았던 것이다.
유서 깊은 가문의 레이디들은 그를 경멸했지만 에버혼 10대 상단 중 하나를 가진 가문을 이어받을 놈인지라 대놓고 싫은 소리를 하지는 못했다.
자작 가문으로 가문의 위상이 높다고 하지는 못해도 엄청난 금력으로 고위 귀족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집안이었으니 말이다.
물론 데릭도 누울 자리는 보고 발을 뻗는 정도의 지능은 있어서 주로 자신에게 끽 소리도 내지 못할 하급 귀족이나 평민 여인들을 건들곤 했다.
아, 구제불능 3인방 중 마지막 한 명은 누구냐고? 누구겠나.
워스트 오브 워스트를 장식하는 건 역지 제국의 황태자지.
“먹어.”
“몇 번을 이야기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걸 보니, 혹시 공자께서는 제국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나요?”
풋-.
여인의 순수한 물음에 사방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자신이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생각에 데릭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쾅!
“나랑 지금 장난 하자는 거야?”
데릭이 성큼 다가와 여인의 어깨를 밀치려고 하자,
“…내 허락 없이 내 몸에 손을 대면 그 팔, 잘려요.”
여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변했다.
“뭐? 으하하하! 잘려? 별 소리를 다 듣겠군. 남부의 계집들이 위아래도 모르고 설치고 다닌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수도에 왔으면 수도의 법을 따라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지. 오냐, 내가 오늘 밤새 네 년에게 수도의 예법을 가르쳐 주마.”
“나는 경고했어요. 두 번 말하지 않아요.”
“입 벌려. 그리고 씹어.”
차가워진 여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데릭은 비열하게 히죽거리며 케이크를 억지로 그녀의 입에 밀어넣을 준비를 마쳤다.
술과 만나면 급격하게 졸음이 오는 독버섯 가루를 몰래 뿌린 케이크.
“먹으라고.”
“그만하지.”
들이민 케이크가 여인의 입술에 뭉개지려고 하기 직전, 데릭의 앞을 가로막는 이가 있었다.
“뭐야?”
“내가 할 말이군. 넌 뭔데 감히 싱클레어 노백작님의 연회에서 소란을 피우는 거지?”
이안이었다.
혹시 모를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파티장 외곽을 돌고 있던 이안의 눈에 띈 것은 감히 엘프 여인을 희롱하는 사내였다.
‘죽는 방법도 가지가지군.’
대충 상황을 보아하니 남자가 건넨 음식을 엘프 여인이 거절하 듯 보였다.
엘프인 줄 몰랐으니 그런 것이겠지만 어쨌든 크림에 달걀이 잔뜩 올라간 것을 들이 밀었으니 숲의 요정이 퍽이나 승낙했을까?
싫다는 말에도 끈질기게 억지를 부리기에 처음 이안은 거절당한 것이 면이 서질 않아서 진상을 피우는 것이라 여겼지만 주위 반응에 확신했다.
‘장난질을 쳤어. 쓰레기 같은 놈.’
하지만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연회장 한 복판에서 팔목이 잘리는 걸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가까이서 본 엘프들은 평소엔 꽤나 온화하고 순종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가 정한 선을 넘는 순간 과격하기가 드워프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도미닉은 그런 엘프들을 보고 ‘잘생긴 또라이 집단’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다면 하는 이들.
벌써 주변에 정령이 도착한 것인지 흉흉한 바람이 불어오지만 아무래도 저 놈은 이 마나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는 듯 했다.
“가면 하나 썼다고 별 꼴을 다 보는 군.”
망나니가 거칠게 가면을 벗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이제 내가 누군지 알았지? 그러니까 가던 길 가. 보아하니 기사 같은데 정의감이니 기사도니 하는 것들은 네 놈 출세길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거다. 이 몸이 오늘 기분이 좋아 아량을 베푸니 무릎 꿇고 빈다면 봐 주지.”
데릭은 자신이 얼굴을 드러냈으니 멈칫거리며 기사가 발을 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교 모임에 참석해서 힘 있는 사람들과 연줄을 대려고 전전긍긍하던 기사들은 언제나 그의 ‘아량’에 감사하며 슬슬 도망을 쳐 왔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안은 그런 이름만 기사인 칼잡이가 아니었다.
“손목이 잘릴 뻔 한 걸 구해줬더니 그냥 둘 걸 그랬나.”
“뭐? 네 놈이 그래도!”
“…그냥 자르실래요?”
이안이 엘프 여인을 돌아보며 그냥 처분을 직접 하시겠느냐는 제스쳐를 취해보였다.
알게 모르게 과격함에 물든 이안이었다.
“거, 기사님까지 그러시면 어떡합니까?”
엘프 여인이 ‘그래도 될까요?’ 반색을 하며 앞으로 나서려는데 어느새 나타난 도미닉이 그 앞을 막아섰다.
“엘프 님도 좀 그만 하세요. 그래도 되긴 뭘 그래도 되요?”
“아, 안되나요?”
“당연하죠. 여긴 제가 마무리 할 테니 저 쪽에 와인 시음회에나 한 번 다녀오세요. 방금 좋은 와인이 많이 서빙되었답니다.”
“어머, 그래요?”
도미닉의 말에 총총 사라진 엘프 여인.
“네 이 년, 어딜 도망가!”
그러나 여전히 정신을 못차치고 악다구니를 쓰는 사내를 보고 도미닉이 안됐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손님?”
“넌 또 뭐야?”
“에헤이. 제가 누구인지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보다 제가 아까 한 말 못들으셨어요?”
“뭐?”
“저 여인이 엘프라는 말 말이에요.”
“…어?”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알현을 하고자 오신 엘프님들에게 이거 참…”
데릭은 호색한이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황제께서 국빈으로 대접하라던 엘프들? 이런 젠장! 만약 저 년이 나를 벌해달라 황제에게 고하기라도 하면…!’
그렇다면 옳다구나 하며 황제는 자신의 잘못을 핑계로 가문의 부를 뭉텅이로 뜯어갈 것이고, 그렇다면 자신은 호시탐탐 제 자리를 노리는 이복동생에게 칼자루를 쥐어주게 될 것이 분명했다.
“거, 거짓말이다! 귀가 뾰족하지 않았어! 엘, 엘프는!”
“아,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그게 탈착식이더라고요. 정령과 소통을 할 때만 뾰족하게 변한다지 뭐예요.”
낭패였다.
사내의 눈 앞이 파랗게 변했다.
“…내가 술이 취해…”
“그럼요. 그럼요. 그런데 엘프 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제가 가까이서 지켜봐서 아는데 제법 원한을 오래 가지고 가시더라고요. 아직 인간 사회가 익숙하지 않으시다보니 과격한 면도 있고. 이건 혹시나 다음번에 또 실수하실까봐 말씀드리는 건데 그 손목, 진짜 잘릴 뻔 하셨어요.”
“딸꾹!”
사내가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보곤 딸꾹질을 시작했다.
“사과하세요. 진심으로 말이에요.”
“……”
“숲의 요정입니다. 거짓과 진심을 구분하는데 도가 튼 분들이라 해를 입을까 두려워 거짓말로 모면하려는 사과는 구분하실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엿들어서 죄송합니다만 공자님. 데릭 상회의 도련님이시지요?”
“…그래.”
“제가 어깨너머 듣자하니 이번 황실 회의에서 데릭 상회를 포함한 세 상단들이 엘프들의 도시와 직접 교역권을 따내기 위해 경쟁한다지요?”
명백한 협박이었다.
교역권 경쟁에서 빠지고 싶냐는.
“그런데 넌 누군데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
“싱클레어 노영주님과 엘프를 모시고 여기까지 온 에버그린의 시장, 도미닉이라 합니다.”
그제야 이름을 밝힌 도미닉.
이름을 들은 사내의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허! 누군가 했더니 고작해야 평민 나부랭이가 내 앞을 가로막고 감히 이 몸을 가르치려 한 것인가. 주제 파악도 못하는 놈이 있나!”
상대의 반응에 도미닉이 이마를 짚었다.
근처에 이미 꽤 모여든 사람들 사이에서 가면까지 벗고 얼굴을 드러낸 사내. 아마도 그는 땅에 떨어진 체면을 만회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을 모양이었다.
그런다고 자존심이 회복되지는 않을 텐데.
‘말이 안 통하는 놈이구나?’
그런 이들이 있다.
좋게 말을 하면 알아듣지를 못하고 까부는 놈들. 그러다가 결국 더 쥐어터질 뿐인데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불쌍한 족속들.
“그럼 이 기사는 네 놈의 수하이냐?”
“예?”
“평민 나부랭이가 꼴에 시장이라고 기사까지 거느려? 크크. 웃기는 일이다. 이 봐. 기사놈. 너는 얼마나 존심이 없으면 기사 씩이나 되는 놈이 평민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갔누? 으하하하!”
저급한 빈정거림이었지만 이안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안의 주변을 뱅글뱅글 돌며 마치 상품을 품평하듯 위아래로 훑어보는 사내.
“명예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자와 입씨름을 했다니, 쳇. 이래서 남부 것들과는 말을 섞지 말자고 다짐했던 것인데.”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자존심이 세워졌다고 생각한 것일까?
사내는 만족한 얼굴로 자리를 뜨려 했다. 엘프에게 ‘실수’를 한 것은 가문의 힘으로 뇌물을 보내면 될 것이니 문제가 될 건 없을 거라 여겼다.
“쯧쯧-. 흥이 떨어졌으니 어쩐다. 아! 아쉬운대로 네 년에게 은혜를 내리마! 흐흐!”
“놔, 놔주세요! 공자님, 제발!”
하지만 망나니가 왜 망나니겠나.
돌아서던 데릭은 근처에서 음식을 서빙하던 하녀의 손목을 덥석 낚아채고 질질 끌고가려고 했다.
고작해야 하녀 하나였다.
엘프도 아니고 귀족도 아닌.
그래서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뻗지 않아서 제 자존심과 흑심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상대.
손목이 잡힌 하녀가 애원했지만 근처에 모였던 구경꾼들은 재밌는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흥미를 잃고 해산하려고 하던 순간.
스르릉-.
“아무래도 그 손목은 그냥 잘라버리는 게 낫겠어.”
가면 아래 이안의 표정이 싸늘했다.
사내는 날붙이의 생경한 감촉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가문의 위상을 등에 업고 행패나 부리고 다닐 줄 알았던 개새끼는 이런 식으로 진검의 위협을 받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 어…”
도미닉도 이마를 짚었다.
겨우 상황을 마무리 하려는데 다시 원점이다.
스톤해머도 아니고, 카림도 아니고, 이안이 사고를 칠 줄이야.
‘요새 조금 불안정해 보이긴 했지만, 어휴.’
도미닉이 이안에게 걸음을 옮겼다.
귀족을 계속 위협하고 있을 수는 없으니 말려야지 어쩌겠나.
“이게 다 무슨 일이지?”
그 때, 구원자가 나타났다.
싱클레어 노백작이었다.
사람들은 남부의 사자가 흘리는 기운에 압도당해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노백작은 더 감출 이유가 없다는 듯, 소드마스터의 기운을 사방에 내보였고, 파티에 참여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이들은 모두 동시에 깨달았다.
제국에 또 한 명의 소드마스터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제자라고 나선 거구만.’
그리고 제국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을 이 소식에 파티에서 있었던 잠깐의 소란은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단 한 사람.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 좀 모자란 머저리만이 이를 바득바득 갈 뿐이었다.
***
“윽!”
“우웨엑!”
며칠 뒤.
엘프에다 소드마스터까지 등장해 흥분이 가득한 수도 한 쪽에서 픽픽 쓰러지는 사람들이 조금씩 생겨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