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rd want to play RAW novel - Chapter 150
150화
“이것도 먹거라.”
리베르타가 다가가 빵을 내밀자, 휙 낚아챈 거지 노파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입에 마구 쑤셔 넣었다.
우걱우걱!
“천천히 먹거라. 체하겠다.”
게눈 감추듯이 빵과 식판 위의 음식을 다 먹은 노파는 자신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리베르타에게 말했다.
“맛있어! 더 줘!”
“그래, 많이 굶었나 보구나.”
마치 어린아이처럼 리베르타에게 칭얼대는 노파를 바라보던 필리프의 사고가 느려지며 문득 누군가가 떠올랐다.
‘할아버지……?’
강현수 시절 자신을 키워 준 할아버지.
음식에 집착하고, 말투와 행동이 아이 같은 노파의 모습이 말년에 병마로 고생하시던 할아버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리베르타가 준 음식을 다 먹은 거지 노파가 이번에는 앤디에게 달려갔다.
“나 밥 줘, 배고프다.”
“아니, 아까 그렇게 먹고 배고프단 소리가 나와요?”
기가 찬 나머지 앤디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노파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식판에 있던 빵을 휙 낚아채 갔다.
“제길! 적당히 하라고, 할망구!”
“앤디 경, 그만둬!”
필리프의 만류에 불구, 앤디는 노파가 가져간 빵을 도로 빼앗으려 했다.
하지만 이리저리 용을 써 봐도 그의 손은 노파를 잡아채긴커녕 매번 허공만 휘저을 뿐.
‘이런, 빌어먹을!’
얼굴이 벌게진 앤디는 늑대가 사슴을 덮치듯, 노파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노파는 슬쩍 피해버렸고, 앤디는 그녀의 발에 걸려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푸하핫, 뭐 하는 겁니까. 앤디 경.”
“총만 쏘느라 감이 다 죽은 거 아닙니까?”
호위대의 기사와 병사들이 낄낄대며 앤디를 놀려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테리는 웃지 않았다.
그는 칼자루에 손을 얹으며 거지 노파를 노려보고 있었다.
‘저 노파, 기척도 없이 나타났어. 정체가 뭐지?’
식사 중이었지만, 테리는 전신의 감각을 높여 사방을 경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식판을 빼앗긴 병사가 소리치기 전까진 노파가 나타난 걸 전혀 몰랐다.
‘게다가 앤디는 하급이긴 하지만, 오러 익스퍼트다.’
대충 건성이었긴 하지만 그의 몸놀림은 일반 기사보다 빠르다.
그런데 왜소하고 굶주린 노파가 그걸 피한다고?
심지어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기까지?
‘혹시 영주님을 해치려는 암살자인 것은…….’
테리가 경계심을 끌어올리고 있을 때, 거지 노파가 불쑥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아니, 대체 어느 틈에!’
저도 모르게 검을 반쯤 뽑은 테리.
하지만 채 다 뽑기도 전에 노파는 그의 등 뒤로 돌아들어 갔다.
‘이, 이런! 뒤를 잡혔어!’
“도와줘, 쟤가 괴롭혀.”
“할멈! 치사하게 숨지 말고 나와!”
망신살을 구긴 앤디가 펄펄 뛰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필리프가 그를 말리고 나섰다.
“됐어. 그만해. 치매 든 노인인 것 같은데 열 내서 뭐 하려고.”
“치매라고요?”
“그래, 그러니 흥분을 가라앉히라고.”
“어휴…… 알겠습니다.”
필리프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쉰 앤디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필리프는 여전히 테리의 등 뒤에 웅크리고 있는 노인에게 자신의 빵을 건넸다.
“할머니, 이것도 먹을래요?”
고개를 끄덕인 노파는 냉큼 빵을 받아먹었다.
잠시 후.
필리프가 준 빵까지 다 먹은 노파는 그제야 배를 두드리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홀홀, 배부르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에 눕더니 금세 코를 드르렁 골며 자기 시작했다.
완전 무방비한 자세에 테리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뭐지?’
자신이 반응할 수도 없을 정도로 놀라운 움직임을 보여 초일류 암살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배만 채우고 끝이라니!
암살자라면 절대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뻘쭘했던 그는 반쯤 뽑았던 검을 도로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 모습에 뭔가 심상찮은 기분을 느꼈던 필리프가 테리에게 물었다.
“위험한 노인인가?”
“모르겠습니다. 단 보통 노인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
“지금 이 모습이 기만이라고 생각하나?”
“영주님, 일단 묶어 두는 게 어떻습니까?”
슬쩍 끼어들어 조언을 건네는 앤디의 말에는 좀 전의 일에 대한 감정이 묻어 있었다.
그때 마린과 리베르타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 악의는 없으니까.”
“그렇다. 저자는 그저 늙고 병들었을 뿐이다.”
평소에는 으르렁대던 둘이 같은 의견을 내놓으니 이상했다.
“너희들 저 할멈이 누군지 알아?”
“모, 몰라. 그냥 성녀의 감으로 괜찮다는 느낌이 들더라고.”
“그대에게 해를 끼칠 사람은 아니니 안심해라.”
성녀 둘이 보장했으니 일단 악인은 아닐 것이다.
고개를 갸웃한 필리프는 노파가 깨어나면 취조해 보기로 했다.
***
“현수야, 나 배고프다.”
“할아버지. 방금 전에 아침 드셨잖아요. 여기 약부터 드세요.”
“싫어! 밥 줘! 배고프단 말이야!”
때 쓰다 못해 어린애처럼 엉엉 우는 할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손자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이 할 수 있으면 어떻게든 고쳐드리겠지만, 의사의 말에 의하면 치매는 불치병이었다.
본인도 고통스럽지만, 가족은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아, 꿈이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필리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현수 시절에 가장 힘겨웠던, 그리고 잊으려 애썼던 일이 다시 떠오르게 될 줄은 몰랐다.
‘저 이상한 할머니 탓이군.’
필리프, 아니, 강현수의 할아버지는 3년 정도 치매를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말년의 언행이 저 노파와 비슷했다.
‘치매 환자는 먹어도 배 부르는 걸 못 느낀다고 했었지? 그래서 계속 먹게 된다고 말이야.’
필리프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불침번 중이던 테리가 다가왔다.
“영주님, 깨셨습니까?”
“몇 시지?”
필리프의 물음에 테리는 드워프제 회중시계를 보곤 대답했다.
“새벽 5시 반입니다. 좀 더 주무시겠습니까?”
“아니, 충분히 잤어.”
리베르타나 드레이크 등 몇몇은 이미 일어나 있었다.
필리프가 모포를 정리하고 있을 때, 자고 있던 노파가 들썩이며 일어났다.
“으으, 물…….”
목이 마른지, 물을 찾는 노파에게 필리프가 가죽 수통을 건넸다.
목을 축인 노파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짓다가 미소를 지었다.
“고맙네, 젊은이.”
“정신이 좀 드시오?”
“응, 하늘에 가오리 같은 놈을 보고 따라갔던 게 생각나는데 그 뒤론…….”
‘우리 비행선을 본 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노파가 물었다.
“근데 여긴 어디지?”
“미클라티움 근교 숲이오. 당신은 누구요?”
“나는…… 음, 그러니까…….”
노파는 멋쩍은 웃음을 지을 뿐, 대답하지 못했다.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거요?”
“홀홀, 자네도 나이가 들어 봐. 이 늙은이처럼 쪼글쪼글해지면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잊어버리는 것도 많을걸.”
‘역시 치매로군.’
예상했던 대로였다.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지만 만족스런 대답을 들을 수 없었던 필리프는 리베르타에게 다가가 부탁했다.
“저 노파는 지금 심각한 질병을 앓고 있어. 네가 치료해 주면 좋겠는데?”
“안타깝지만 불가능하다.”
“뭐?”
설마 치유의 성녀인 리베르타가 못한다고 말할 줄은 몰랐던 필리프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막 일어난 마린에게도 물어봤지만 같은 대답이 나왔다.
“안 돼, 내 힘으로도 무리야.”
“어째서?”
“저 할멈은 신성력은 물론이고 영능도 먹혀들지 않는 상태니까.”
자연스런 노화나 그로 인한 치매는 성녀가 나서도 치유가 불가능하단 말인가.
혹시나 했던 필리프는 마우도 불러서 물어봤다.
‘쳇, 늙으면 죽어야 한다는 거냐?’
결국 노파를 치료하는 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보게나, 젊은이 아침인데 밥은?”
“줄 테니 좀 기다려 보시오.”
“그래? 그럼 그사이 세수나 할까.”
자리에서 일어난 노파는 테리의 등에 덥석 매달렸다.
“왜 이러십니까?”
“홀홀, 내가 다리가 아파서. 기사 청년이 물가로 좀 데려다줘.”
“어젯밤에 앤디와 싸울 때는 잘 움직이시던데요?”
“싸워? 내가 언제?”
천연덕스런 노파의 대꾸에 테리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그가 노파를 업고 시냇가로 가는 것을 바라보던 앤디가 다가와서 물었다.
“영주님 저 노파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 일단 미클라티움에 도착할 때까진 돌봐줘야겠지.”
병든 노인을 차마 숲 한 가운데 버리고 갈 수 없는 노릇.
특히 할아버지가 생각나 못 본 척할 수 없었던 필리프는 미클라티움까지 데려가기로 했다.
가족을 찾게 관청에 맡기거나, 신전에 맡겨 돌보게 하면 될 거라고 보았다.
‘그것도 그렇지만, 테리가 경계할 정도로 심상찮은 인물이니…….’
리베르타가 위험하진 않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누군지 확실히 파악하는 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
다음 날, 필리프 일행은 미클라티움에 도착했다.
도시는 섬에 자리 잡고 있는데, 선착장을 지키는 관리에게 아르트리아 국왕의 친서를 보여주자, 얼마 후 찾아온 신성 제국 외교관과 성기사들이 그들을 인도했다.
“와, 여기가 미클라티움이구나!”
“저게 그 유명한 3중 성벽인가 봐!”
고대 엘카노스 제국의 황실 직할령이었던 미클라티움은 지난 2천년 동안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로 성장했다.
라테라니아 대륙과 동대륙 레반타니아 사이에 있는 카르카스 해협 중앙의 섬에 자리한 이 도시는 난공불락의 도시이자, 동방 교역의 중심 중 하나로 유명했다.
그래서 도시 자체도 이국적인 동방의 문화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이스탄불, 아니, 콘스탄티노플 같은 느낌이군.’
거대한 돔 양식의 대신전은 성 소피아 성당과 꽤 비슷하게 생겼다.
아름답고 웅장한 순백의 대신전이 보이는 위용에 다들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저 대신전은 12대신 중 으뜸이자, 정교회의 주신인 하늘과 태양의 신 카루스 님께 헌납된 것이지요.”
‘카루스라…… 어째 낯설군.’
안내해 주는 외교관의 설명에 필리프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낯설 수밖에 없는 게, 지금까지 엘디르를 비롯해 여러 신들이 메시지를 보내주곤 했지만, 카루스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르트리아 왕국에서는 주신 카루스보다 물의 여신 아르키나나 대지의 여신 가이아나의 교세가 더 강했다.
당연히 그의 신전이 얼마 없을 수밖에.
‘그 말인즉슨, 날 구경하는 신들은 농땡이들이라 그거군.’
마우의 호통에 이어, 농땡이(?) 신들이 보낸 메시지가 줄줄 이어졌다.
[예술의 신 라뮤즈 님이 팩트폭력은 비겁하다고 합니다.] [지식의 신 세이런 님이 라뮤즈가 제일 게으르다고 합니다.] [상업의 신 루폴레 님이 틈만 나면 놀려고 하는 사도에게 농땡이란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합니다.]‘어휴, 하여간 이 양반들은…….’
관공서에서 하라는 일은 안 하고 웹서핑이나 Y튜브 보는 공무원들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때 뒤에서 헨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린, 어딜 가는 거니?”
고개를 돌리니 헨슨이 마린의 손을 붙잡고 있었다.
“저쪽에 바다의 신전이 있다고 들어서. 이오라 님께 기도하고 올 거야.”
미클라티움의 바다 신전에는 먼 옛날 이오라가 도시의 번영을 축복하며 내린 성물이 있었다.
마린은 그 성물을 회수할 속셈이었지만, 시작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안 돼, 사람도 많고 길도 복잡한데 미아가 되면 어쩌려고?”
“으, 하지만…….”
“나중에 찾아가도 이오라 님이 꾸짖지 않으실 거다.”
마린의 입이 오리처럼 튀어나왔다.
나중에 갈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리베르타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게 왠지 불가능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디서 내 수법을 따라 하려고?’
‘으윽. 망할 것! 눈치챘구나!’
이대로 실패하고 마는 걸까.
그런데 그때 뜻밖의 인물에게서 도움의 손길이 뻗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