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edicine-Selling Crown Prince RAW novel - Chapter 611
611화. 외전 : 카이엔 경의 다짐
바람이 분다.
주군이 없는 세상 속 여덟 번째 해의 바람이 불어온다. 하여 눈을 뜬다. 나는 오늘 주군을 만날 수 있을까. 막연한 기대감. 부푸는 불안함. 그 모든 것을 가까스로 누르며, 나는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카이엔 경?”
귓가를 스치듯 두드리는 목소리.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
고개를 돌렸다.
곱슬거리는 연분홍빛 머리칼이 보였다. 언제 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색깔. 아마도 드래곤인 덕분이겠지, 저런 머리칼은.
“부르셨습니까.”
내 대꾸에 용왕 베르키스의 여동생, 화분룡 플로레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짓을 보내어 왔다.
“그럼 불렀지. 아까부터. 계속.”
“죄송합니다.”
“정신 팔지 말고. 이게 1년에 단 한 번만 만들 수 있는 기회라는 거, 잘 알지?”
“알고 있습니다.”
당연하다.
모를 리가 없다.
벌써 여섯 번의 실패를 겪었으니까. 매년 주군이 떠났던 날마다, 마치 그날을 추모하기라도 하듯 온 힘을 모아 유계를 향한 게이트를 열었으니까. 하지만 주군을 데려오기 위한 그 모든 시도가 거듭 좌절로 끝나야 하였으니까.
나는 그 쓰라렸던 경험들을 되새기며 말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용왕과 천사장, 지옥왕 분들께서는 여전히 세계의 복구에 온 힘을 기울이고 계시고, 이 와중에 그나마 당신만이 어그러진 마법장을 비집고서 게이트를 열 수 있는 유일한 분이라는 것도 말입니다.”
사실이다.
화분룡 플로레스.
마법적인 재능만큼은 용왕을 능가한다고도 불리는 천재.
그녀의 도움 덕분에 1년에 한 번, 이렇게 지상계를 벗어나는 게이트를 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어그러진 마법장. 덕분에 목표지인 유계로 향하는 길은 꼬이고 얽히기만 하였다.
“그렇지. 당연히 내 노력을 알아야지. 뭐, 지금까지는 결과가 별로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오늘은 괜찮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 솔직히 난 자신이 없는데.”
“저는 기적을 믿습니다.”
“기적밖에 믿을 게 없다는 상황이 암담한 거라니까.”
화분룡 플로레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마 게이트를 열어준 그녀 자신도 알고 있을 것이다. 어그러진 마법장 때문에 목적지의 좌표가 마구잡이로 뒤틀린다는 사실을. 오늘도 똑같으리란 잔인한 현실도. 하여 게이트 너머의 도착지를 아무도 예상 못 한다는 진실 또한.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당연하지. 복장 점검은?”
“잘 마쳤습니다.”
나는 대꾸하며 내가 걸친 ‘복장’을 내려다보았다. 일곱 겹의 마법 소재로 엮인 특수한 갑옷, 소위 우주복이라 불리는 물건이 내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두꺼웠다. 무거웠다. 그 옛날, 주군과 함께 걸쳤던 차폐갑옷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거추장스럽기도 했다.
“이건 입을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군요.”
나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다.
화분룡의 입가에 쓴웃음이 피어났다.
“보는 나도 그래. 하지만 어쩌겠어. 목적지의 좌표가 뒤틀려서 우주공간에 떨어지는 경우에 대비는 해야지.”
“……그렇지요.”
주군을 찾기 위해 감행했던 4차 시도가 떠올랐다. 당시엔 정말로 죽을 뻔했다. 게이트를 벗어나자마자 숨 막히는 어둠이 엄습했던가. 초월적이던 냉기. 가슴이 바깥으로 터질 것 같던 감각. 눈알이 뽑힐 듯한 통증과 두통. 몸속의 무언가가 모조리 끓어오르는 듯하던 섬뜩함까지.
막막하기만 하던 그 우주공간은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만약 그때, 이쪽의 이상을 깨달은 화분룡이 즉시 귀환마법을 써주지 않았다면, 나는 어처구니없는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그런 일을 또 겪을 수는 없으니까, 이런 사소한 불편함쯤은 참아야겠지요.”
“그렇지. 그러니까 이제, 시작할까?”
“예. 저는 준비됐습니다.”
굳은 각오로 엄지를 치켜들었다. 바닥에 그려진 마법진 중앙으로 올라갔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 나는 오늘 주군을 만날 수 있을까. 구해낼 수 있을까. 부디, 그러면 좋겠다.
……키이이이잉!
화분룡의 마력이 투입되었다.
마법진이 투명한 섬광을 쏟아냈다. 허공으로 떠올랐다. 면에서 입체로 변환되었다. 입체마법진이 사방을 에워쌌다. 전신에서 무게감이 사라졌다. 두둥실. 중력으로부터의 해방. 이윽고 열리는 게이트.
……!
소리와 빛이 사라졌다.
인식의 갈래가 허물어졌다.
살짝 멀미를 겪는 듯한 감각.
그 속에서 만화경처럼 부서지는 세상의 경계.
‘주군.’
나는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염원하였다.
이번에는 제발 유계에 도착할 수 있기를. 주군을 찾아낼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았다.
소리와 빛이 느껴질 때까지.
해방된 중력이 돌아올 때까지.
두 발이 단단한 바닥을 디딜 때까지.
……탁.
무언가가 발에 닿았다. 단단한 지면. 좋은 신호였다. 일단 막막한 우주공간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이번엔 어디에 도착한 것일까. 과연 주군께서 계실 유계일까.
조마조마한 심정을 억누르며, 나는 눈을 떴다.
그리고 상상 밖의 광경과 마주하게 되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아담하지만 포근해 보이는 실내.
원목으로 반듯하게 지어진 벽 장식.
그 정면에 놓인 제법 널찍한 책상.
젊은 여자가 이쪽을 보며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마치, 못 볼 모습을 봤다는 듯이. 혹은, 뭐 저런 게 다 있느냐는 듯이.
“……저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
내게 물어왔다.
나는 얼결에 답했다.
“주군…… 아니, 사람을 찾으러 왔습니다.”
아무렇게나 답해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확실히 거짓말은 아니다. 그런 내 대답이 그나마 상식의 테두리 안에 있다고 느껴진 것일까. 날 황당한 눈초리로 쳐다보던 여자가 조금은 안심(?)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누구를 찾으러 오신 건데요?”
“황태자…… 아니, 라키엘…… 그러니까…… 이한이라고도…….”
나는 당혹스러운 가운데에도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여기가 유계인 걸까. 모르겠다. 솔직히 아닌 것 같다. 눈앞의 여자는 그냥 평범한 사람으로 보였다. 게다가 복장이 묘하게 익숙했다. 뭐랄까. 별궁 한의원의 간호사들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면…… 유계는 아닌 거겠지.’
실망감이 몰려왔다.
한데 그때였다.
“이한이면, 저희 원장님이요?”
간호사 복장의 여자가 뜻밖의 물음을 건네어 왔다.
“저희 원장님 찾아오신 거세요?”
“……아, 네?”
“방금 사람 찾으러 왔다고, 이한이라고 그러지 않으셨어요?”
“아, 예. 맞습니다만.”
“아……. 원장님 지인이셨구나.”
“…….”
무슨 소리일까, 저 말은.
어째서 저 여자는 이제 황당하다는 표정에서 웃겨 죽겠다는 눈길을 내게 보내는 걸까.
“할로윈 되려면 아직 한 달도 넘게 남았는데…… 푸흡. 암튼 지금 원장님 진료 중이시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예.”
아무래도 뭔가 오해를 산 듯하다.
나는 그녀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았다. 아니, 앉으려다가 말았다. 너무나 육중한 우주복이 의자를 망가뜨릴까 봐서였다. 그래서 고민하던 나는 결국, 하릴없이 실내를 서성거려야 했다.
“…….”
여긴 어딜까.
아무래도 전에 주군과 함께 건너왔던 한국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럼 그냥 돌아갈까. 그게 옳을까. 아니면,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여기서라도 유계로 건너갈 방법을 물색해 보아야 할까.
아무래도 일단은 좀 더 살펴보는 게 좋겠다. 이건 1년에 한 번 오는 기회니까. 그런 기회를 쉽사리 포기할 수는 없으니까.
‘게다가.’
이곳의 원장이라는 사람의 이름이 이한이라고 했다. 그것도 뭔가 심상치가 않았다. 주군이 과거에 지녔던 것과 같은 이름을 지닌 자. 그리고 원장이라는 직책. 어쩌면 주군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어?”
한창 상념에 잠겨 있던 때였던가.
뒤쪽에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마주쳐야 하였다.
과거의 주군과.
“…….”
확실하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그러니까, 주군과 몸이 뒤바뀐 원래 황태자. 그 황태자가 들어가 있던 과거 주군의 몸. 그 몸이 딱 저렇게 생겼었다. 한데 인상은 전에 봤던 때와 제법 달랐다. 그러니까 뭐랄까. 살짝 더 순둥한 저 인상은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그리운…….
“주군?”
“…….”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과거의 몸을 지닌 주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향해 재차 물었다.
“……주군?”
거듭된 내 부름에 과거의 주군이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몹시 난처한 듯이 웃으며, 그럼에도 진중한 표정과 눈빛을 잃지 않고서 이런 말을 꺼내었다.
“저를 찾아왔다고 하셨는데…… 으음, 일단 원장실로 들어오실까요?”
“…….”
아무래도 과거의 주군은 나를 못 알아보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그럴 법도 하다. 나는 엄청난 부피의 우주복과 헬멧을 장착한 채니까.
게다가…….
‘나는 황태자와 몸이 바뀌기 전의 주군과 만난 거구나.’
아마도 뒤틀린 좌표가 원인인 듯했다. 덕분에 이곳 지구의, 한국의, 과거 시점으로 보내어진 것이 아닐까.
“…….”
한데 그 와중에 하필이면 과거의 주군이 운영하던 한의원으로 떨어지다니. 우연 치고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혹은 행운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나는 복잡한 심정으로 쿵, 쿵,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과거 주군의 원장실로 들어서며 무의식중에 실소를 흘려야 했다.
‘하.’
똑같았다.
별궁 한의원 원장실과 이곳의 책상, 책장 등의 배치가 완벽하게 똑같았다. 그 사실이 묘한 기분을 선사해 주었다.
이어지는, 나를 대하는 주군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으음, 저를 찾아왔다고 하셨는데…… 혹시 진료를 받고 싶으신 건지요?”
“…….”
“혹여, 다른 병원에 먼저 들르셨나요?”
“…….”
“아니면, 혹시 환청이나 환각이 보이곤 하시나요?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막 본인 욕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거나, 뭐 그런 것들 말입니다.”
“…….”
“아, 내키지 않으시면 바로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찬찬히 기분을 가라앉히며 심호흡을 해보세요.”
“…….”
하.
조금은 알겠다.
그러니까 지금 과거의 주군은 나를 환자로 보고 있는 거다. 그것도 대낮부터 괴상희한망측한 복장을 떡하니 입고 다니는, 정신이 조금 아픈(?) 사람으로.
“……주군은 지금이나 이때나 여전하시군요.”
사람을 보자마자 어디가 아픈지, 불편한지, 그것부터 보고서 어떻게든 맞춰주고 고쳐주려고 애를 쓰는 사람. 말은 부귀영화니 꿀이니를 매일처럼 읊어대지만, 정작 언제나 상대를 먼저 생각하고 챙기려는 그런, 사람.
“네?”
이쪽의 말에 뭔 소리냐는 듯이 멈칫하는 모습도. 이내 더 심각한 눈빛이 되는 것도. 그 와중에 표정은 진중하기 짝이 없는 것까지. 모두 어쩌면 이렇게나 한결같을까, 이 사람은.
“어, 그러니까…… 환자분 성함이?”
“알려주기 싫습니다.”
“어, 그럼…… 우주복 선생님?”
“…….”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선생님의 증상은요.”
“…….”
“그냥 감기와 똑같은 겁니다. 그 증상에 맞는 병원에 찾아간다고 해서 손가락질을 받거나, 이상한 사람 취급을 당하거나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생님을 그렇게 대하는 이들이 잘못된 거예요, 그런 건.”
“…….”
“그러니까 꼭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저는…….”
“네.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자. 괜히 역사가 뒤틀릴 수도 있으니까. 데미안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모조리 마음의 창고 속에 되돌려 차곡차곡 담아두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거추장스럽고 무겁기 짝이 없는 헬멧, 벗지 않기를 정말 잘했다고.
그 사이에 과거 주군이 메모지를 죽 찢어다가 뭔가를 샤샥 써서 내밀어 왔다.
“저기, 이거. 연락처랑 주소입니다.”
“…….”
“제가 아는 정신의학과 선생님이세요. 상담도 친절하시고, 무엇보다도 실력도 좋은 분이십니다. 한번 가셔서 이야기라도 나눠보세요.”
“…….”
얼결에 받아 버렸다.
그 와중에도 당부는 계속 이어졌다.
“꼭입니다. 제가 써드린 곳이요. 한 번만이라도 좋으니까 꼭 가보세요.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늘 진료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저기…….”
“네?”
과거의 주군이 눈을 반짝거렸다.
드디어 이쪽의 말문이 열리는구나 싶은 걸까. 혹은, 낯선 환자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엿보는 걸까, 당신은.
아마도 그렇겠지.
당신은 항상 그랬으니까.
하여 나도 언제나 당신에게서 희망을 보았으니까.
그러니까.
“……꼭.”
주군.
나의 하나뿐인 주인.
당신을 반드시, 꼭…….
“찾아가겠습니다.”
몇 년이 걸려도 좋다.
그 언젠가 먼 훗날의 일이 된다 하여도 상관없다.
나는 반드시 당신을 찾아갈 것이다. 찾아낼 것이다. 당신이 그토록 바라던 평온한 삶을 찾아줄 것이다.
진심을 담아 말했다.
덕분에 안심이 된 걸까.
과거의 주군이 활짝 웃었다.
“네. 꼭 그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