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44
044화
엘다르의 절규와 별개로 지상에선 이미 전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사디안이 외쳤다.
“동요하지 마라! 어차피 적들의 숫자는 우리보다 적다!”
인간 병사는 70명, 리자드맨은 80명. 합쳐도 겨우 150명이다.
반면 엘프 전사들은 300명.
‘물론 먼 길을 걸어와 쉬지 못했다. 한쪽은 절벽, 한쪽은 낭떠러지. 수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협로기도 하다. 하지만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 우리는 숫자가 충분히 많으니 상대의 협공도 큰 의미가 없다.’
하사디안이 다른 세 백부장들에게 말했다.
“전방 부대는 그대로 채비를 마치고, 후방 부대는 뒤돌아서 리자드맨들의 공격을 대비해라.”
“대족장님께선 어느 부대를 맡으시겠습니까?”
“전방을 맡겠다.”
그 말에 다른 세 백부장도 동의했다.
어차피 이제 와서 후퇴하기는 늦었다.
상대도 단단히 준비한 것을 보면 이번 전투를 끝내면 적들의 주력을 쳐부술 수 있다는 말.
‘리자드맨 부족은 강성한 것처럼 보이니 우선 인간 부족을 공격한다. 그다음 인간 부족을 패퇴시키면 이 협로를 벗어날 수 있다. 넓은 장소에서 리자드맨들을 수적인 우위로 압박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모든 전투가 하사디안의 뜻대로 풀린다고 해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니었다.
전투 후 남은 병력으로 자동성을 공격하긴 힘들 테고, 퇴각한 인간 병사들은 자동성으로 들어갔다가 엘프 전사들이 휴식을 취할 때 급습해 올 가능성이 높았다. 주변 지형을 잘 아는 건 엘프들이 아닌 인간들이었다.
물론 전투가 하사디안의 뜻대로 풀릴 수도 없었다.
엘프 활잡이들이 적들이 80보 안으로 들어오길 바라며 화살을 쟁여 놓았을 때, 머리 위에서 공격이 쏟아졌다.
“대족장님! 협곡 위에 인간 병사들이 나타났습니다! 화살입니다!”
“맞대응해라!”
머리 위에서 화살이 쏟아지자, 화살을 피하느라 대열을 이탈하는 이들, 화살을 막기 위해 몸을 숙인 이들, 몸에 화살이 꽂혀 몸부림치는 말과, 말을 달래지 못하고 낙마하는 이들, 겨우 정신을 차려 대응 사격에 나서는 이들이 혼재했다.
이런 혼란 때문에 천천히 접근하던 리자드맨 적 기병들이 돌진해 오고 있다는 걸 거의 대부분의 엘프 전사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돌아보며 하사디안이 외쳤다.
“리자드맨들이 돌격해 온다! 창잡이들은 대열을 흩트리지 마라!”
하사디안의 호통에 전열에 서 있던 창잡이들이 겨우 정신을 차리고 창을 들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전술적으로 좋은 행동이라고 보기 힘들었다.
리자드맨 중 선두에 선 것은 라크락이었다.
자신의 코카트리스 아낙세에 올라탄 라크락은 왼쪽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의미를 알지 못하는 엘프 창잡이 몇 명이 라크락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힐끔거렸다.
라크락이 하늘에서 엘프 창잡이들에게로, 검지 손가락을 그어 내렸다.
대기를 꿰뚫고 한 줄기 백색 실선이 그려지는가 싶었다.
섬광.
떨림.
빛.
-콰────ㅇ!
번개였다.
빛에 닿은 이들 모두가 선 채로 익어 코와 입, 귀, 터져 버린 안구에서 수증기를 뿜어냈고, 빛에 가까스로 닿지 않은 이들은 충격파만으로 쓰러지고 눈과 귀가 멀었다.
라크락과 함께 코카투에 올라탄 리자드맨 전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진 엘프 전사들을 짓밟으며 그대로 엘프의 칼잡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늦게 뒤를 돌아본 하사디안이 외쳤다.
“등을 보이지 마! 이 겁쟁이들아!”
하지만 하사디안의 말은 자기 자신에게도 너무 작고 멀게 느껴졌다. 천둥 때문에 귀가 먹먹한 탓이었다.
첫 번째 돌진으로 코카투 전사들의 창날이 엘프 칼잡이들을 꼬챙이처럼 둘, 셋으로 꿰었다.
코카투 전사들은 미련 없이 창을 버리고 칼을 뽑았다.
코카투 전사들이 적들을 베어 넘기면, 코카투들은 살아남은 적을 짓밟고 두개골을 쪼아 박살 냈다.
엘프 창잡이들이 뒤늦게 후열에서 대열을 가다듬었을 때, 코카투 전사들은 별다른 지시를 받지도 않았으면서 퇴각을 준비했다.
하사디안은 잠깐 동안 안도했다.
‘이걸로 한숨을 돌릴 수 있겠…’
그렇지 않았다. 퇴각하는 코카투 전사들과 교대하는 것은 리자드맨 칼잡이들이었다.
코카투에 올라타기 위해 몸을 가볍게 해야 하는 코카투 전사들과 달리, 리자드맨 칼잡이들은 몸을 보호하기 위해 기름을 먹이고 단단하게 굳힌 가죽 갑옷을 두르고 있었고, 고대 갑충으로 만든 방패도 들고 있었다.
창날은 칼잡이들을 상처 입히지 못했고, 창잡이들은 부무장인 단도를 꺼내기도 전에 복부와 가슴에, 목에 칼날을 허용했다.
이미 라크락의 번개에 전의를 상실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절벽과 낭떠러지, 그리고 유일한 길은 적들에게 막혀 있었기에 후퇴할 길이 없었다. 맞서 싸운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라크락은 전황을 돌아보았다.
‘다 끝났군.’
아직 적들은 220명 정도 남아 있었지만, 검은 비늘 부족 리자드맨과 맞서는 이들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나머지는 등을 보이며 자기들끼리 밀치고 밟아 대고 있었고, 지휘관으로 보이는 이들이 아군의 목을 쳐 가며 독려했지만 상황이 나아지진 않았다.
리자드맨 맞은편에 있는 자동성의 인간들은 역시나 벽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마지못해 달려드는 엘프 전사들을 죽이고 있었다.
이제 엘프 전사들의 마지막 희망은 낭떠러지를 내려가는 것밖에 없어서, 그나마 약삭빠른 이들이 낭떠러지를 기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들은 낭떠러지 아래에서 대기 중인 인간 병사들이 있는 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엘프들은 자신들의 신을 향해 엎드려 빌고 있었다.
라크락은 상황을 빨리 끝내는 게 엘프한테도 다행일 거라고 판단했다.
“재돌격하겠다.”
라크락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라크락의 머리 위에 저공비행하던 파지직이 라크락의 말을 옮겼다.
-재돌격하겠다.
그 말을 들어야 할 전사들이 정비를 마치고 재돌격할 준비를 마쳤다.
“돌격.”
-돌격.
─┼
성운은 엘다르가 당황한 틈을 타서, 자신이 전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엘다르의 전투 개입도 무마시켰다.
성운은 엘다르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었다.
‘내가 신성 레벨이 높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똑같이 전투에 개입하면 어차피 질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렇다면 오히려 신들이 개입하지 않은 전투에서라면 엘프에게 승산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테고. 틀린 생각은 아니야. 하지만 나로서는 엘다르가 강신을 해서 리자드맨 전사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을 막는 게 더 나으니까. 전투야 어찌되었든 이길 테고.’
결과적으로 엘다르는 자신의 엘프 전사들이 몰살당하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엘다르가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
“져, 졌다…”
성운이 말했다.
“이 시점에서 전사 300명이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랄 것까진 없고, 적지 않은 숫자의 엘프 전사들을 잃었으니 너의 엘프 부족의 방호 태세에 문제가 있을 거라는 걸 알려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엘다르는 한숨을 쉬었다.
“원하는 게 뭐지?”
이대로 ‘원하는 건 바로 너의 목숨이다’라고 외치며 라크락을 부추겨 황야를 내달리게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엘다르의 ‘녹안’이라고 불리는 엘프 부족은 멀리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북해안에 대한 정보가 없지.’
엘다르의 엘프 부족을 정복하는 문제는 엘다르에게 주변 정황을 듣고 나서라도 상관없었다.
역사적으로도 인정된 사실이지만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 공격하는 게 더 성공률이 좋기도 했다.
성운이 원하는 것을 말했다.
“정보, 기술, 자원.”
“전부 다 달라는 거잖아?”
“엄밀히 말하면, ‘전부 다’는 아니지.”
성운은 엘다르를 가리켰다.
엘다르는 정말로 자신이 찔리기라도 한 듯 움찔거렸다.
“…윽.”
엘다르는 고민하는 것 같았다.
플레이어끼리의 전투에서 압도적인 승리, 사실상의 승리 상황이라면 패배를 앞둔 플레이어가 다소 비굴하지만 몇 가지 조건 하에 플레이를 이어나가기도 했다.
이 중 기술과 자원은 간단했다.
기술은 엘다르의 녹안 엘프 부족이 찾아내고 개발한 기술을 모두 달라는 것이며, 자원은 엘다르가 먼저 요구했던 ‘공물’과 같은 개념이었다.
정보는 조금 더 특별했다.
게임 로스트 월드에서 ‘정보’는, 플레이어가 확인한 온갖 개체와 지역, 지도와 개체 능력을 의미하는데, 이런 정보는 플레이어의 ‘정보탭’에 자동 저장되어 있었다.
정보를 준다는 건 그런 정보탭에 저장된, 매 순간 업데이트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공유한다는 의미였다. 이런 정보에는 주변 종족과 부족들의 위치나 지금까지 알아낸 숫자나 발전 양상이 드러나기도 했고 좀 더 개인적으로는 플레이어가 혼자 발견한 고대 유적의 위치나, 플레이어가 유심히 지켜보는 개체에 대한 능력치 값까지 모조리 기록되었다.
기술과 자원은 지금까지 얻은 것을 넘겨주는 것이지만, 정보는 앞으로 얻을 것을 넘기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성운은 엘다르가 이 조건을 받아들일 확률이 반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목숨이 걸려 있다지만, 도망가면 그만이니까. 그걸 다 넘겨줘서 적을 이롭게 하느니 도망가는 게 방법일 수도 있지.’
하지만 성운의 생각과 달리 엘다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되었을지도 몰라.’
하사디안과 300명의 전사를 잃은 것은 뼈아픈 패배였다.
하지만 하사디안과 이 전사들을 가지고 있었더라도 얼마나 오래 그 북해안에서 생존해 있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네뷸라, 이 사람은 이렇게 초반인데 두 종족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까, 줄을 타야 한다면 이쪽이 더 나을지도 모르지. 말도 안 되게 강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니까.’
엘다르는 갑자기 헛기침을 하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저 엘프의 신 엘다르는 인간과 리자드맨의 신 네뷸라 님의 자비에 감복했습니다.”
“뭐야.”
“따라서 말씀하신대로 정보와 기술과 자원은 물론 이후에도 필요하신 것들을 제공하겠습니다.”
“뭔데.”
“부디 과거 저의 오만함을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뭐냐고.”
엘다르가 성운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성운은 또 이 자식이 무슨 꿍꿍이지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이어 말하는 엘다르의 이야기를 듣고 성운은 엘다르의 롤플레이 말고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
“자동성의 성주, 휘경입니다.”
“인사하기 전에, 이 동작이 뭔지 물어봐도 되겠나?”
“저희는 악수… 라고 부르는데요. 손을 맞잡고 흔들고 그 다음 서로 껴안습니다. 친밀감의 표현으로요.”
라크락은 정말로 그런지 사이란을 돌아보았고, 사이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에서 오는 상인들이 곧잘 하는 인사였고 이제 자동성에도 유행하고 있었다. 휘경은 유행을 좋아한다. 유행은 곧 변화였기 때문이다.
라크락은 손을 뻗다가, 한 번 더 멈칫했다.
“내 손과 몸에 피가 묻었는데.”
현재 라크락은 엘프들의 피로 칠갑을 한 상태였다. 가장 선두에서 최후까지 싸운 증거였다.
휘경이 어깨를 으쓱한 다음 라크락의 손을 맞잡고 흔들고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끈적한 피가 손은 물론 휘경의 옷과 뺨에 묻어났다.
“개의치 않습니다, 대족장님. 저희를 위해 싸우다 묻은 피지요. 저희가 함께 몸에 묻히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겠어요? 이렇게라도 묻힐 수 있으니 영광일 뿐입니다.”
라크락은 눈앞의 뿔이 난 인간 여자의 말에 크게 혹하진 않았다.
그래도, 말을 잘한다는 건 인정할 만했다. 동맹의 우두머리가 말을 잘한다는 게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라크락은 가볍게 웃은 다음 주변을 둘러보았다.
엘프들을 물리친 이후 라크락과 전사들은, 자동성의 병사들을 따라 휴식을 취하기 위해 자동성으로 들어와 있었다.
라크락으로서는 얼마 전까지 정찰병들이 전해오는 말로만 듣던 자동성에 들어온 감회는 신기한 데가 있었다.
라크락이 말했다.
“흠, 그쪽 말마따나 그저 거래일 뿐인데, 영광이고 말고가 중요한가?”
“중요하죠. 사기를 치면 미래의 거래 상대를 잃을 테지만, 덤을 주면 과거의 거래 상대도 다시 찾아오겠죠.”
라크락은 휘경을 도마뱀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영광조차도 이 인간에겐 거래의 덤인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앞으로도 우리와 자주 거래를 하고 싶단 말인가?”
“그럼요.”
라크락은 팔꿈치로 옆에 서 있던 사이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대가 바쁘겠군.”
“예?”
“놀란 척은.”
라크락은 사이란이 답하기 전에 휘경에게 말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이 친구가 자동성에 상주하게 될 것인데 부족하지 않게 대하면 좋겠군.”
“그렇게 될 겁니다.”
라크락은 사이란과 휘경이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았다.
휘경이 보기 드문 인물이라서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렸지만, 라크락이 보기에 앞으로 해보다는 득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물론 이번 문제를 해결부터 해 줘야겠지만.’
휘경이 연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낼 때 라크락은 가로저었다.
“우선 우리의 거래부터 이야기하지. …가져와라.”
거래에는 몇 가지 기술 교류나 대규모 자원 교환에 대한 것이 포함 되어 있었지만, 라크락이 우선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다음의 것이었다.
리자드맨 전사 둘이 끙끙대며 수레를 밀고 왔다.
수레에는 커다란 직물 주머니가 실려 있었는데, 라크락이 주머니를 까서 열자 수레 가득 철편이 실려 있었다.
휘경은 철편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그 물건이군요.”
“그래. 철인 건 분명하다. 우리가 쓰는 철보다 훨씬 단단하기도 하고.”
검은 비늘 부족이 고대 유적에서 발견한 이 철편들은 그 강도에도 불구하고 제련이 극히 힘든 것이 단점이었다.
녹는점이 높고 리자드맨의 능숙한 대장장이가 쉽게 모양을 잡기 힘들었다. 라크락은 좋은 무기의 재료들이 제대로 쓰이지 못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휘경은 이 이야기를 자동성의 대장장이가 말해 주었고 대장장이가 워낙 자신 있게 대답했기에 라크락에게 철편을 가져오면 제련해 보이겠다고 말했다.
휘경이 보았을 때 유목을 하는 리자드맨 부족보다는, 오랜 시간 광석을 만져 온 인간 대장장이 솜씨가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휘경은 라크락을 내궁으로 초대한 다음, 직접 철편을 작은 주머니에 옮겨 담아 대장장이에게 들고 갔다.
대장장이는 휘경에게 기다리라고 한 다음, 잠시 자신의 대장간에서 뚱땅거리며 씨름을 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나온 대장장이가 말했다.
“안 될 것 같은데요, 성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