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46
147화
* * *
엘모가 직접 그녀에게 걸어 준 주술석은 꽤 유용했다.
몸에 주술을 새기고 있지 않으니 진짜 아스테르반 출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꿰뚫었을 텐데, 겨울들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만큼 엘모가 겨울들에게 발휘하는 영향력이 지대한 것이리라.
리즈벨은 어둑한 골목 한중간에 있는 겨울의 지하 아지트로 안내되었다.
“잠입 예정일은 나흘 뒤의 오전, 바리엔의 성문이 열릴 때입니다.”
리즈벨의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겨울’은 봄 제의를 노린 쿠데타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날 정오에 제의가 거행되고, 그 제의에서 성녀 탈환 작전이 시작될 겁니다.”
성기사들을 진두지휘하는 성녀의 초상화가 테이블 위에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녀의 생각보다 어렸다. 이제 열네댓 살은 되었을까.
검은 단발에 마른 몸. 넉 달 전 1,500명의 목을 베었다는 극악한 성녀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외양이었다. 몸보다 훨씬 큰 성의를 입은 소녀의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리즈벨은 소녀의 눈이 있을 곳을 들여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잠입 방식은?”
“미끼.”
그녀를 겨울의 아지트로 인도한 사내가 성녀의 초상화 위에 바리엔 성전의 지도를 펼쳤다.
“무리를 둘로 나누어 한쪽은 미끼가 되고, 한쪽은 신관으로 위장할 겁니다. 일단 1차 검문을 통과하는 게 급선무라, 미끼가 할 일은 신관으로 위장한 무리가 성문을 통과하는 단 1분의 시간을 버는 것이죠.”
전에도 생각했지만, 겨울들의 방식은 과격한 면이 있다. 리즈벨은 날카롭게 맹점을 찔렀다.
“바리엔에는 헬라르의 축복을 받은 신관들만이 들어갈 수 있어. 아무리 미끼들이 시간을 벌어 줘서 잠입에 성공한다 한들, 정체가 금방 들통 날 텐데.”
“그러니 시간 싸움이지요.”
탁. 남자가 탁자 위에 무언가를 올려놓았다. 길쭉한 호리병이었다. 리즈벨은 무심코 그 병의 뚜껑을 열었다가 안쪽에서 풍기는 성력의 향에 금방 내용물의 정체를 알았다. 성수였다.
“눈속임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성수를 몸에 들이부으면 한두 시간 정도는 정체를 숨길 수 있습니다. 갖고 계십시오.”
한두 시간. 그녀에게 바리엔에서 허용된 시간은 딱 그 정도였다. 리즈벨은 호리병을 로브 안쪽에 매달며 재차 확인했다.
“나흘 뒤 동이 틀 때 이곳으로 오면 된다는 말이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짧은 담화는 끝났다.
리즈벨이 다시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는 석양이 지고 있었다. 곳곳에서 헬라르의 성력이 찌릿하게 살갗을 자극했다. 이상하게 더웠다. 아직 더위를 느낄 만한 날씨가 아닌데. 리즈벨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큰길로 걸음을 옮겼다.
푸른 눈이 길 양옆을 날카롭게 훑었다. 하나, 둘, 셋. 당장 가까이에 있는 건 셋인가. 그리고 뒤에 따라붙는 익숙한 기척이 하나 더…….
“어?”
익숙한? 즈벨이 홱 뒤를 돌아본 순간이었다. 그녀의 뒤를 바짝 쫓고 있던 이가 스치듯이 그녀의 곁을 지나쳤다. 잘못, 느꼈나? 순간 혼란스러웠으나 그녀의 감은 적중했다.
작지만 분명한 속삭임이 귀를 스쳤다.
“모른 척해요. 일행 없는 척.”
“너……!”
리즈벨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검은 머리카락. 잿빛 눈.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이였다. 리즈벨은 다급히 소년의 뒤를 쫓았다.
“뭐야, 아시어스? 왜 여기 있어?”
목소리가 크게 튀자 주위의 이목이 그녀에게 쏠렸다.
“쉿. 따라붙는 것들이 많아요.”
리즈벨은 입술을 꾹 깨물고 마지못해 아이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희미하게 반짝이는 푸른 마력이 그녀의 발목을 타고 올라와 몸을 얕게 휘감았다. 리즈벨이 당황하는 바람에 순간 일렁거렸던 성력이 깔끔하게 갈무리되었다.
인파를 지나 한적한 골목길로 들어선 다음에야 소년은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그녀의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웃었다.
“으음, 리즈벨. 화났다.”
“뭐…… 너…….”
리즈벨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막 뭐라 더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손목 안쪽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화끈거렸다.
“어?”
리즈벨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확인했다가 숨을 들이켰다. 왼쪽 손목 안쪽에 시뻘건 낙인이 찍혀 있었다.
“어, 언제…….”
소년이 재빠르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듯 쥐었다.
“헬라르의 각인…….”
이단자들이나 악마 소환술사들로 의심받는 이들에게 성기사들이 찍어 놓는 낙인이었다. 위치를 추적하는 표식이다.
이게 대체 언제?
“아…….”
리즈벨의 뇌리에 성벽 앞에서 받았던 검문이 스쳐 지나갔다. 아, 그래. 그녀를 검문한 병사. 분명 이쪽 손목을 억세게 잡았었다……. 평범한 병사인 줄 알았는데, 성기사였던가! 이미 의심을 샀던 것이다.
“아시어스, 너 일단 돌아가 보는 게 좋겠어. 이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리즈벨은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한 이마를 짚었다. 시야가 부옇게 흐려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섣불리 판단하는 게 아니었다. 불심 검문뿐만이 아니라, 바리엔 주위의 모든 소도시에 성기사들이 포진한 것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누군가가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라제?
그 부름은 밖으로 내뱉어지지 못했다. 리즈벨의 몸이 휘청 기울었다. 맥없이 허물어지는 그녀를 단단한 팔이 가까스로 붙들었다. 리즈벨에게 너무도 익숙한 기운이 또다시 그녀를 감쌌다.
리즈벨은 몽롱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그녀를 끌어안은 넓은 품을 느낄 수 있었다. 소년이라고는 결코 볼 수 없는 단단한 몸이…….
“저쪽입니다. 분명 등록되지 않은 성력을 지닌 여자입니다!”
수십 명의 병사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소리에 지축이 크게 진동했다. 그늘에 새카맣게 잠긴 잿빛 눈에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푸른 마법진이 완성되는 데는 눈 깜빡할 정도의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두 개의 인영과 한 마리 짐승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분명 여기……!”
간발의 차로 성기사들의 군단이 좁은 골목길로 들이닥쳤다. 빈 골목을 확인한 기사가 이를 빠드득 갈았다.
“찾아라. 낙인이 찍힌 여자.”
그들의 눈은 전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음산한 명령이 떨어졌다.
“여신께서 신탁을 내리셨다.”
자신의 세계에 불순물이 침입한 것을 눈치챈 여신의 신탁이 내려왔다.
* * *
밤하늘에 쏟아질 듯한 은하수가 펼쳐져 있었다. 반짝이는 별빛과 이지러지기 시작한 달이 걸린 검은 하늘 아래, 남자는 우두커니 자리했다.
마법으로 불러낸 작은 불씨가 장작을 살라 먹으며 크기를 키웠다. 아시어스는 한참이나 뜨거운 불길을 응시했다. 모닥불이 일렁일 때마다 그의 내면에도 파문이 일었다. 그의 곁에는 모포에 둘러싸인 여자가 죽은 듯 누워 있었다.
“리즈벨.”
아시어스는 라제가 알려 준 그 이름을 입 밖으로 내 보았다.
“리즈벨…….”
기억에 없는 이름이다. 그는 저 여자의 얼굴도 이름도 몰랐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사실 아시어스는 자기 자신이 대체 무엇인지도 알 수 없었다.
잿빛 눈이 제 몸을 느리게 훑었다. 갈색으로 말라붙은 핏자국이 낭자한 흰 셔츠가 보였다. 이 일이 몇 번째더라. 세 번…… 아니, 네 번째였나. 그의 발치에 몸을 낮추고 있던 라제가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없어?]“……응.”
그는 여전히 파편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도, 어떤 사명에 매달려 살았는지도, 무슨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모르는 파편. 아시어스가 파편으로 다시 지상을 디뎠을 때, 라제는 그의 기억을 되살리려 갖은 애를 썼다.
그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그의 마력이 어떤 힘을 가졌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저 여자의 이름이 무엇인지. 모두 라제가 알려 주었다.
건조한 바람이 불었다. 여자가 한기를 느끼는지 몸을 살짝 움츠리는 게 보였다. 아시어스는 무심코 손으로 땅을 긁었다. 푸른 마력이 땅으로 스며들자 손끝으로 실을 엮듯 마력을 옭아 섬세한 진을 그렸다. 찬 밤바람이 뚝 멎었다.
[……그래도 사흘 전보다는 괜찮아 보이네.]라제는 한숨을 삼켰다. 마력을 제대로 다룰 줄도 몰라 하마터면 뤼켄 부부에게 들킬 뻔했던 게 바로 그저께였는데. 이제는 본래의 힘과 엇비슷하게나마 마법진을 그리는 데까지 왔다.
기억이 온전치 않아도 천재는 천재였다. 태어난 직후부터 본능적으로 마력을 엮었던 희대의 재능은 여전했다.
아시어스는 한참이나 주위를 휘도는 색색의 마력을 관찰했다. 작은 기억의 조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느리게나마 모여들었다. 그러다 한순간 명확한 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사실을 도출해 내기도 했다.
지금 아시어스를 움직이는 것은 사흘 전 밤의 조각과는 다른 조각이었다.
리즈벨을 보는 그의 눈이 어둑하게 잠겼다. 하얀 목덜미. 부드러운 여체. 귀 뒤쪽에서 풍겨 오던 아찔한 향기.
혹 자신이, 저 여자를 안았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