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6
16화
로제스는 대답하지 않고 처음 그대로 그녀를 노려보기만 했다. 세차게 들끓었던 감정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갈무리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푸른 눈이 점차 그녀가 아는 로제스 발디마르의 눈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아이작을 죽이던 바로 그 눈이다. 그렇다면 지금 이 침묵은 무언의 긍정이리라.
‘그럼 그렇지.’
리즈벨은 습관처럼 웃었다. 그러나 분명한 조소였다.
“나를 죽이지 않을 거라면.”
“…….”
“내가 죽일 거야.”
한 번도 손에 피를 묻혀 본 적은 없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선 못 할 게 뭐야. 그 생각이 그녀의 이성을 지배했다. 리즈벨은 그녀의 마법사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다.
“마…….”
아시어스가 어디에 있는지 가늠하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 이질적인 광경이 잡혔다.
‘뭐야……?’
리즈벨이 눈을 부릅뜨고 제 목 부근을 내려다보는 순간, 조금 전에 불었던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센 강풍이 불어닥쳤다.
휘익-!
그녀에게 단검을 겨누느라 살짝 숙인 로제스의 어깨너머에서 잿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단단한 손이 로제스의 목덜미를 가볍게 채었다. 로제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홱 뒤를 돌아보는 순간, 아시어스의 손끝에서 붉은 마법진의 빛이 확 튀었다.
“큭……!”
로제스가 짧은 신음을 낸 직후, 리즈벨의 목을 겨누고 있던 단검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시어스가 인간의 것이라기엔 도무지 믿기지 않는 힘으로 로제스를 휙 기둥 너머 벽으로 집어 던졌다.
콰앙.
엄청난 굉음이 터졌다. 대체 얼마나 세게 내던진 것인지, 단단한 벽에 쩍 금이 가며 뿌연 먼지와 파편이 튀어 올랐다.
하지만 로제스 역시 계승 전쟁에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왕자 중의 하나라, 그다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매캐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푸른 눈이 빛나는 것을 리즈벨은 분명히 보았다.
“…….”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다.
리즈벨은 무엇도 명확히 판단하지 못한 채로 천천히 허리를 숙여 바닥에 나뒹굴고 있던 단도를 집어 들었다.
‘방금 내가 뭘 본 거지.’
정신이 혼몽했다. 그 순간 리즈벨을 움직인 것은 본능이었다. 발디마르의 이번 대 왕족들 모두의 피에 흐르고 있는 본능. 살기 위해서는 형제를 죽여야 한다는, 세뇌의 결과에 가까운 본능.
아버지의 목소리.
“네 두 오라비를 죽이고, 살아남은 유일한 내 자식이 되어라.”
‘살아남아야 하는 것은 하나.’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자 금빛 기운이 휘릭 솟구쳤다. 로제스의 양팔이 금빛 빛줄기에 채여 뒤로 당겨졌다. 그대로 그의 두 손목이 결박당했다.
리즈벨은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반파된 벽의 잔해 사이에 처박히다시피 한 로제스에게로 다가갔다. 손에 쥔 은빛 단도의 날이 섬뜩하게 빛났다.
‘생각은 사치.’
거리가 한 발자국씩 가까워졌다. 열 명의 형제 중 그나마 가장 그녀와 비슷한 색채를 지닌 둘째 오라비가 아무런 감정도 실리지 않은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리즈벨의 본능이 외쳤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
아무 생각도 하지 마, 리즈벨.
그녀는 스스로에게 되뇌며 단도를 든 손을 들었다. 날카로운 검이 바로 로제스의 왼쪽 가슴을 겨누었다. 금빛 기운이 그녀의 손목을 타고 올라가 단도의 날에 휘감겼다. 로제스는 여전히 미동도 없이 그녀를 올려다 보기만 했다.
리즈벨은 자신과 꼭 같은 그 푸른 눈을 더는 마주하지 않았다. 시선이 미끄러짐과 동시에 리즈벨의 팔이 뒤로 꺾어졌다가 거침없이 앞으로 뻗어 나갔다.
“……!”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푸른 마법진이 내려앉지만 않았더라면, 아마 단도는 그대로 로제스의 심장을 꿰뚫었을 것이다. 그만큼 망설임 없는 동작이었다.
“무슨 짓…….”
리즈벨이 입술을 깨물며 막 돌아선 순간, 마법사가 그녀를 제 품으로 끌어들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두 남녀의 모습은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가늘게 옭아 들어가는 그물 같은 마법진만을 자리에 남기고.
“…….”
리즈벨이 로제스의 심장에 꽂지 못하고 떨어뜨린 단도는 그의 옷깃을 아주 살짝 베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팅-.
단도의 날이 바닥에 부딪히며 튕겨 올라갔다.
로제스는 가만히 바닥을 구르는 제 단도를 내려다보았다. 손과 상체를 단단히 결박했던 금빛 기운이 스르륵 풀어지며 뒤로 묶여 있던 로제스의 손이 자유를 되찾았다.
“…….”
로제스는 한참이나 몸을 일으키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러다 퍼뜩 생각했다.
‘지칼을 하루라도 빨리 죽여야겠다.’
그래야…….
* * *
아시어스가 리즈벨을 데리고 이동한 곳은 왕성의 지하였다.
리즈벨은 그들이 도착한 장소를 단박에 알아보았다. 왕성의 지하 감옥으로 통하는 굴의 한중간이었다.
“여기는 어떻게 알고?”
“모릅니다. 되는대로 좌표를 찍은 것뿐이라서.”
“그렇구나.”
리즈벨의 목소리는 방금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했다.
아시어스는 품에 안긴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막 왕성에 발을 들였을 때만 해도 덜덜 떨고 있던 몸은 이제는 평온하게 진정되어 있었다.
리즈벨은 잠시 가만히 아시어스에게 안겨 있다가 이내 그를 밀어냈다. 그대로 걸음을 몇 발자국 옮겼다가, 지하 굴의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아시어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왕녀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침묵은 잠시였다. 아주 여상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혔다.
“도와주겠다고 안 했니?”
아시어스는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무슨 상황인지 그로서는 단박에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나를 막으면 어떡해.”
리즈벨은 흙벽을 바라보며 천천히 내뱉었다.
“어떻게 먹은 마음인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는데.”
결국 그의 걸음이 떨어졌다. 아시어스는 리즈벨에게 다가서며 조용히 물었다.
“봤죠?”
목적어가 빠진 물음이었다. 그러나 무엇을 의미하는지 리즈벨은 모르지 않았다.
로제스가 리즈벨에게 겨눈 단도.
가는 손이 천천히 들려 올라갔다. 리즈벨은 제 목을 문질러 보았다. 시퍼렇게 날이 선 단도가 그렇게 바짝 들이밀어졌는데도 그녀의 목에는 작은 상처 자국 하나 없었다.
당연했다. 리즈벨의 목에 겨누어진 건 단도의 날이 아니라 무딘 칼등이었으니까.
아시어스가 조용히 물었다.
“그자, 발디마르의 왕자입니까?”
“……응, 내 둘째 오라비.”
어지러운 머릿속과는 다르게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여전히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몸에 밴 습관에 가까웠다.
“왕성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어수선하고, 온통 피비린내투성이에…….”
아시어스는 리즈벨의 바로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낮추었다. 어깨를 잡고 억지로 당기자 왕녀가 고개를 돌렸다. 푸른 눈이 초점 없이 새카맣게 침잠해 있었다. 아시어스가 험악하게 일갈했다.
“말해 봐요. 지금까지 발디마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오라비라는 왕자가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기라곤 전혀 없는 칼등으로 누이의 목을 겨눈다. 그리고 누이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오라비를 해치려 한다. 혈육의 심장을 향해 내리꽂히던 단도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이것은 정상적인 왕가의 모습이 아니다. 아시어스가 열람한 발디마르의 어느 정보에도 이런 기이한 내전에 관한 내용은 없었다.
리즈벨은 딱딱하게 굳은 아시어스의 얼굴을 흘끗 보곤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말하면 나를 도울 거야?”
가늘고 섬세한 손가락이 아시어스의 턱에 들러붙듯이 닿았다. 그의 턱을 치켜든 그녀가 나긋하게 속삭였다.
“말하면, 너는 이 지긋지긋한 왕성을 전부 무너뜨려 줄 거니?”
“…….”
“아버지를 죽여 줄 거야?”
흰 손가락이 아시어스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굳어 있던 아시어스의 입매가 비뚤게 추켜 올라갔다.
“그걸 원합니까?”
“…….”
“당신이 원한다면야 내가 무엇을 못 해 줄까.”
이 왕국 정도는 뿌리째 뽑아다 줄 수도 있다. 어려울 것도 없이 그녀의 말 한마디면 충분했다.
리즈벨의 얼굴에 평온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다음 순간 거짓말처럼 그녀의 눈과 입술에서 웃음기가 날아갔다. 싸늘한 일갈이 날아들었다.
“마법사. 나는 너를 못 믿어.”
라타에의 마탑주. 그녀의 능력을 빼앗으려던 남자. 다정하지만 위험한 사람. 그녀를 원하는 남자. 아마도 전부를. 입술, 몸, 마음. 그리고 자유까지도.
이 남자에게 간다 한들 그녀의 인생이 평탄해지리라곤 생각지 않는다. 아무리 달콤해도 새장은 새장. 갇히는 것은 같다. 리즈벨이 원하는 것은 또 다른 감옥이 아니었다. 리즈벨은 살고 싶었다.
아무도 그녀를 강제하지 못하는 삶. 원하는 모든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삶. 그녀 자신의 삶. 그러니 더한 걸 바랄 생각은 없었다. 리즈벨의 낯에 차츰 분기가 어렸다.
“말했지. 난 네 것이 아니라고.”
“…….”
“나는 내 거야. 너와 나는 ‘거래’를 했고.”
아시어스의 턱을 들어 올린 리즈벨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냉소적인 음성에 작게 이를 가는 소리가 섞였다.
“그러니까 너는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
“네 손에 직접 피를 묻히라고는 안 한단다. 네게 그것까지 바랐다가 나중에 네가 내게 뭘 바랄 줄 알고. 그건 안 되지. 너는 그냥.”
“왕녀.”
“나를 지키기만 하면 돼.”
“…….”
“죽이는 건 내가 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