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ncess pretends to be crazy RAW novel - Chapter 15
15화
“독화살입니다. 어디 한 군데라도 스쳤다간 수 초 내로 즉사할.”
“너…… 이 새끼.”
“여기서 둘 다 죽으면 가여운 마지막 누이가 왕위를 잇겠군요. 그걸 바라진 않는다 하셨습니다.”
이곳은 로제스가 들어오기 전부터 지칼의 사병들이 로제스의 기사들을 베어 넘겼던 홀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 천장에 궁수들을 숨겨 놨던가. 죽어가는 동료들을 돕지도 않고서, 마치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는 양. 정말 뱀 같은 건 로제스 발디마르일지도 몰랐다.
지칼은 침음성을 삼키며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검으로 로제스를 겨눈 채 몇 발자국 거리를 벌렸을 때.
“1왕자님!”
홀의 입구에서 가렛트 공작가의 사병들이 그를 발견하고 외쳤다. 그와 동시에 지칼이 옆으로 몸을 날렸다. 로제스의 검이 빠르게 따라붙었다.
휙.
두 형제의 위치가 뒤바뀌었다.
로제스는 뒤로 몸을 날려 지칼이 번개처럼 뽑아 던진 단검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방금까지 지칼이 있던 자리에 수십 개의 화살이 쏟아졌다.
간발의 차로 홀 밖으로 빠져나온 지칼 앞을 공작가의 사병들이 막아섰다.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지칼은 검 끝에 묻은 로제스의 피를 거세게 문질러 닦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재수 없는 새끼…….”
어두운 홀 안에 보이는 로제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 * *
“왕자님.”
지칼이 물러나고 홀 안에 혼자 남은 로제스 앞에 궁수 십수 명이 무릎을 꿇었다. 이제껏 천장 사이에 그림자처럼 은신하고 있던 병력이었다.
“드릴 말씀이…….”
로제스는 무신경하게 목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아 내다 흘끗 시선을 내렸다.
“뭐지?”
“그것이…….”
선두에 부복하고 있던 이가 몸을 일으켜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다. 이제껏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기만 했던 로제스의 표정에 순식간에 균열이 갔다. 방금과 동일한 사람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확연한 표정 변화였다.
“이…… 미친 것.”
로제스는 욕설을 씹어뱉으며 휙 궁수들을 지나쳤다.
그가 방금 들은 소식은, 며칠간 온데간데없이 자취를 감추었던 5왕녀가 왕성으로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 * *
리즈벨은 불안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걷는 걸음걸음마다 수십 명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왕성에 피바람이 불고 있을 것이라는 리즈벨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이제 막 동이 튼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성안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어머, 5왕녀님…….”
그녀를 알아본 왕성의 사용인들이 숙덕거렸다. 간데없이 사라졌기에 왕자님들 손에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세상에나, 왜 돌아왔대. 이렇게 된 김에 멀리 달아나 버리지.
“내버려 둬. 미친 분께서 사리 판별을 하시면 얼마나 한다고. 지금까지 산 것이 용하다.”
예상했던 반응들이었다. 리즈벨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본성으로 향하는 커다란 문의 한쪽 기둥은 전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직 갈색으로 말라붙지 않은 걸 보니 간밤에도 혈투가 벌어졌었던 모양이었다.
문 안쪽으로 보이는 회랑에서 시종들이 시체 몇 구를 질질 끌어내고 있었다.
리즈벨은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 계속 있었다면 지금 끌려나가는 시체 중 하나가 바로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했다.
리즈벨은 결국 작게 속삭였다.
“옆에 있는 거 맞니?”
그 물음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지척에서 자박, 발소리가 났다. 보란 듯 흙바닥이 슥슥 짓밟혔다.
“…….”
하지만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것이 없으니 안도하기는 힘들었다. 검과 활과 창이 맞부딪치는 전장에 그녀 혼자 맨몸으로 내몰린 느낌이었다.
어딜 내놔도 과하게 눈에 튀는 남자를 그대로 데려올 수는 없어 모습을 감추라고 말은 했지만, 자신의 눈에도 보이지 않으니 불안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잠식하는 한기에 손끝이 덜덜 떨렸다.
리즈벨은 두려울 때면 늘 그랬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잘못 생각했나…….’
그냥 앞뒤 가리지 말고, 제가 가진 정체 모를 힘이라도 터뜨려 버릴 걸 그랬나. 막 리즈벨의 생각이 극단까지 치닫고 있을 때였다. 스윽, 바로 어깨너머까지 다가오는 인기척이 났다.
“입은 웃는데.”
낮은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주춤주춤 옮겨지던 그녀의 걸음이 뚝 멈추었다.
“몸은 떨고 있네요.”
부드럽게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는 품이 느껴졌다. 리즈벨은 웃는 얼굴인 채로 굳었다.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볼을 간질이는 느낌이 났다. 뒤에서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은 아시어스가 그녀의 목과 어깨 사이의 둥근 곡선에 느릿하게 입술을 대었다.
살짝 온기가 도는 입술이 조금 위쪽으로 올라갔다. 귓불 밑, 옴폭하게 팬 부분에 말랑한 감촉이 포개어졌다.
두근두근. 핏줄의 빠른 움직임이 그대로 입술을 타고 그에게로 전해졌다.
“심장 박동도 빠르고…….”
아시어스는 세차게 뛰는 목덜미에 입술을 댄 채로 나직히 읊조렸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고.”
“헉…….”
리즈벨은 그제야 자신이 지금껏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헐떡이는 숨이 뱉어져 나왔다.
“왜 이렇게 떨지. 이상하네.”
남자가 의아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들어왔다. 피부를 스치는 뜨거운 숨결과 입술의 감촉에 귓가와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종전과는 다른 의미로 전신의 감각이 흠칫 곤두섰으나 차라리 나았다.
리즈벨은 본능적으로 남자에게 좀 더 가까이 안겼다. 아시어스는 품 안에서 가늘게 떨리는 몸을 느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왕실에 척진 인간이 있습니까? 왕성 꼴도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꼭 반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
“잠깐 뒤돌아봐요, 아가씨. 얼굴 좀 보…….”
아시어스는 더 말을 잇지는 못했다. 그가 리즈벨의 목에서 입술을 떼고 그녀를 돌리기 위해 끌어안은 팔을 풀었을 때,
“……!”
기둥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리즈벨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그것은 정말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아시어스는 손안에서 빠져나간 몸을 완전히 놓치지는 않았다. 즉각 기둥 뒤로 돌아간 그의 눈에 보인 건, 리즈벨을 단단히 잡은 웬 사내의 모습이었다.
“너.”
리즈벨은 사실 그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홀로 걷는다는 건 이만한 각오는 필요한 일이었다. 어디서 누가 덮쳐들지 모른다. 언제 목이 떨어지거나 심장에 창이 꿰일지 모른다. 그런 것들을 각오하지 않고 온 것이 아니다.
“너…….”
하지만 사실 리즈벨은 자신을 가장 먼저 노릴 이라면 지칼이라고 생각했다. 닷새 전에 바로 눈앞에서 놓쳐 버렸으니 아마 이를 갈고 그녀를 찾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눈앞에 나타난 이는 지칼이 아니었다. 로제스였다. 그것도 리즈벨이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한 로제스.
리즈벨의 목에 날카로운 단검이 겨누어졌다. 로제스가 형형한 눈을 한 채 사납게 쏘아붙였다.
“네가 정말로 제정신이 아니구나.”
“오라버니.”
“멍청한 누이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로제스는 들끓어 오르는 무언가를 간신히 참아 내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로제스가 그렇게 격렬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로제스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운 좋아 도망쳤으면 평생 이곳으로 돌아올 생각은 말았어야지. 그게 정상이지!”
로제스의 크고 억센 손이 리즈벨의 어깨를 부서질 듯 잡고 있었다. 다른 한 손으로는 여전히 단검을 쥐고 그녀의 목을, 조금 전에 아시어스가 입 맞추었던 바로 그 핏줄을 겨누었다. 그러나 무언가가…….
‘이상하다.’
리즈벨이 막 그렇게 생각한 순간.
휙.
“……!”
자연적이지 않은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리즈벨은 그것이 마법사의 기척이라는 것을 알았다.
리즈벨은 로제스에게 보이지 않을 만큼 작게, 그러나 빠르게 손을 치켜들었다. 거칠게 다가오려던 기척이 뚝 멈추었다. 머리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지칼에게 잡혀 온 것도 아니고. 네 발로. 네가 정말 미쳤구나.”
로제스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어쩐지 들어야 할 것 같았다.
“믿을 구석도 없는 주제에. 대체 무슨 정신으로…….”
하지만 리즈벨은 로제스가 뱉는 말 중 무엇도 명확하게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이런 말을 하지?’
그러나 다음 순간, 리즈벨은 그림처럼 웃었다. 이 피 튀기는 계승전에 이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전장에서.
리즈벨은 작게 속삭였다.
“내가 못 올 곳이 있어? 여기는…… 내 집인데.”
“리즈벨. 너…….”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오라버니.”
어차피 나를 죽일 것이 아닌가?
리즈벨은 눈앞에서 친형제인 아이작의 머리를 날려 버리던 로제스를 기억했다. 그때 흘끗 저를 보던 얼굴이 소름 끼칠 만큼 무표정했던 것도 기억했다. 언제나 온기 한 점 없는 시선으로 저를 보던 것도 기억했다.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는 상대는 가끔은 제 추악한 면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상대보다 더 어렵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으니까.
리즈벨은 로제스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나를 죽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