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312
310화 외부의 협상
채터박스라면 분명 해파리, 무해의 왕을 도와 던전에 간섭해 왔다는 초월자였지. 그놈이 해파리의 후임이 된 건가.
“제안이라니, 무슨 제안? 설마 이제 와서 평화협정이라도 맺자는 거라면 마음은 지랄 말고 꺼지라고 말해 주고 싶다만, 받아들이겠다 전해 줘.”
효도중독자 새끼들에게 대한 앙금이 풀린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 새끼들이 끼어들어서 힘들어지는 건 우리 애들이다. 휴전하자고 하면 더럽게 고맙네요, 하고 받아 줘야지 어쩌겠어. 그래도 디아르마 놈은 내가 잡아 죽였으니.
“그런 건, 아니고요…….”
신입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채터박스는 무해의 왕을 살해한 자를 원하고 있어요.”
“뭐?”
당황스러웠다. 아니 걔들이 그렇게나 의리가 넘쳐나는 사이였어? 디아르마 땐 별말 없더니 무해의 왕은 의외로 인망이 있는 편이었나. 그럴 인간, 아니 해파리로는 안 보였는데.
“모른다고 해. 사실이잖아. 잘나신 초월자님께서 고작 스탯 F급에게 당했을 린 없고, 실종이지 뭐.”
복수라도 하겠다 나선다면 곤란한데.
“…채터박스인가 하는 놈, 해파리와 많이 친했냐?”
“무해의 왕은 단순한 친구 정도였지만요…….”
그러니까, 일방적으로 더 많이 좋아하던 사이라는 건가. 망했네.
“몰라, 무조건 모르는 거다. 상식적으로 이번엔 패륜아들 도움도 없었잖아. 그냥 실종이야. 난 걔 몰라. 갑자기 사라졌어.”
만약 내가 무해의 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나만 잡아 죽이려 들고 끝날까?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하지만 십중팔구 내 주위 사람들도 위험해지게 되겠지. 흔하잖아. 네 소중한 사람들도 전부 없애 버리겠다, 같은 거.
…꿈속이라 공포 저항이 안 통하는 건가 전신이 오싹해졌다. 가장 먼저 누굴 노리게 될지 너무도 뻔해서 더더욱 한기가 돌았다.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여전히 힘이 없었다.
“…채터박스가 아직 자세한 정황은 모르는 거 맞지? 맞다고 해라, 제발.”
신입이 새빨간 두 눈을 어쩔 줄 몰라 하며 데굴데굴 굴렸다. 망할. 체한 듯 속이 답답해졌다. 두 번은 안 돼. 죽어도 두 번은 안 돼.
“모르지만, 요. 무해의 왕이 허니를 노리던 건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지금 허니를 원하고 있어요.”
멍하게 신입을 올려다보았다. 디아르마도 무해의 왕도, 사실 던전의 보스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해치우면 그걸로 끝인 상대. 디아르마는 실제로 그랬지만. 보상도 얻었고. 하지만 무해의 왕은, 루가 폐야는 달랐다.
그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가 있었다. 미처 생각지 못한 사태였다. 정말로.
“정당방위, 라고 해봤자 들은 척도 안 하겠지.”
내가 억울해 봤자 무슨 상관일까. 나라도 그럴 텐데. 만약에 유현이가 잘못을 하고 그로 인해 살해당했다 해도, 그럼에도 나는 살해자를 증오할 것이다. 어긋난 복수를 하고 싶어질 것이다. 잘잘못 이전에 그럴 수밖에 없다.
하물며 놈들은, 초월자는 인간이 자신들에 비해 하찮게 느껴지겠지. 사람이 들쥐를 잡으려다 물려 상처가 덧나 죽기라도 한다면 물린 사람을 탓할까. 그 전에 들쥐부터 죽여 버리겠지. 그 근방의 들쥐를 죄다 몰살시키려 들지도 모른다.
‘…심지어 채터박스는 시스템을 다룰 수 있다고, 했지.’
이미 던전에 간섭해 오기도 했다. 다른 초월자들과 달리 세계를 보호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안심할 만한 상대가 아닌 것이다. 게다가 나와는 달리 내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던전에 자주 들어간다.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빌어먹을, 채터박스가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거지. 지금이라도 유현이와 예림이를 집에서 내보내야 하나. 나와는 별 관계가 없는 척. 아니, 아예 사이가 나쁜 척…….
‘…이건.’
문득, 회귀 전의 일이 떠오르며 맥이 쭉 빠졌다. 유현이도 예림이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를 노리는 초월자가 있으니 멀어지자 라고 말해 봤자 들어줄 리 없겠지.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내 주위 사람들을 모두 떨어뜨려내는 짓은, 못 하겠다.
눈은 흐리고 따가운데 웃음이 새어 나왔다.
“채터박스고 뭐고 우리 애들 건드리기만 해 봐.”
“…허니.”
“그냥, 그냥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 먼저 괴롭힌 게 누군데 왜 지랄이야. 두 번 한 일 세 번은 못 할 거 같냐.”
막 회귀했을 때는 다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답답하고 막막했다.
디아르마도 루가 폐야도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강력한 초월자라는 사실은 똑같았다. 하지만 그 둘은 목적이 따로 있었다. 마주치면 그래도 대화부터 나눌 수 있는 상대였다. 나를, 내 주위 사람들을 살려 둘 필요성을 떠들어 댈 수도 있었다. 기회를 노릴 틈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지만 채터박스는 단순히 복수심만을 가지고 있다. 가타부타 할 것 없이 내 목을 따면 끝인, 내 목숨만으로 만족하면 다행인 적. 상대를 괴롭히거나 죽일 생각 외엔 없는 놈들이야말로 진짜 최악이다.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신입이 내 앞으로 다가와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도와주게?”
“저는, 그러고 싶은데…….”
“제안이란 거, 뭐였는데.”
신입이 내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허니의 세계를 넘겨주면요, 앞으로 백 년간은 방해하지 않고 도와주겠다고요. 채터박스는 잘 나서는 성격은 아니지만 시스템 관리가 가능한 만큼 한번 간섭해 오면 정말 귀찮은 상대거든요.”
“당연히 도움도 많이 되겠네.”
“그, 그렇죠……. 세계 하나를 희생해서, 여러 세계를 구할 수 있는 거니까…….”
“넘겨주겠다든?”
내 말에 신입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곱실거리는 털의 귀가 팔랑개비처럼 흔들렸다.
“아뇨! 일단은 아니에요! 저도 그래선 안 된다고 했고 물방울과 나무 선배도 반대했어요.”
“인어여왕이 깨어났어?”
“네. 아, 그리고 초승달도요!”
초승달이라는 말에 가슴이 덜컥거렸다. 지금쯤 잠들어 있을 성현제가 절로 떠올랐다.
“초승달도 깨어났다고?”
“바로 조금 전에 연락이 왔었어요. 아직 움직이는 건 불가능하지만 초승달도 채터박스에게 허니의 세계를 넘겨주는 건 반대라고 했거든요.”
신입은 신나게 말했지만 내 속은 편치 않았다. 당연히 넘겨주고 싶지 않겠지. 성현제가 여기 있으니까. 혹여 채터박스가, 효도중독자들이 성현제에 대해 알게 된다면 십중팔구 그를 없애 버리려 들 것이다.
‘패륜아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반기지는 않겠지.’
근원을 소멸시킬 만한 힘을 키워내는 것을 우려하는 패륜아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심지어 그 힘의 소유자가 초승달이라는 한 명의 초월자라면. 걱정하다 못해 위협을 느끼는 자들도 있겠지.
갈수록 첩첩산중이다, 정말.
“초승달과 만나 보고 싶어 했잖아요, 허니. 말이라도 전해 줄까요?”
“아니, 지금은 됐어. 그보다 우리 세계를 넘겨주는 건 거절했다는 거지?”
“네. 하지만 협상을 할 생각은 다들 있어서… 채터박스 외의 다른 효도중독자들도 관심을 보이고 있고요.”
“알고는 있지만 새삼스럽게 기분 더럽네. 자기들이 뭐라고.”
멸망해 가는 세상 도와주겠다고 나선 건 고맙다. 하지만 도와줬다고 해서 우리를 판돈으로 써먹는 건 아니지. 우리 의견 따위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결정하겠다는 거 아니냐고, 지금. 심지어 나 말고는 의사표시는커녕 까맣게 모르고들 있잖아. 우리 세상 사람들은.
“잘나신 초월자들이라 이거지. 우리가 결정하면 하찮은 인간들은 무조건 따르면 됩니다, 냐.”
“저기, 허니. 그게요.”
“요즘 것들은 처음부터 위에 선 녀석들이 대부분이니 말이다.”
어린 혼돈이 말했다. 겉모습과 달리 정말 어르신스러운 소리였다.
“예전에는 원맥자가 아닌 초월자들도 많았었지.”
저 예전이 대체 언제 적인 걸까.
“초월자들은 전부 태생 S급일 줄 알았는데요.”
“그럴 리가 있나. 오히려 원맥자들은 일정 한계를 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 필사적으로 노력할 필요가 없으니.”
노력하지 않아도 잘났으니 거기서 멈춰 버린다는 건가. 하긴 뭐든 쉽게 해낸다면 괜히 더 열과 성을 쏟을 이유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키워내진 초월자들이 대부분이지. 그건 원맥자가 아니고선 불가능한 방법이고, 원맥자란 기본적으로 평범한 인간들, 동족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생각이 박힌 녀석들이니 말이다.”
여느 인간들을 낮춰 보는 것이 당연하다며 어린 혼돈이 말을 이었다.
“원맥자 출신이 아니더라도 오랜 시간 초월자 노릇 하다 보면 변하는 경우도 흔하지.”
개구리 올챙이 적 모른다는 건가.
“그래도 신입은 좀 덜한 거 같은데요.”
“저, 저요……?”
내 시선에 신입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으로 자기 귀를 만지작거렸다. 태생 S급도 성격이 다양할 테니 말이야. 신입 같은 성격도 있는 거겠지.
“어쨌든 채터박스가 당장 덤벼들진 않는 거지? 맞아?”
“네. 애초에 아직은 허니 세계에 접근할 수 없어요. 그래서 협상도 천천히 이루어질 듯하고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우리가 무력한 건 명백한 현실이다. 패륜아들이 잘 막아 주길 기대하는 수밖엔 없었다. 아니면 디아르마 때처럼 도움이라도 주든가. 체인질링과 같은 마수를 다시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깝겠지. 재료부터가 초월자의 마석에 성현제의 파편이니.
“어떤 방식이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채터박스와 타협하기는 해야 할 거예요. 무조건 거절했다간 허니 세상에 어떻게든 해코지하려 들 테니까요.”
“응, 그렇겠지…….”
“최대한 허니 세상에 유리하도록 할 거예요. 노력할게요! 제가 신입이긴 해도 시스템을 다룰 수 있으니까, 발언권은 강하거든요.”
“고마워. 부탁할게.”
신입이 방긋 웃으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꽃잎 같은 옷자락이 팔랑거린다. 그동안 구박 참 많이 했는데도 나한테 계속 잘 대해 주고. 신입이 패륜아들 중에선 진짜 제일 착하고 좋은 녀석이긴 했다. 유현이와 삐약이 취급은… 시스템 관리자 입장에서 한 말이니. 이제는 신입도 좀 다르게 느껴지지 않을까.
“참, 신입 네 이름은 뭐냐?”
“…네? 이름요?”
“너도 있을 거 아냐. 아직 말해 주면 안 되나?”
“어, 네, 이름… 안 돼요!”
신입이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말을 돌렸다.
“시스템 연결까진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특히 허니 나라는요. 그래도 그때까진 안전할 테니까, 푹 쉬세요!”
“응, 그럴게. 시스템이 연결된 건 어떻게 알 수 있지?”
“떡잎 스킬을 써보세요. 그건 수동 입력이라 시스템 연결 전까지는 제대로 쓸 수 없거든요. 기존 입력 완료된 대상이 아니면 상태창이 뜨지 않을 거예요.”
한동안 별일 없을 거라니 괜찮은 각성자 다시 찾아볼까 했는데, 아쉽네. 상태창은 안 떠도 스킬 자체는 존재하니 대충 느낌은 오지 않을까.
“그런데 어르신은 왜 신입과 함께 계신 겁니까? 이렇게 빨리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검 주신 건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제 동생이 무척이나 좋아했어요.”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혹시 뭐 하나 더 주시려고 오셨나. 혼돈이 느슨히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다 죽어가는 어린애가 아등바등거리는 게 신경 쓰여서.”
“예?”
“네 꼴을 봐라.”
뭐 일단 겉보기엔 멀쩡한데.
“20년은 더 살 거라면서요.”
“하는 짓 보면 내년쯤엔 반쯤 묻혔어.”
“벌써 9월인데 너무 짜네.”
날 향한 눈빛이 차도 주변을 돌아다니는 꼬질꼬질한 하룻강아지 보는 듯하다.
“뭘 했는지 마력 흐름 상태도 엉망이야. 이거 봐라, 이거.”
내 뒤쪽에 선 어린 혼돈이 뒷목을 손바닥으로 짝 내리쳤다. 꿈속인데도 따끔하게 아팠다.
“아니, 보라고 해도…….”
“내가 가르쳐 주는 대로 마력을 움직여.”
“꿈이라서 저한테는 아무 영향 못 준다면서요?”
“그러니 가르쳐만 주겠다는 거 아니냐. 꿈속이라고 해도 네가 직접 움직이는 건 현실의 마력도 따라갈 테니 입 다물고 집중해.”
뒷목에 손이 닿고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내가 따라가기 쉽도록 느릿하게 등 위로 그리듯 열기가 움직인다. 그 움직임대로 내 몸의 마력의 흐름을 조종해 보았다. 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따라갈 수 있었다.
“흐트러진 마력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운기법이니 기억해 둬라. 그래도 부작용 자체는 막지 못하겠지만.”
확실히 축축 늘어지던 몸에 조금쯤 힘이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포인트 필요 없으세요?”
“그땐 시스템 속이었고 내가 직접 만져 준 거였으니까. 그리고…….”
어린 혼돈이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영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혀를 쯧쯧 찬다.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자꾸 내버려 두면 얼마 못 가 픽 죽어 버릴 놈처럼 보시네.
“시스템 연결되고 나거든 다시 보자.”
“신경 써 주셔서 무척이나 감사합니다, 어르신.”
또 뭐 해주시려나 보다. 명절이 코앞이라 선가 진짜 집안 어른 보는 기분이었다. 현실에선 퍼주긴 커녕 있는 것도 빼앗아 가려 들었지만.
“아, 포인트 상점은 어떻게 되는 거야? 언제 없어지지?”
“지금의 포인트 상점은 시스템 제작자가 연결시켜 준 거라서 저는 아직 못 건드려요.”
“시스템 제작자?”
“네. 잠깐 왔었는데… 그런 일이 있었어요!”
말하긴 곤란한 모양이었다. 아무튼 계속 상점을 쓸 수 있다면 나야 좋지.
“그럼 남은 포인트는?”
“그것도 회수할 순 없고요. 허니가 지금 가지고 있는 아이템들도요.”
오, 그럼 살쾡이 템들도 그대로 남는 건가? 물어보니 계속 내가 써도 된다고 했다. 다만 대여 귀속 상태도 그대로 유지된단다. 신입이 다음에 봐요, 하고 손을 흔들고 시야가 어두워졌다. 흐릿해진 의식 속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많이 피곤해? 방에 데려다줄게.”
유현이 왔구나. 느리게 눈을 떴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