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69
567화 설문조사
크리스마스 캐럴 속의 커다란 칠면조 요리는 무척이나 맛있어 보였다. 윤기가 흐르는 갈빛 고깃덩이에 듬뿍 끼얹어진 소스, 각종 채소와 과일이 둥글게 곁들여 장식된 하얀 접시. 팔뚝만 한 통다리가 어찌나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실제 칠면조 고기는 퍽퍽했다. 대부분의 음식은 상상 속에서 가장 맛있으니. 그리고 내 신세는 그 퍽퍽한 칠면조와 비슷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살찌워지는 칠면조. 앞날을 알고 굶는다 한들 메인디시를 빼고서 파티를 열 리 없었다. 그저 살 덜 찐 칠면조 구이와 저렴해진 몸값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겠지.
‘이 금화들이 내 몸값이냐.’
내 인벤토리 속에 금화들이 짤랑짤랑. 채터박스가 날 키워서 처먹겠다고 해도 지금의 나로서는 거부할 수 없었다. 일단 살찌워지긴 살찌워져야지. 굶으면 나만 손해인걸. 잘 먹어야 막판에 탈출할 힘도 생기는 법이다.
“유현아, 형이 사실은 칠면조였단다.”
실없는 헛소리에 유현이가 눈을 깜박였다.
“…혹시 칠면조가 되고 싶은 거야?”
“내 동생, 착하기도 하지.”
농담 아니면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건가 싶을 소리도 진지하게 생각해 주고.
“크리스마스 때 칠면조도 먹자.”
맛이 있든지 없든지. 그래도 요리 잘하면 맛있겠지. 환상 속보다는 못해도.
“비록 칠면조는 먹히기 위해 살찌워졌지만, 그러니 먹어 줘야지.”
“아저씨, 추수감사절에 칠면조 사면식도 한대요.”
내 헛소리를 들었는지 예림이가 다가오며 말했다.
“식탁에 오르는 대신 농장에서 평생 평화롭게 살게 되는 거죠.”
“채터박스가 파티를 너무 늦게 열었네.”
11월 말이 아니라 초반에 시작했어야지. 추수감사절은 이미 지났잖아.
“그래도 칠면조가 닭보단 세겠지.”
“엄청 사납대요.”
“잘됐네.”
들이받으라는 소리렷다.
“칠면조와… 뭔가 문제라도 있었어?”
유현이가 내 헛소리를 어떻게든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며 말했다. 그런 동생이 고맙고도 기특해서 유현이를 가볍게 안아 토닥여 주었다. 형이 세상에서 제일 센 칠면조가 되마. 아님 도망 잘 치는 칠면조라도.
저쪽에서 칠면조 동지가 나타났다. 나보다 열 배쯤은 더 화려했지만. 그러고 보니 송 실장님이 성현제 잡아가려 했을 때가 추수감사절 즈음이었던 거 같은데. 초승달은 열심히 살찌운 칠면조를 두 번이나 빼앗길 뻔했구나. 완벽하게 살찌워지기 전까지는 손대지 않는 초승달을 본받아 봐라, 채터박스 놈아.
“안녕하세요, 세성 길드장님.”
음, 역시 칠면조와는 어울리지 않아. 공작새라고 해주자. 공작새도 먹긴 먹는 모양이던데. 통통한… 이것도 어울리진 않지만 아무튼 충분히 살찌기 직전의 공작새. 나와 눈이 마주친 성현제가 의아해했다.
“묘한 시선이로군.”
“꼬리 깃이 참 화려해서요. 아이 눈부셔라.”
이번만큼은 성현제도 내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잘 이해 가질 않는 모양이었다. 자기를 공작새로 빗댄 건 눈치챈 듯싶지만. 유현이와 예림이와 결이가 걱정스럽게 날 쳐다보니 이쯤 해둬야지.
채터박스가 미친 새끼라는 사실을 재확인한 것만 제외한다면 꽤 즐거운 휴식시간을 보냈다. 관광도 하고 선물도 샀고. 산 물건들은 바로 한국으로 보냈다. 직접 가져다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선물 챙길 여유가 없을 가능성은 꽤 높지.
삐약이랑 다른 새끼몬스터들이랑 사육소와 빌딩 사람들과 영상통화도 했다. 명우는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연락도 잘 안 된다고 했다. 신입과 함께 있는 걸까. 신입 녀석 허튼수작 부리지 말아야 할 텐데.
삐약이가 이따금 실종되는 것 외에는 벨라레와 호랑이, 송이, 소록이, 마르 등등 다 잘 있다고 하였다. 사육소 직원 말로는 예림이와 현아 씨는 물론이고 송 실장님한테서도 전화가 왔었다나. 역시 일단 맡으면 잘 챙겨 주신다니까.
‘하민이 놈은 뭐가 고양이 아웃이야.’
금동이랑 두 번 다시 만날 생각도 하지 마라, 사진과 영상은 보내 주겠다 라니. 필요 없어. 그 전에 스킬이다 이놈아.
한국에 있는 사람들 중 제일 신난 건 당연히 석시명이었고 제일 흥분한 사람은 석하얀이었고. 채터박스와 만나게 해달라고 거의 애원을 하는 하얀 씨를 달래느라 힘들었지. 그게 말입니다, 평범한 인간의 짓이 아니에요. 현대적인 연구를 통해 던전을 이용한 게 아니라니까요.
석시명은 잘하고 계신다며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하면서도 혹여 도담이 홀로서기를 하진 않을까 은근히 견제하는 눈치였다. 도담의 영향력이 커지는 건 좋지만 어디까지나 해연과 한 몸처럼 같은 편일 때의 일일 테니까.
“이쪽! 이쪽!”
“고개 들어 주세요!”
“요정용의 예상 성장등급은!”
대기 중인 차를 타기 위해 로비 밖으로 나가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아우성쳤다. 막아 놓은 선을 넘으려는 몇몇을 가드들이 재빠르게 막았다. 카메라들을 향해 능숙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이제는 공포 저항 없이도 그럭저럭 웃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스킬 끌 생각은 없지만.
“최고의 F급!”
“우승하자!”
저런 사람들도 있었고.
“헌터는 전부 사기꾼이다! 진실을 밝혀라!”
이런 사람들도 있었고.
“지구가 평평한 돔이라는 사실을 던전이 증명한다!”
요런… 응? 그, 던전 내부가 투명한 돔에 씌워진 것처럼 한계가 있긴 한데. 아무튼 별의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적당히 인사해 주곤 차에 올라탔다. 팀별 파티 일정이다 보니 너른 차 안에는 또 나 혼자였다. 채터박스가 튀어나오거나 하면 뒷목 잡을 거 같아서 개인방송을 켰다. 방송 중엔 못 튀어나오겠지. 평범한 비각성자 재벌인 척하고 있으니까.
“안녕하세요, 여러분~”
└ 한소장 하이!
└ 기다렸어요!
└ 해연길드장님 방송 켜달라고해주심 안되요? 아님피스라도ㅠㅠㅠㅠㅠㅠ 조용히 구경만할게요ㅠㅠㅠㅠㅠ
유현이 녀석 석시명이 그렇게나 방송에 좀 더 신경 써 달라고 부탁했는데도 꺼놨구나. 유현이에게 괜찮으면 피스 방송이라도 켜두라고 문자를 보냈다. 이내 알겠다고 대답이 돌아왔다.
└ ㄱㅅㄱㅅㄱㅅㄱㅅㄱㅅ
└ 해연길장 방송켜자마자 또 형이야기햌ㅋㅋㅋㅋㅋㅋㅋ 역시 SB
“SB요?”
뭐냐 그게.
└ 슈퍼브라더콤플렉스LOL
└ 슈퍼브라콤ㅋㅋㅋㅋㅋㅋㅋ
…내 동생에게 무슨 짓들이야. 무심코 미간을 찌푸리자 채팅창에 다른 별명도 올라왔다.
└ BF도 있어요 SF랑 맞춰서
└ 브라콤 플레임ㅋㅋㅋㅋㅋㅋ
└ 블루블랙 파이어아니었음?
정말… 센스들 정말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 작명 실력은 전 세계 평균을 웃도는 게 아닐까 싶었다. 형제니까 나름 내 별명과 맞추느라 저 꼴 된 거 같은데 이상해. 차라리, 그러니까, 음……. 내가 영단어를 잘 몰라서.
└ 그럼 송태원은 PS냐
└ ES겠지 송이니까 SES
└ 성현제 SS
└ 슈퍼성?
└ 세성인데요
반드시 알파벳 두 개로 맞춰야 한다는 법칙이라도 있는 겁니까. 뭣보다 브라콤에 색깔 뭔데. 차라리 슈퍼 플레임…은 나랑 같아지는구나. 파이어도 F네. 어쩌다가 둘 다 F냐. 나는 스탯이 F고 동생은 속성이 F고.
“좀 멋있는 거 없습니까? 동생이 저를 많이 좋아하긴 하지만요 경찰을, 같은 S급 헌터를 열 명 넘게 잡았데!”
└ 동생분이 형을 너무 사랑해요ㅋㅋㅋㅋㅋ
└ 슈퍼 경찰청장
그놈의 슈퍼를 좀 버려라.
└ 제노사이드
└ 킬링 파이어
└ KF
└ C!
└ 코리아 플레임
가관이었다. 아무튼 왜 자꾸 브라콤이래. 우릴 얼마나 봤다고. 이번 파티 동안 유현이가… 음……. 어제 일 때문에 더 그런가? 채터박스 놈이 밤에 왔다 간 것 때문에 살짝 처져 있었더니 날 많이 챙겨 주긴 했었지. 석시명은 좋아하겠네.
그러는 사이 차가 멈추어 섰다.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시험장?’
줄줄이 놓인 책걸상이 보였다. 먼저 도착해있던 예림이가 아저씨, 여기예요! 하고 손을 흔들었다.
“방송은 잠시 종료해 주십시오.”
뭐지. 하다하다 이젠 필기시험도 치는 건가. 예림이 근처 빈자리에 앉자 예림이가 책걸상을 들고 내 옆에 붙었다.
“시험 치는 거 아냐? 떨어져 앉아야 할 거 같은데.”
“떨어지라고 하면 그때 떼면 되죠. 헉, 저 영어 잘 못 읽는데! 한글로 번역해 주겠죠?”
자리가 하나둘 채워지고 유현이도 내 반대쪽 옆으로 책걸상을 들고 왔다. 피스도 유현이 옆자리에 앉았다. 내 앞쪽에 앉은 노아의 양옆으로 리에트와 강소영이 딱 달라붙었다. 노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우이이익!
결이가 책상을 우리 근처로 끌고 오려고 힘껏 잡아당겼다. 날개가 애처롭게 파닥거렸지만 책상은 쉽게 움직이질 않았다. 요정용일 때는 인간화했을 때보다도 힘이 약하니까. 일어나서 도와주려는데 성현제가 결이 책상을 한 손으로 가볍게 밀어 주었다. 책상 위에 올라앉은 결이가 분한 듯 꼬리를 탁탁 내리쳤다. 그래도 잘 돌봐주네.
우리로부터 조금 떨어져 앉은 송 실장님 옆자리엔 현아 씨가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뭔가 대화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뒤쪽 자리에 우아하게 앉아 있는 에블린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파티 참가자들이 전부 자리 잡고 앉자 채터박스가 강당 위로 걸어 올라갔다.
“즐거운 휴식시간이 되셨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화려한 정장이 아니었다. 차분한 셔츠바지 차림에 팔뚝에 벨트 같은 걸 차고 있었다. 정말로 필기 시험 치는 거냐.
“지난번 게임 이후 시청자분들께서 다양한 의견을 보내 주셨습니다.”
딱,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강당의 스크린에 시청자 의견들이 나타났다.
“단순 감상에서부터 원하는 프로그램까지. 그 수많은 말씀을 종합해 본 결과!”
화면이 바뀌고, 빗속의 송태원에게 총을 겨누는 내가 나타났다. 아아아악! 갑자기 저런 거 들이대지 마! 이제 겨우 잊어가고 있었는데!
“전투! 역시 헌터 간의 싸움을 바라는 분들이 가장 많더군요. 비록 파티에는 어울리지 않는 시합 방식이지만 간단한 결투를 진행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했네. 하지만 동시에 뭔가 꼼수가 있는 거겠지 싶어졌다. 채터박스가 굳이 나를 불리하게 만들 이유는 없으니까. 아니면 계속 이겼으니 한 번은 바닥 치라 이건가. 당근과 채찍 같은.
“일대일. 한 번의 승부입니다. 상대를 정하기 위해 나눠 드리는 설문지를 작성해 주세요.”
설문지가 책상 위에 놓였다. 파티 참가자에 한해서 답변해 주세요. 1번, 싸워 보고 싶은 사람. 2번, 가장 관심이 가는 사람. 3번,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 4번, 가장 관심이 가지 않는 사람. 5번, 함께 여행 가고 싶은 사람. 응? 6번, 대화를 나눠 보고 싶은 사람. 7번, 살해해 보고 싶은 사람. 아니 이건 좀……. 열다섯 개의 문항 대부분이 참가자를 골라 적는 내용이었다.
“한유현 또 전부 형이야! 4번도 형 외의 사람이잖아.”
예림이가 유현이 설문지를 당당히 훔쳐보며 말했다. 유현이가 예림이를 무시했다. 피스 앞에는 태블릿이 놓였다. 피스가 앞발로 내 사진을 연신 꾹꾹 눌렀다. 피스야, 아빠 찾는 거 아니야. 결이에게도 태블릿이 주어졌다.
“아저씨는 누구 썼어요?”
“보면 안 되지.”
“저도 하나 보여 드릴게요. 저 1번에 세성아저씨 썼어요. 제대로 한번 붙어 보고 싶었거든요!”
“나는…….”
유현이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봐왔다.
“나야 당연히 유현이지.”
“에이, 솔직하게.”
“진짜야. 3번은 결이고.”
“맞다, 저도 결이 적어야지! 차라리 피스라면 모를까, 어떻게 싸워요. 7번은, 여긴 없는데. 저기요! 없으면 비워도 되나요?”
“물론 됩니다.”
채터박스가 대답했다. 나도 7번은 딱히 없지. 재빠르게 설문지 작성을 끝낸 예림이가 자기 설문지는 곱게 접어 감추고 주위를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결아, 봐도 돼? 너도 1번이 세성아저씨야? 세성아저씨는요? 오, 역시 아저씨랑 송 실장님 지분이 높네요! 관심 안 가는 사람은 없어요?”
“이름을 쓸 정도면 관심이 없다고 말하긴 어려우니.”
“아저씨, 세성아저씨가 저랑 싸워 보고 싶대요!”
예림이가 자랑스럽게 외쳤다. 의외네. 아니, 생각해 보면 성현제는 아직 예림이와는 제대로 붙어 본 적이 없었지. 게다가 지금의 나는 싸워 볼 만하지도 않으니까. 이중에서 굳이 고른다면 예림이가 성현제의 구미에 맞긴 할 터였다. 그나마 새로우니.
“자, 설문지를 제출해 주십시오.”
삼십 분쯤 뒤, 도우미들이 설문지를 걷어갔다. 기다리는 사이 간단한 다과가 내어졌다.
“현아 언니는 누구 썼어요? 1번은?”
“비밀.”
“에이. 송 실장님은 대부분 공란이었어요. 노아 오빠는요?”
“저도 비밀입니다.”
예림이가 재미없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송태원 실장과는 여러 번 여행을 다녀왔으니 한유진 군과도 즐거운 시간을 가지고 싶은데.”
“누가 또 양심 없는 소리를 하시네. 여행이 아니라 강제 출장이겠지.”
문현아가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송태원이 조용히 차를 마셨다. 잠시 뒤 채터박스가 다시 나타났다.
“설문 결과와 참가자 여러분의 솔직한 마음을 바탕으로. 이동하시지요!”
채터박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위 풍경이 훅 바뀌었다. 방송은 아직 꺼진 채였다. 내가 너무 불리한 상대라면 차라리 방송을 하지 않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일단 상대를 확인하고.
누군가가 내 앞에 나타났다.
“일단, 안녕.”
한쪽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며, 한유진이 한유진에게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