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00
제100화
교국의 상징인 파란 보석이 가운데 박힌 은색 정십자였다.
유리는 앞뒤로 십자를 뒤집어봤다.
“이걸 전해달라고?”
“아니, 네 거야.”
“내 거?”
“내가 감사 표시로 줄 수 있는 값나가는 물건이 그것밖에 없어.”
값나가……는 물건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말았다.
은 십자는 아링턴 교를 믿는 어떤 가정이든 하나씩 가지고 있다.
비싼 은 십자는 진짜 사파이어에 은으로 주조하는 반면.
유리가 받은 십자가는 나무에다 은을 칠하고 파란 보석은 싸구려 크리스탈에 파란색으로 칠해놓았다.
울퉁불퉁한 표면을 봐선 직접 만든 게 분명했다.
“나쁘지 않네.”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선물 준 사람이 하는 질문치군 이상하네. ……뭐,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받은 것만 해도 충분해.”
“…….”
밀리샤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녀는 이 상황이 부끄러웠다. 정말로 줄 수 있는 최선이 저 십자가가 다였으니까.
그에 반해 유리는 큰 걸 줬다.
딱히 뭐라고 할 수는 없어도, 어쨌든 그녀에게 그는 큰 사람이었다.
헌데 줄 수 있는 거라곤 싸구려 정십자뿐이었으니.
‘어머니의 계시 중 유일하게 믿지 않았던 게 들어맞을 줄이야.’
밀리샤도 한때 사춘기 소녀처럼 방황했던 시기가 있었다.
릴림이 떠났을 때였다.
악마의 혼이 붙었다는 이유만으로, 악마가 절대 강림하지 않을 거라고 해놓고.
그래놓고 매정하게 릴림을 내치는 교국의 행태에 깊은 회의감을 느꼈었다.
그때, 엘카가 계시 하나를 알려줬다.
“네가 좋아하는 그 사람을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거란다.”
엘카의 계시를 믿었기에 밀리샤는 그 한마디를 가지고 회의감을 이겨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감정이 무뎌졌고, 밀리샤는 그 계시를 엘카가 거짓으로 해준 응원으로만 여겼다.
그러다 유리가 나타났다.
‘아이러니하네.’
돌이켜보면 왜? 라는 의문이 남았다.
왜, 왜 나는 유리가 도망가고 혼자서 교제와 마주쳤을 때 그리 당당할 수 있었는가.
무슨 마음으로 마검의 주인을 감쌌는가.
그냥 이단심문국에서 악마와 마검의 주인이 같이 튀어나왔다고 해도 좋았을 것을.
밀리샤는 다시 후드를 덮어썼다.
“용무는 끝났으니 가볼게. 조사해서 나오는 내용은 너희 가문으로 보내주면 되겠지?”
“어.”
“그럼.”
그대로 밀리샤는 왔던 길로 뛰어갔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유리는 피식 웃었다. 귀에선 티르빙이 이유 모를 비명을 질렀다.
* * *
한 달 정도 지나서야 교국에서 공식적으로 내부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 공표했다.
이단심문국이 키메라를 만들고 있었으며, 원리주의자들이 가짜 악마를 만들려고 했다고.
이후 흑마법사들의 존재 또한 세상에 알려지면서 대륙이 들썩거렸다.
교국은 공식적으로 흑마법사들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교국 내에 흑마법사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 * *
가문으로 돌아온 유리는 휴식을 취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 동안은 훈련도 하지 않았다.
대신 몇 가지 조사를 하고 있었다.
“도대체 녀석들은 어디서 돈을 조달했을까?”
등받이가 수평에 가깝게 기울어진 의자에 앉아 중얼거리는 유리.
옆에서 다소곳이 앉아 사과를 깎던 릴림이 말했다.
“이단심문국, 돈 많아요.”
“그놈들 돈이 아니래.”
“진짜요?”
“응.”
가문으로 돌아오자마자 유리는 밀리샤가 보낸 편지를 받았다.
편지 안에는 그간 이단심문국에서 축출된 사람들을 심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흑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키메라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문제는 그들에게 제공되었을 자금 출처가 묘연했다.
“밀리샤가 전해 준 말에 따르면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흑마법사들에게 나간 돈이 없대.”
“대가도 안 받고 키메라를 만들다니. 이상해요.”
유리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단심문국 측에서 흑마법사에게 제공한 거라곤 키메라를 억제하기 위한 부적 밖에 없었다.
키메라 제조에 필요한 재료나 하다못해 운송비용만 해도 어마어마할 텐데.
“더군다나 그 놈들이 만든 키메라는 완성도가 높았어. 육체 개조만이 아니라 흑마나까지 썼거든.”
“아티팩트 아닐까요.”
“아냐. 키메라가 자체적으로 쓴 마나였어.”
보통의 키메라가 육체 개조만으로 만들어진다면, 교국에서 만난 키메라는 흑마나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것도 그냥 검은 마나가 아니라 성력으로 정화가 불가능했다.
마치 진짜 악마와 똑같은 힘.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
‘흑마법사한테는 그런 기술이 현재로선 없을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있어?]‘단정이 아니야. 미래에 나타나니까 현재엔 없을 줄 알았던 거지.’
악마와 가까운 키메라가 발견되는 건 제 2차 슈레빌 참사가 벌어지면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악마가 바다를 건너서 동쪽 대륙에 다다르는 시기와 맞물렸다.
달리 말해, 한참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타날 것들이 지금 나타났다.
‘설정집에선 제 2차 슈레빌 참사에 다른 조직이 끼어 있다고 했었나?’
[메데스 재단?]‘응.’
제 2차 참사 배후에는 이단심문국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비록 멸망의 시기와 겹치면서 제대로 된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으나, 조사의 진척이 없지도 않았다.
그 과정에서 악마추종자와 메데스 왕가라는 이름이 튀어 나온다.
정상적인 종교가 있듯이 사이비도 있는 법.
이단심문국이 그저 종교적 신념이 비틀어진 집단이라면, 악마 추종자는 아링턴 교를 부정하고 악마를 믿었다.
그들은 악마가 세상에 강림해야만 더러운 것들을 정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추종자 집단 중 가장 큰 조직이 메데스 재단이며.
“……메데스 왕국이기도 하지.”
대륙 북동부 내륙 지방에 메데스라는 커다란 국가가 있다.
갈색 용가라 불리는 리펠리온의 비호를 받는 강대국으로, 문학과 예술, 학술의 부흥지로 유명했다.
그곳은 마법학회 본부를 비롯해 저명한 기관들이 몰려 있어서 사람들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은 빛이 꺼지지 않아서 빛의 나라라고도 불렀다.
‘키메라를 만들 정도로 돈이 있고, 금지된 학술에 대한 열망이 강하고, 악마를 추앙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그 자들이 가장 확률이 높긴 해.]‘그렇다고 메데스 재단을 섣불리 건드리기도 모호해.’
메데스 재단과 그 왕실은 그냥 돈이 많다는 정도로는 표현이 부족하다.
아마 재산만 따지면 동서 대륙을 통틀어 가장 부자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들은 주로 학회나 협회 후원에 돈을 많이 썼다.
즉, 자기 편이 엄청나게 많은 셈이다.
그런 놈들을 건드린다?
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밀리샤가 운송책을 우선적으로 추적하고 있다니까 그걸 기대해 봐야지.”
교국 안으로 키메라나 그 재료를 가지고 온 물류 길드가 있다.
밀리샤와 특무대는 현재 그 길드를 좇았다.
그들을 따라가 보면 그 잔당과 흑마법사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메데스가 나와 준다면 건드리진 못해도 찔러볼 명분쯤은 생기리라.
“마검은요? 아직도 인정 안 해요?”
릴림의 물음에 유리는 편지를 고이 접으며 답했다.
“성력을 쓰는 바람에 마검으로 볼 수 없다나 봐. 모양만 마검처럼 만든 무기로 결론지었대.”
“우으, 그럼 도련님 명성이…… 안 올라가요.”
“겨우 시작이야, 릴림. 조급해할 필요 없어.”
마검에 대한 인식 바꾸기는 원래 계획에 없던 일이다.
즉흥적으로 꾸며냈던 거라 실패에 미련이 없었다.
설령 가짜 마검이라고 판명했어도, 몇몇 이들은 여전히 그 존재 여부를 의심하고 있을 터.
그거면 됐다.
“근데 릴림, 너 밀리샤한테 편지 보냈어?”
“보냈어요.”
“그래, 자주자주 연락 주고받아.”
“제가, 요?”
“그럼 네가 하지 누가 해?”
“그으, 도련님은요?”
“…….”
유리는 구태여 입을 다물었다.
무슨 뜻인지 안다만, 솔직히 무소식이 서로에겐 희소식이다.
애초에 밀리샤가 보낸 편지는 사사로운 이야기보다 교국 내에서 나온 조사내용만 언급했다.
‘성기사가 자신의 십자가를 준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보통 십자가를 누군가에게 선물 할 땐 상대가 소중하다는 뜻도 되지만, 멀리 가는 사람의 안녕을 기원하기도 했다.
언젠가 다시 만난 날을 꿈꾸며 그때까지 우리 서로 잘 지내자고.
‘릴림한테는 절대 안 보여줘야지. 그랬다간 온갖 호들갑을 떨겠어.’
교국 일은 이렇게 마무리 짓기로 했다.
가문에도 보고를 했더니 별 반응이 안 돌아왔다.
미앵비슈만 ‘잘 했다’ 정도로 칭찬해줬다.
그럴 수밖에.
지금 가문은 유리 때문에 곤혹 아닌 곤혹을 치렀다.
방 한 구석에 버려지듯 쌓인 또 다른 편지 더미가 그 일환이었다.
“저거 다 읽어야 하나.”
유리는 질리는 얼굴로 편지들을 째려봤다.
“아뇨, 전부, 태워도 돼요.”
나른한 표정의 릴림은 아예 편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일전에 듣기론 유리가 없는 동안 몇 번 읽다가 양이 많아서 그만뒀다고 한다.
편지 내용은 단 하나였다.
유리와 만나고 싶다.
발신인은 각국의 왕족이나 귀족, 부호, 명성 높은 길드장이 많았다.
갑자기 이런 편지들이 오게 된 건 엘라트리오 황녀와 동맹을 맺으면서부터였다.
보기 드물게 용가의 자제가 인간 황실의 유력한 황위 후보와 연결됐으니.
당연히 궁금할 거다.
궁금할 건데…….
유리는 벌떡 일어나서 편지 더미로 다가가 아무 봉투나 집었다.
“그냥 안부만 보내지, 죄다 만나자고 하네.”
“도련님이랑 황녀님이 강하시니까요.”
편지에 적히지 않았을 뿐.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목적은 분명했다.
“어떻게든 연줄을 대보고 싶겠지.”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편지는 상상 못했다.
기껏해야 유리는 용가의 서자이고 인간이었으니까.
가문 내에서 입지가 아직까지 불안정한 가운데, 밖에서도 그리 볼 줄 알았다.
“엘라트리오 황녀와 동맹을 맺은 게 확실히 주요했다고 봐야 되나.”
어쨌든 편지가 많은 점만 빼고 호재는 호재였다.
다만, 유리는 엘라트리오 황녀처럼 연이 닿아 세력을 기르고픈 마음이 아직 없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결정적으로…….
‘귀찮아.’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유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이었다.
반대로 만날 필요가 없는 사람도 있으니.
편지의 절반 이상은 그런 부류에 속했다.
만나봤자 제 욕심에 잇속만 드러낼 사람들이겠지.
차라리 엘라트리오처럼 차라리 계산적이면서 목적이 분명했다면 거래라도 하겠건만.
“응?”
편지 봉투만 대충 보고 버리길 반복하던 유리의 손이 한 편지에서 멈췄다.
부 라르강테 메데스
발신인을 본 그의 얼굴이 어이없는 미소가 번졌다. 그러다가도 미소는 점차 만족으로 변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이건 제 말하자마자 넝쿨째 굴러온 격이었다.
“릴림. 아무래도 파티를 열어야겠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