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se Who Live Without the Law RAW novel - Chapter 51
51화 같은 목표 (2)
호박색 술이 가득 채워진 잔 두 개가 협탁 위에 올려졌다. 카이루스는 그중 하나를 시미드 캘로그에게 슥 밀어주었다.
“아직은 술 먹는다고 내일 아침에 눈 못 뜰 나이는 아니지?”
카이루스의 말에 시미드는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네 진짜 이름부터 알고 싶은데.”
카이루스도 시미드의 움직임에 맞춰 잔을 들어올리며 대답했다.
“이봐 영감. 당신이 질문을 할 수 있는 분위기라고 생각하는 거야? 상황을 다시 파악해보는 게 어때?”
말로 끝내는 게 아니라, 카이루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는 색유리를 손등으로 툭 건드렸다.
카이루스가 원한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곧바로 시미드 캘로그의 목을 따버릴 수도 있다.
“나는 질문하고, 당신은 대답하고. 이해했나?”
희미한 섬광이 시미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알싸한 감각과 함께 뺨에 상처가 나고, 붉은 피가 주름살을 타고 흘러내린다.
“이해했네.”
잠깐 침묵하고 있던 시미드가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카이루스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의자를 하나 질질 끌고와 시미드 맞은 편에 앉았다.
“반란은 도대체 언제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거야?”
“뻔하지 않겠나. 돈을 빼돌리기 시작한 시점부터지.”
시미드의 말에 카이루스가 아차, 하는 소리를 내더니 곧장 시미드의 손을 잡아끌고, 손등을 색유리로 찔렀다.
색유리의 칼끝이 시미드의 손등과 협닥을 꼬치처럼 꿰뚫었다.
“웃자고 한 질문이 아니었어. 지금은 찔렀지만, 한 번만 더 개수작 부리면 그때는 손목이 잘린다.”
지금 시미드의 손등에 생긴 상처는 뼈 사이를 찌르고 들어갔기 때문에 조치를 잘 취하면 금방 회복할 수 있다.
“….”
조금의 고민도 없는 일격이었다. 비로소 그때서야 시미드 캘로그는 지금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어린놈이….
새파랗게 어린 나이에 헤까닥 돌아버린 새끼라는 걸 인지했다.
멀쩡한 손에 구멍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평정심을 유지 할 수 있는 것은 그동안 시미드가 쌓아온 연륜 덕분이었다.
“살려줘서 아군인 줄 알았더니.”
“될 수도 있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카이루스는 협탁에 걸터앉은 채 시미드를 응시했다.
“이제 질문에 대답해. 언제부터 준비했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추궁에 가깝다. 하지만 시미드로서는 저 질문인지 추궁인지 모를 것에 성실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5년은 된 것 같군.”
카이루스는 그 대답을 듣고 작게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시미드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당장으로서는 알 방법이 없다.
사실 그런 것보다 더욱 카이루스의 마음에 걸리는 요소가 있다.
‘장미정원을 비롯한, 베넷 시의 위원회.’
발로른 제국 내에서 반란 모의가 꾸며지고 있다는 사실을, 과연 그들이 좋아할까?
좋아할 이유가 없다. 그들이 원하는 건 베넷 시의 존속이다. 발로른 제국과 아이란 공화국 간의 힘의 균형이 깨질 가능성이 있는 어떠한 사태도 반기지 않을 거다.
‘방해를 하면 하지….’
베넷 시의 조직들이 시미드 캘로그의 반란을 돕지는 않을 것 같다. 아마, 일단은 방치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이루스 또한 이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기 힘든 상황인 거다.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어차피 카이루스도 황제 목을 따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5년 전부터 같은 목적을 가진 계획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실, 동참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동안 시미드 캘로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민하던 카이루스가 입을 열었다.
“나를 고용한 의뢰인은 네가 털어먹은 세금이 어디로 가는지 궁금해하더군.”
카이루스의 말에 시미드 캘로그가 잠깐 움찔했다.
“그런가?”
“설마하니 이런 상황에 가져다 붙일 핑곗거리 하나 안 만든 건 아니겠지.”
카이루스의 말에 시미드가 어두워져 있던 표정을 약간 밝게 바꿨다. 카이루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먹을 정도로 시미드 캘로그는 바보가 아니다.
“넘어가주겠다는 건가?”
“네가 하는 일에는 관심이 많다고 말했잖아.”
카이루스도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베넷 시의 운용위원회는 무섭다. 지금의 카이루스로서는 그들을 적으로 만들면 감당할 수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개쫄보 새끼처럼 질질 끌려다니라고?’
다른 새끼들에게 코뚜레가 꿰인 채 질질 끌려다닐 생각은 없다. 노동교화소에서 했던 경험으로 충분하다.
카이루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려고 베넷 시까지 굴러들어온 게 아니었다.
“넘어가 줄 생각이지만, 그러려면 나도 의뢰인에게 할 말이 필요해. 적당한 핑계가 없으면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다.”
카이루스가 아무리 황제의 멱을 따고 싶다 해도, 성공 여부가 확실하지도 않은 반란모의 따위로 장미정원과 대놓고 척을 질 생각은 없다.
“만약을 대비해 꾸며두었던 서류는 있다.”
시미드 캘로그의 말에 카이루스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늙으면 현명해진다는 말이 영 개소리는 아니란 말이야.”
시미드 캘로그가 자기 침실의 서랍을 이리저리 뒤지더니 이내 서류 뭉치를 꺼내 카이루스에게 건네주었다.
“이거면 아마 충분할 것 같은데.”
그건 시미드 캘로그의 생각이고, 일단 카이루스는 내용을 천천히 살펴봤다.
“기가 막히네. 확실히 재무청장 자리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지.”
서류만 본다고 가정하면, 이게 위조된 가짜라고 생각하는 건 굉장히 어려울 거다. 적힌 숫자와 근거가 굉장히 깔끔하다.
“서류만 이런 거냐? 아니면.”
“누군가 적혀 있는 것들을 실제로 뒷조사 한다 해도 문제없다네.”
시미드가 진행하고 있는 일은 반란 준비다. 잘못해서 걸리면 그 순간 가문이 박살 난다. 캘로그 가문이 페더윙의 뒤를 잇게 되는 거다.
차이가 있다면 페더윙은 누명이었지만 캘로그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다는 점 정도겠지.
“그나저나 참 간도 크군. 페더윙 병신들이 반란 꾸미다가 남김없이 대가리가 잘려나간 지 몇 년이 지났다고.”
카이루스는 자신의 정체도 숨길 겸, 대놓고 페더윙을 욕하는 뉘앙스로 말했다.
“오히려 그러니 지금이 적기지. 페더윙이 사라지고 고작 6년 지났어. 그전까지 페더윙의 피를 받은 자들은 전부 죽었지만, 페더윙을 따르던 녀석들이 전멸한 건 아니라 이 말이야.”
카이루스는 벽에 기댄 채 이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서 그들을 규합이라도 해볼 생각인가 봐?”
시미드 캘로그가 크흠, 하는 소리를 냈다. 자세한 계획을 카이루스에게 말해주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깐 그를 바라보던 카이루스가 픽 웃고는 만년필을 꺼내 손수건에 뭔가를 적어 시미드 캘로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나랑 연락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 노인이랑 놀아주는 방법은 잘 모르지만… 내가 또 기가 막히게 잘하는 일들이 몇 가지 있거든.”
카이루스가 자기 입으로 어떤 일들을 잘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시미드 캘로그도 카이루스가 잘한다고 하는 일이 뭔지는 이해했다.
“아 추가로.”
카이루스는 그렇게 말하고 손등으로 테이블을 툭툭 쳤다.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할아방탱이는 제국 재무청장이란 말이지. 그에 비해 나는 그냥 남들 부탁 들어주고 그 대가로 밥 벌어먹고 사는 놈이고.”
“…안전은 보장하겠다.”
카이루스가 하고 싶은 말이 뭔지 이해한 시미드 캘로그가 곧바로 말했다. 카이루스는 웃음을 터뜨린 다음 고개를 저었다.
“난 사람 주둥아리에서 나오는 말을 어지간해서는 안 믿는 편이야.”
안전을 보장하는 것은 상대의 약속이 아니라, 담보다.
“인질로 일레나 캘로그를 데려가겠어.”
카이루스의 말에 시미드 캘로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저런 제안을 할 줄 알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뭐어, 안 그래도 그 아가씨에게는 내가 해주기로 한 일이 있잖아. 영감님도 기억하지?”
어떻게 보면 일이 굉장히 잘 풀린 셈이다.
‘일레나 캘로그. 재능은 훌륭하지.’
배틀기어 사용법을 잘못 배워서 몇 초의 타임랙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견습기사가 될 정도의 재능이다.
제대로 된 배틀기어 사용법을 알려주고 좋은 검술을 가르친다면 대성할 거다.
‘일레나 캘로그가 나에게 검을 겨눌 수는 없지.’
페더윙 가문의 배틀기어 사용법을 배운 일레나 캘로그가 카이루스를 적대한다면, 그 순간부터 배틀기어를 쓰지 못하게 된다.
아래에 두고 부려먹을 수 있는 쓸만한 부하 겸 인질이 되는 거다. 물론, 일레나는 이 사실을 모르겠지.
“부탁이 있다. 만약 일레나가 거절한다면….”
카이루스는 시미드가 말을 이어가려고 하는 순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 쳤다.
“인질이 무슨 생각을 하건 내 알 바냐? 영감님, 내가 뭐로 보이세요, 씨발 놈의 보모?”
일레나가 따라오고 싶어하건, 따라오기 싫어하건 카이루스의 알 바가 아니다. 카이루스가 인질이 아니라, 일레나가 인질이니까.
“순순히 따라오면 일레나는 지금 우리가 나눈 거래에 대해 모른 채 나와 동행하겠지. 싫다고 하면 뭐, 상황을 알려주고 강제로 끌고다닐 거다.”
그 과정에서 일레나에게 배틀기어 사용법을 가르쳐 주긴 할 거다. 그건 카이루스가 약속한 일이니까.
“…알았다.”
“내가 일레나의 옆방에서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까먹지는 마라.”
이 저택에 머무르는 동안, 이상한 일이 생기면 그 순간 카이루스는 일레나의 방문을 열어젖히고 그녀의 머리통을 수확할 거다.
“한 가지는 약속하지. 네가 반란에 성공하면 일레나는 자유다. 그리고 네가 만약 실패한다면, 일레나는 살아남을 수 있게 최선을 다해보지.”
어쨌든 일레나와 카이루스는 사제라고 할 수도 있는 관계가 된다. 목숨까지 위험해지는 상황이 아니라면, 스승이 제자를 돌보는 건 당연하다.
“…알았다. 그러도록 하지.”
카이루스의 약속이 지니는 의미를 알 리 없는 시미드 캘로그 입장에서는 공허한 소리로 들리긴 할 것이다.
당연히 카이루스도 시미드가 그의 말을 믿고 있지 않을 거라 여기고 있다.
“좋아. 그럼 남은 파티 즐겁게 보내자고.”
카이루스는 시미드의 어깨를 툭툭 털어준 다음, 가짜 서류를 챙겨 문을 나섰다.
“이거 참.”
시미드는 카이루스가 떠난 다음 작게 한숨을 내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살폈다.
“아직은 모르겠군.”
시미드 캘로그는 제국의 재무청장이다. 당장 카이루스에게 손을 쓸 수는 없지만, 충분히 시간을 들여 그의 인맥과 수완을 발휘한다면 카이루스를 때려잡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
“일레나 같은 경우도 그렇지.”
마찬가지다. 시미드 또한 늘그막에 태어난 외동딸을 각별히 아끼지만, 딸에 대한 사랑을 가문보다 우선할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다.
문제는, 지금 카이루스가 두고 간 연락처와 협조하겠다는 말이다.
이게 지금 시미드 캘로그를 고민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제거하자니 아깝긴 하지.’
오늘 밤 죽음을 맞이할 예정이었던 시미드 캘로그를 살려놓은 게 카이루스다.
원래대로 일레나를 가르치겠다고 하면, 시미드 캘로그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정도다.
‘그래도 살려둘 생각은 없었는데.’
반란이다. 들키는 순간 가문이 사라지게 된다.
본디, 판단의 저울은 아주 아슬아슬하게 카이루스를 죽이는 쪽으로 기울었을 것이다.
“근데 이런 제안을 하다니.”
연락하는 방법과, 적절한 보수를 준비하면 일을 하겠다는 말을 남겼다.
[돈을 충분히 준비하면 요긴하게 부릴 수 있는 실력 있는 자.]바로 그 점이 시미드의 생각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아슬아슬하게 죽이는 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판단의 저울이,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살짝 기울어버린 거다.
시미드 캘로그는 일단 카이루스를 건드리지 않고 방치하기로 결정했다.
일레나가 제대로 된 기사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좋고, 반란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카이루스를 써먹을 곳이 생길지도 모르니 당장 제거하는 것도 아깝다.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아직은 죽이는 게 좋은지 살리는 게 좋은지 모른다. 나중에 더 확실해진 다음에 판단해도 늦지 않는다.
시미드 캘로그는 술잔을 마저 비운 다음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코를 골며 숙면에 빠져들었다.
죽음의 위협을 벗어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바로 눈을 감고 잘 수 있는 이 노인 또한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