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cover Professor at the Academy RAW novel - Chapter 675
675화 뚫는 자, 지키는 자 (3)
알렉스가 나이트 크롤러 기사단과 맞붙기 전.
판토스는 자신이 만들어 낸 폐허의 중심에서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있는 그 모습은 싸움을 앞두기 전에 체력을 비축하려고 한숨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순간 판토스가 닻을 들어 힘차게 뒤를 향해 휘둘렀다.
콰앙!
엄청난 무게의 닻을 휘두르며 생겨난 강렬한 풍압과, 부딪치면서 생기는 커다란 충돌.
판토스를 중심으로 지면의 잔해들이 동심원을 그리듯 바깥으로 밀려났다.
그만큼 판토스가 가한 공격의 위력은 강했다.
하지만 정작 그의 표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얕다.’
소리도 없이 조용하게 기습을 가하던 녀석이었다.
저런 녀석은 놔두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초장에 끝장을 낼 생각으로 휘두른 공격이었는데, 닻을 통해 느껴지는 감각은 생소했다.
마치 쇠공으로 솜털을 맞춘 기분이었다.
판토스의 시선이 기습을 가한 상대방을 향했다.
그 공격을 막아 낸 상대는 뒤로 튕겨 날아갔지만, 지면에 깃털처럼 사뿐하게 착지한 뒤였다.
생긴 것은 어린아이였다.
반쯤 감긴 눈에 더벅머리를 기른 그의 손에는 검 한 자루가 쥐여 있었다.
단검보다는 조금 길고 롱소드보다는 짧은 직검이었다.
무릎을 굽힌 채 몸을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마치 설산에서 먹잇감을 노리는 설표를 보는 착각을 일게 했다.
‘기억에 있는 얼굴이군.’
보통 상대방에 대해서 관심을 잘 두지 않는 판토스였지만, 저 남자는 유난히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럴 것이 상대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지녔다.
라인하르트 킴벨.
제국의 마스터급 기사 중 하나이며 차가운 북부를 지키는 콜드스틸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니까.
판토스의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올라갔다.
입술의 틈새로 새하얀 송곳니가 드러났다.
그 모습을 본 레온하르트는 반개한 눈으로 귀찮다는 티를 팍팍 냈다.
“아. 이래서 선두에 나서는 건 싫었는데. 저건 대체 뭐야. 루터스 단장 말고도 저런 괴물이 세상에 또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라도 했겠냐고.”
게다가 그 괴물이 지금 자신을 보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귀찮은 일에는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레온하르트이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눈앞의 적은, 루터스 워도트를 제외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싸워 온 그 어떤 녀석들보다도 강하다고.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도망칠 수는 없으니까.”
레온하르트는 검을 역수로 쥐었다.
우선은 표면상으로는 성전에 임해야 하기 때문에 그는 글라디우스 아츠까지 챙겨 왔다.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자리에서 훅 꺼지듯 사라졌다.
상대방의 시야를 순간이지만 속여 버리는 움직임.
작은 체구와 날렵한 기동이 가능한 레온하르트이기에 가능한 그만의 기술 중 하나였다.
레온하르트는 판토스의 지척까지 접근했음에도 소리 하나 없었다.
콜드 스틸 기사단장이란 그러했다.
차가운 북부.
1년 중 200일이 넘게 폭설과 혹한이 몰아치는 그곳.
제대로 된 이동 수단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북부에서 국경을 넘어서는 불온분자를 잡아내기 위해서는, 그들은 언제나 두 다리로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레온하르트의 움직임은 바로 그런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완성됐다.
눈밭의 위를 달려도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으며, 오히려 그 위를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모습.
북부 여우보다도 은밀하게 움직이며 창공의 매보다 먼저 먹잇감을 잡아낼 정도로 신속하다.
레온하르트의 손에 쥔 글라디우스 아츠가 판토스의 목을 노렸다.
상대방의 시야를 현혹하고 소리도 없이 들어가는 일격.
오감에는 어떤 것도 감지되지 않기 때문에, 적은 레온하르트의 검에 베이는 순간까지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랬어야 했다.
휘릭!
판토스의 고개가 돌아가며 정확히 레온하르트의 모습을 포착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처음으로 심장이 철렁해지는 걸 느꼈다.
‘내가 오는 걸 알았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이쪽이 어디서 어떻게 올지, 그 정확한 타이밍까지 계산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레온하르트는 급하게 제동을 건 뒤에 빠르게 판토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그러지 않으면 오히려 죽는 것은 자신이 됐으리란 직감 때문이었다.
판토스는 그런 레온하르트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물러남에도 판토스는 따로 추적을 하거나 하지 않았다.
조금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는 것이 전부.
‘하아. 진짜 이건 말이 안 되는데.’
레온하르트는 이마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 전 그는 죽을 뻔했다.
판토스의 목에 검을 박아 넣는 것보다도 먼저 그의 닻이 자신의 상반신을 지워 버렸을 터.
‘오감으로 나를 알아차린 게 아니야. 저 녀석에겐 엄청난 직감이 있어. 그걸로 내가 어디서 어떻게 공격하는지 알아낸 거야.’
레온하르트는 재능으로는 자신도 누군가에게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천성이 게을러서 별로 노력이라는 걸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최연소로 제국의 3대 기사단의 단장이 될 수 있었고, 마스터급 기사가 될 수 있었다.
왜냐면 천재였으니까.
재능이라는 벽에 가로막힌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레온하르트는 처음으로 눈앞에 거대한 벽을 마주한 기분이 들었다.
루터스 워도트도 그에겐 벽이었지만, 그건 굳이 넘어야 할 벽이라곤 느끼지 않았다.
같은 제국의 시민이며 동료였으니까, 특유의 경쟁심 자체가 발동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판토스는 달랐다.
놈은 반드시 타도해야 할 적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죽이고 싶어 하는, 살의를 품은 괴물이기도 했다.
그런 판토스와 마주하여 더는 현실의 벽을 외면할 수 없는 상황에 들이닥친 지금.
레온하르트는 처음으로 자신의 게으름과 안일함에 한탄하게 됐다.
“……진짜, 어쩔 수 없네.”
레온하르트의 반개한 눈이 번쩍 떠졌다.
판토스는 레온하르트의 기세가 바뀐 것을 보고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녀석이 진심으로 싸우려고 한다는 것이 느껴진다.
저릿한 투기가 피부를 찌릿하게 만들었다.
판토스는 이 감각이 좋았다.
어쩌면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지도 모르는 이런 상황에 그저 반갑기만 했다.
왜냐면 이번 사냥을 성공하게 된다면, 그는 또다시 한 걸음 크게 나아갈 테니까.
촤르르르륵.
쇠사슬을 길게 늘어뜨린 판토스는 먼저 선공을 양보했다.
어디 진심이라면 얼마나 대단한지 한번 와 보라는 도발에 레온하르트가 응했다.
푸화악!
레온하르트의 중심으로 오러가 자욱하게 일어났다.
마치 안개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혹은 눈보라처럼 휘몰아치는 것 같기도 했다.
그 오러의 삭풍은 판토스를 향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레온하르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날카로운 결정처럼 흩날리는 눈보라뿐.
저것이 전부 오러였다.
‘오러의 운용도가 차원이 다른 수준이군.’
특이한 체질로 오러 자체에 속성이 담긴 기사가 있다는 것은 들었지만, 레온하르트가 보여준 저건 조금 달랐다.
그저 순수하게 오러를 이용해서 눈보라처럼 보이게끔 만든 것이다.
저것에 닿는 순간 몸이 얼어붙는 대신, 자그마한 결정 형태의 오러에 전신이 갈려 나갈 것이 분명했다.
‘저 기술의 위험한 점은, 저 눈보라가 본체가 아니라는 것.’
진짜는 눈보라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레온하르트였다.
눈보라에 모습을 감춘 그는, 이쪽이 방심하는 순간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낼 터.
레온하르트가 그걸 가능하게 만들어 준 것은 글라디우스 아츠의 도움도 컸다.
솔로 넘버링 시리즈.
[아발란체(avalanche)]결정 형태를 지닌 오러 분사를 도우며 주변으로 넓게 흩뿌리게 해 주는 무기는, 레온하르트를 위해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좋군.”
판토스의 동공이 마치 야수의 그것처럼 세로로 길게 찢어졌다.
후웅. 후웅.
오른손에 쥐어진 쇠사슬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쇠사슬 끝에 달린 닻이 그에 맞춰 풍차처럼 돌아가며 그 형상이 흐릿해졌다.
어느덧 판토스를 중심으로 용오름이 생성되었다.
그 용오름은 결정 형태의 오러를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였다.
그러자 눈 폭풍에 숨어 있던 레온하르트의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는 설마 판토스가 이런 무식한 방법으로 자신의 기술을 파훼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는지 어처구니없는 표정이었다.
“진짜 괴물이잖아.”
판토스는 그 말에 호응하듯 회전하던 닻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촤르르륵!
길게 늘어나는 쇠사슬과 그 끝에 유성추처럼 달린 닻.
정통으로 맞는 순간 뼈와 살이 분리되다 못해, 기사의 단단한 몸통마저도 형체조차 남기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레온하르트는 뒤로 높게 뛰어올라 회피했지만, 판토스는 이번만큼은 그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촤르르륵!
닻이 지면에 비스듬하게 박혔지만, 그 닻을 이어 주는 쇠사슬은 그러지 않았다.
거대한 앵커 체인이 마치 아나콘다처럼 움직이며 뒤로 물러난 레온하르트의 주변을 둘러쌌다.
전후좌우가 막힌 상황에서 레온하르트는 위로 뛰어올랐다.
레온하르트는 뒤늦게 실책이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애초에 일부러 위쪽으로 오르게끔 길을 열어 둔 거였어.’
차라리 앵커 체인의 틈새를 비집고 나갔어야 했지만, 이미 늦었다.
뛰어오른 레온하르트를 노리고 판토스가 작살을 쥐고서 이미 그의 지척까지 접근한 뒤였기 때문이다.
묵빛 작살이 레온하르트의 심장을 꿰뚫으려는 순간.
쏴아아아.
파도 소리가 판토스의 귀를 울렸다.
“파도?”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이것은 파도 소리였다.
해안 절벽에 부딪히는 파도가 높게 치솟는 것처럼, 판토스의 아래에서 푸른 오러가 그를 향해 솟구쳤다.
판토스는 레온하르트를 노리던 작살을 회수한 뒤 자리에서 크게 회전했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함.
수직으로 길게 그어진 작살이 솟구치는 파도를 장작처럼 반으로 쪼개 버렸다.
파도가 좌우로 갈라지며 흩어졌다.
그 덕분에 레온하르트는 무사히 판토스에게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다.
“후후하하하! 레온하르트! 보았나! 이 몸이 너의 목숨을 구해 준걸!”
새롭게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호탕하게 웃었다.
레온하르트는 그를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원래 너랑 내가 함께 기습하기로 했었잖아. 왜 늦게 온 건데.”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
“……어 그래.”
레온하르트는 대꾸할 기력조차 없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판토스는 새롭게 등장한 적을 보며 눈을 희번덕 떴다.
‘다른 3대 기사단장 중 하나이군.’
저 남자도 기억에 있다.
제국의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스텔라 사이렌을 이끄는 기사단장.
요한 오케아스.
생긴 것만 보면 자아도취가 심한 나르시스트였지만, 조금 전 파도 형태의 오러는 판토스에게 생소한 것이었다.
또 한 명의 마스터급의 등장.
판토스는 그 사실에 더 강한 투기를 뿜어냈다.
기쁘다.
기뻐서 견딜 수가 없다.
이렇게나 맛있는 사냥감들이 알아서 나를 찾아와 주다니.
그 투기를 느낀 요한이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레온하르트에게 물었다.
“음. 내가 거구의 수인족에게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나? 나를 보니까 저 수인이 아주 즐거워하는 것 같은데.”
“저거, 보통 미친놈이 아니야. 싸움 자체를 즐기고 있어.”
아니, 놈은 애초에 이걸 싸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사냥이라 생각하지.
마스터급 기사를 사냥감으로 여기다니.
보통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니었지만, 두 사람은 누구도 화를 내거나 하지 않았다.
강자에겐 그럴 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판토스는 자신보다 강하다는걸.
일대일로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는걸.
“테리나는?”
“다른 쪽을 상대하러 간 모양.”
“흐음. 나도 거기로 갈까. 저런 거구의 덩치와 땀내 나는 싸움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 게다가 같이 싸우는 사람도 남정네이기도 하고 말이야.”
“쟤가 보내 줄 거 같아?”
“그래 보이지는 않는군. 후우. 이래서 인기 많은 남자의 숙명이란 슬프단 말이지. 세상 모두가 나를 놓아주지 않으니까.”
“……온다.”
레온하르트는 요한의 헛소리를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실제로 파토스가 닻을 들고서 요한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요한은 판토스의 닻을 보더니 호탕하게 웃으며 외쳤다.
“하하! 감히 바다의 사내 앞에서 닻을 무기로 사용한다고?!”
동시에 그의 발아래가 푸른색으로 물들었다.
쏴아아아.
주변에 차오르는 물을 본 판토스가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물?’
발을 움직일 때마다 첨벙이며 튀는 것은 분명 물이었다.
동시에 판토스는 자신의 움직임이 바다에 들어온 것처럼 굼떠졌다는 걸 느꼈다.
‘오러 자체를 물처럼 만들어서 주변 필드에 깔아 놓은 건가.’
판토스의 시선이 요한 오케아스의 손에 쥔 검을 향했다.
파도처럼 물결치듯 구부러진 그의 검이 바닥에 꽂혀 있었고, 검을 통해 푸른 오러가 바닥을 잠식하고 있었다.
솔로 넘버링 글라디우스 아츠.
[토렌트(torrent)]“수인족은 물이 약점이라지?”
요한은 이 싸움에서 상성 상 자신이 유리하다고 확신했다.
물은 어느덧 발목을 넘어 종아리까지 차올랐다.
잔잔하던 수면이 서서히 파도치기 시작했다.
아마 시간이 더 지난다면 이 파도는 거대해져서 배조차 집어삼키는 해일이 될 것이 분명 했다.
요한은 판토스가 겁에 질릴 거라 생각했다.
왜냐면 지금까지 그가 마주하면서 싸웠던 모든 수인족은 같은 반응을 보였으니까.
“엉?”
그러나 요한은 판토스의 표정을 보는 순간 벙찐 소리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지금 그는.
“최고로군.”
누구보다도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