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olcanic Mine RAW novel - Chapter 86
86화
“강남무림에 대해선 생각해 둔 복안이 있나?”
북검회 부회주 조문신의 물음에 좌문공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왜?”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시기?”
조문신이 무슨 소리냐는 얼굴을 했다.
좌문공은 그의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이기에 쓴웃음을 지었다.
남도련이 몰락해 완전히 그 종지부를 찍었으니 강남무림은 무주공산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히 야망을 가진 자라면 크게 떨치고 일어나 세를 규합하고, 세력을 일군 자라면 강남의 문파를 그늘로 불러 포용할 시기로 가늠할 만하다.
“남도련이 해체된 것은 자멸한 것이 아니라 검신에 의해서였습니다. 그것도 반항할 마음도 먹지 못할 만큼 압도적으로 말입니다.”
“나도 아네.”
다 아는 얘기를 뭐 하러 또 꺼내냐는 투였다.
“사람이란 게 원래 함께 뭉쳐 있을 때 안정을 느끼고 과시하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그걸 잃었지요. 강제로 말입니다. 물론 피해를 입은 쪽보다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을 테지만 그들 모두 자존심에 상당한 금이 갔을 겁니다.”
조문신은 그런 것이 무슨 문제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좌문공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시장통의 엿장수가 잡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그날 번 돈까지 다 뺏겼습니다.”
“……?”
“그런데 그 상황에서 다른 엿장수가 와서 술 한잔 사주면서 내 밑으로 들어와라, 라고 하면 좋아하겠습니까?”
“으음.”
그제야 무슨 뜻인지 이해한 것인지 조문신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침음했다.
“그보다는 우리 북검회가 지금 신경 써야 할 곳은 화산파입니다.”
“거긴…….”
뭐라 대꾸하려다 말고 조문신이 이내 ‘끙’ 하는 답답한 소리를 흘렸다.
좌문공은 그런 그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의 심정도 딱 그랬기 때문이다.
“다행으로 검신이 야도와 함께 죽긴 했지만 화산파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조문신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섬서 지역은 종남파에 힘을 실어줬는데 벌써부터 인심이 화산파쪽으로 기우는 분위기더군.”
“섬서가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검신의 신화적인 행적과 장렬하기까지 했던 산화로 강북, 강남을 따지지 않고 온 무림이 화산을 추켜세우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말을 더 보태지 않아서 그렇지, 비매절영 신응담이 천진벽력당을 필두로 해서 문호를 정리해 간 그간의 행적도 널리 알려지면서 검신과는 다른 의미로 명성이 쟁쟁해지고 있었다.
검신이 무림에 널리 알려져 그 위업이 무림을 진동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신응담은 보통의 양민들에게 소문이 퍼지면서 화산파 자체에 인심이 쏠리며 과거의 위상을 회복하고 있었다.
게다가,
“용천장이 움직였습니다.”
“……!”
조문신의 낯빛이 급격히 굳어졌다.
“용천장이 화산파를?”
좌문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천의 여식이 영악하기가 보통이 아니라더니 벌써 사람을 보낸 건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조문신이 그 말에 놀란 듯 눈을 치떴다가 이내 노기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럼 뭔가? 지금 용천장이 대놓고 우리 북검회의 영역 안으로 무리지어 들어왔단 말인가?”
“아닙니다. 행렬은 단출했습니다. 마차를 끄는 이를 제외하고 보좌한 이는 서 총관뿐이라고 합니다.”
“뭣이? 겨우 그 둘? 괘씸한 놈들! 오만하기가 그 아비에 그 딸이고, 그 주인에 그 종놈이로다! 우리 북검회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감히!”
조문신이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턱밑의 수염을 퍼르르 떨었다.
하지만 좌문공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둘이면 더 뭐가 필요하겠습니까? 금강영왕 서귀는 천하십강의 한 명으로 무서울 것이 없는 고수인데다 규중화는 비록 나이는 어려도 제 아비의 재주를 모두 물려받아 천하십강보다 윗줄이라는 평이 자자하지 않습니까?”
사실이었다.
용천장의 규중화가 한천이 직접 고안하고 제작했다는 용천십벽과 중천관을 모두 돌파했다는 사실은 이미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지 오래다.
“그럼 어쩌자는 겐가? 이대로 안마당에서 눈 빤히 뜨고 화산파가 남의 손에 넘어가는 꼴을 지켜보자는 겐가?”
“일단은 지켜보도록 하지요. 충돌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같은 정파라 명분도 없을뿐더러, 설혹 규중화와 금강영왕을 상대해봤자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꼴입니다.”
“으흠!”
조문신은 좌문공의 소극적인 방안이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헛기침을 터뜨렸다.
“검신이 죽어도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구만. 용천장의 주인이 직접 걸음할 위세라니. 허어?”
“그것도 이제 다 끝입니다. 지금쯤이면 화산파도 아주 골치가 아플 정도로 처신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그럴까?”
좌문공이 생각할 것 뭐 있느냐는 듯 피식 웃었다.
“우리 쪽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둘입니다. 검신도 죽은 마당에 규중화가 아니라 천하십강의 금강영왕이라도 감당할 사람이 화산에 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
조문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
“이놈은 그냥 놔둬.”
염호의 말에 장문인 진무를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연산홍이 머물 도관 하나를 물색해 임시 거처를 마련해 준 뒤, 야도보고 지키라더니 서귀 쪽은 신경도 안 썼다.
지목당한 당사자인 서귀의 얼굴에 당혹스런 감정이 묻어나왔다.
염호가 만사 귀찮다는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어딜 쏘다니고 자든 알아서 하라고 그래. 밥은 굶기지 않을 테니까.”
염호의 말에 연산홍과 서귀를 제외하곤 모두가 멀뚱멀뚱 서귀를 쳐다봤다.
서귀는 기가 막혔다.
분명 강제로 힘에 굴복당해 엄연히 포로로 사로잡힌 몸이 아닌가?
그런데 몸을 구속하기는커녕 지키거나 감시자도 붙이지 않고, 마음대로 하고 다니라니?
명색이 용천장의 총관이란 신분으로 요인 중의 요인이며, 개인적으로는 그래도 천하십강의 한 명으로서 무림에서 사회적 지위와 위치가 있는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태도와 말투라니.
서귀는 이상한 이유로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염호를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내가 이대로 화산파를 빠져나가면 어떻게 할…….”
“가봐.”
“……!”
염호가 관심도 없다는 듯 턱짓했다.
“가라고. 난 이 지지배가 있으니까.”
“…….”
이번에 다들 연산홍을 쳐다봤다.
서귀가 이를 갈아붙이며 다시 쏘아붙였다.
“내가 화산파의 장로 중 하나를 인질로…”
“해! 내 옆에 장문인도 있구만 뭘?”
“……!”
“누굴 인질로 잡든 맘대로 하라고. 난 이 지지배가 있으니까.”
“…….”
서귀는 십이지장이 부글부글 끓다 못해 모조리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무슨 짓을 하고, 뭘 하든 자기한테는 연산홍이 있다는 말.
진무와 동행한 일부 장로는 염호의 뜻을 알아차리고 탄복해 고개를 끄덕거렸다.
나이가 어려 철없이 막무가내 짓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만히 보면 뭐든지 핵심을 찌르며 상대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수단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용천장의 위세를 빌어 위협한 연산홍을 무력화하기 위해 그녀를 볼모로 사로잡은 결단력도 그러했고, 그런 연산홍을 붙잡아 두고 금강영왕 서귀까지 꼼짝 못하게 만드는 수완까지.
미리 계획한 것이 아니라면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이 보통이 아니었다.
‘허? 어찌 저 어린 나이에?’
‘대담하면서 치밀하기까지!’
‘정말 무서운 혜안을 지니셨구나!’
‘대단하다! 태사조께서 괴물을 키우셨구나!’
연산홍이 서귀를 향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이상 무엇도 취하지 말라는 뜻.
그걸 본 서귀는 한편 죄스러우면서도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내 저놈의 웃는 낯짝을 언젠가는!’
이를 갈아붙였지만 서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무력하게 연산홍을 향해 고개를 숙여 보인 뒤 내쫓기듯 물러나는 것을 빼고는.
연산홍도 마찬가지였다.
“뭐? 안아서 들여보내 줘?”
염호의 말에 대꾸할 가치도 못 느낀 연산홍은 아무런 시도도 응대도 하지 않고 제 발로 순순히 머물 처소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계집애! 확실히 성깔은 좀 있네.’
염호가 그런 연산홍을 보며 히죽 웃었다.
***
탁자를 앞에 두고 앉은 연산홍은 문으로 비치는 그림자를 응시했다.
아직도 뇌리에 남은 선명한 기억.
일도에 산허리를 양단하며 산사태를 불러온 무서운 실력자.
그녀가 알기로 도를 쓰는 자 중에 그만한 실력과 기세를 가진 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지.’
연산홍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가 추정하는 도에 관한 일인자는 이미 이승에 머무는 자가 아니었다.
검신 한호와 함께 싸우다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공멸했으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을까?’
연산홍은 마치 귀신에라도 홀린 느낌이었다.
염호의 얼굴을 떠올린 그녀가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산홍아. 너를 믿는다.
오래전 실종된 아비의 목소리가 곁에서 얘기하듯 뇌리에서 메아리쳤다.
외롭고 힘에 부칠 때마다 반복돼 오던 버릇의 일종이었다.
연산홍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던 아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산홍아. 내 슬하에 너 하나뿐이지만 아비는 네가 있어 용천장을 비울 때에도 단 한 번도 근심을 품은 적이 없다. 아비는 너를 그토록 믿는다.’
하나뿐인 딸이었기에 천하경영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연경산은 연산홍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연산홍은 유독 하나의 기억만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곱씹었다.
‘산홍아, 정파의 기둥인 구파일방과 전통의 무림세가들이 무림맹을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것은 그들 안에 인물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인물은 오히려 차고 넘쳤다.’
바로 그녀의 아비가 천래궁주 요천의 도전을 받아들여 길을 떠난 실종되기 전 나눈 마지막 대화.
‘하지만 영웅은 있으나 군자는 없었던 것이 문제였단다. 그들은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절제를 몰랐기에 결국 애비의 손에 절단이 나고 뿔뿔이 흩어지고 만 게야.’
묘하게도 연경산은 마치 자신의 미래를 예견한 것인지, 아니면 어떤 조짐을 느낀 것인지 연산홍과 나눈 마지막 대화가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사람을 다스리는 것은 패도가 아니다. 용맹과 힘보다는 인내와 덕을 크게 해 중망이 따르도록 해야 하느니라.’
당장 내일의 일을 근심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나중의 일까지 미리 내다보듯.
마치 유언처럼.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그녀가 떠나는 아비를 보며 그토록 불안해했던 느낌의 정체는.
‘하지만 산홍아. 인내와 덕으로 다스리는 시대는 지금이 아니라 내가 가고 네가 간 뒤의 후세가 될 것이니라.’
절대 잊지 말라는 듯. 이후에도 늘 좌우명으로 삼으라는 듯이 말했다.
‘태평성대를 이루기 위해서 강력한 힘에 의한 질서와 피를 보는 것은 불가피하다. 역대 모든 왕조가 개국 초에 피바람이 부는 패도 일색이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연경산은 처음으로 그녀에게 단호하고도 무서운 말을 내뱉으며 당부하기까지 했다.
‘산홍아. 애비가 하는 말을 꼭 새겨들어야 한다. 중원을 태평성대로 이끄는 데 있어서 절대 남의 힘을 빌려서는 안 된다. 오직 용천의 힘으로, 용천의 이름으로 행하거라. 머리를 숙인 자는 품에 안고 그렇지 않은 자는 싹을 밟고 목을 쳐라. 중간은 없느니라.’
그녀는 아비가 실종된 후, 용천장의 장주 자리에 오르면서 처음부터 철저히 아비의 말을 따랐다.
당황하지도 않았고 갈팡질팡하지도 않았다.
마치 예정돼 있던 운명을 받아들인 것처럼.
그 말을 좇아 처음으로 행한 것이 아비의 실종을 핑계로 분란을 조성하는 내부의 적을 모조리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녀는 혼자가 아니었다. 스승이나 다름없는 서귀가 있었으니까.
적과 적이 될 자를 어찌해야 되는지는 서귀에게도 가르침을 받았지만 아비의 말 또한 잊지 않았다.
‘한 번 양보를 하고 예외를 두면 두 번 세 번은 더욱 쉬워지는 법이니라. 결국은 유야무야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저들처럼 되겠지. 타협은 굴종과 같은 뜻이고 안정은 곧 썩었다는 뜻이다.’
언제나 그 부분에 대해서 연경산은 단호했다.
용천장이 정파의 거대한 축이고 연경산이 불성과 취성의 공동제자로 소림사와 개방의 지원이 있음에도 많은 유수의 정파 진영으로부터 비판과 불화하게 된 원인이라 할 수 있는 기조였다.
‘멀지 않았다. 오래도록 지리하던 싸움이 끝나는 것도. 사파는 지리멸렬이고, 마교는 그 맥이 끊겼다. 이제 중원에 진정한 태평성대를 가져다줄 수 있는 곳은 오로지 우리 용천장 뿐이다.’
연산홍은 아비의 말을 한 자 한 자 곱씹으며 피가 나도록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가 해낼 것입니다. 어디에 계시든 살아만 계세요. 지켜보세요. 지켜보실 수 없는 상황이거든 듣기라도 하세요. 반드시! 반드시 제 손으로 용천장만이 유일한 질서인 세상을 이룰 것입니다. 반드시.’
그녀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지금 처한 어려운 상황에 꺾이지 않겠다는 듯. 힘들지 않다는 듯.
몇 번이고 같은 기억을 반복해 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