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thless Regression RAW - chapter (137)
광천마는 처음 타보는 기차에 흠뻑 빠진 모양이었다. 아침이 되었을 때, 이성민은 중앙 광장으로 가겠다고 하였고 광천마는 다시 기차를 타러 가겠다고 말했다. 평소에는 이성민과 함께 다니던 루비아였지만, 오늘만큼은 광천마와 함께 가기로 했다.
“좋은 시간 보내세요.”
키득키득 웃던 루비아가 놀리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이성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광천마를 끌고서 여관을 나가 버렸다.
[너 지금 떨고 있냐?]놀리는 것은 루비아 뿐만이 아니었다. 광천마는 제대로 된 사정을 모르지만, 루비아와 허주는 이성민이 던전에서 위지호연을 만났을 때를 기억하고 있다. 이성민은 허주의 놀림을 무시했다. 하지만 떨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어제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마음이 편안했는데, 위지호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이 가까워지니 심장이 말을 듣지 않고 쿵쾅거리며 뛴다.
[첫사랑에 빠진 꼬마 같군!]“그런 것 아니야.”
허주의 말에 이성민은 참지 않고 주먹을 들어 마갑을 두드렸다.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마갑이 떨린다. 하지만 허주는 멈추지 않고 껄껄 웃었다.
[그 계집은 너에게 있어서 동경의 대상이었지. 으레 그런 법이다. 남녀 간의 동경?은 연심으로 쉽게 바뀌어 버리지. 네놈도 그런 것 아니냐?]“아니야.”
[그렇다면 뭐냐. 단순한 동경이냐? 네놈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는데. 그것도 동경 때문이냐?]“좀 닥쳐.”
[반응이 귀엽군. 아주 신선해.]결국 참지 못한 이성민은 마갑을 벗었다. 그리고는 머뭇거림없이 마굿간으로 갔다. 수북히 쌓인 말똥 위에 마갑을 집어 던지려 하자, 허주가 기겁하며 외쳤다.
[미안,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더 안 그럴 테니까 하지 마!]“한 번만 더 개소리를 한다면 말똥에 사흘 동안 처박아 둘 테다.”
“네 개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말똥냄새 맡는 것이 나아.”
[그래, 알았다. 닥치고 있을 테니까 하지 마!]허주가 애걸복걸하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이성민은 다시 마갑을 입었다. 남쪽에서 악몽처럼 군림했다는 대요괴인 주제에 말똥에 처박히는 것은 싫은 모양이었다.
시간을 확인한다. 10년 전에 약속했던 시간은 분수대에서의 정오다. 아직 시간은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고, 이 여관에서 광장의 분수대는 아무리 느긋하게 걸어 봐야 1시간이면 도착한다. 이르기는 했지만, 이성민은 여관을 나왔다.
서두르지 않았다. 이성민은 천천히 광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3월의 루베스는 봄이었다. 바람은 차지 않았고, 햇살은 뜨겁지 않았다. 걷기 좋은 날이었다. 광장까지 향하는 길에는 많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군데 군데 꽃을 파는 상인들이 있었다.
꽃이라도 살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이성민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내뱉었다. 꽃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고개를 흔드는 와중에도 이성민의 눈은 꽃집에서 파는 꽃다발들을 보고 있었다. 이성민은 더 이상 그쪽을 보지 않고 아예 머리를 돌려버렸다.
위지호연에게 품은 감정은 동경이다. 그리고 우정이다. 10년 전부터 그랬고,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 이상은 바라지 않는다. 애초에 그럴 계기라는 것도 없다. 떠나기 전에 위지호연이 장난처럼 했던 말들. 1년 전에 만났을 때 풍유환이 어쩌고 하던 말들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친구 사이에 나누는 가벼운 농담거리일 뿐이다.
과연 그럴까?
슬쩍 드는 의문은 허주의 질문이 아니었다. 미쳤군. 이성민은 헛웃음을 흘리면서 관자놀이를꾹 눌렀다. 밤중에 꾸었던 개꿈이 떠오른다. 위지호연과 만나는 꿈. 단순히 만나기만 한 꿈이 아니다.
“주책 맞게.”
이성민은 자신의 뺨을 철썩 두드렸다. 생각해 보면 전생에서는 여자를 참 많이 안았다. 만난 것이 아니라 안은 것이다. 급수 낮은 용병의 푼돈을 노리는 창녀는 얼마든지 있었다. 전생과 비교하자면 지금의 이성민은 굉장히
건전한 삶을 살고 있었다. 술도 잘 안 마시고, 여자는 한 번도 안지 않았다. 딱히 그럴 욕구도 들지 않았다. 여자를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다.
하지 않았다. 그럴 생각도, 욕구도 들지 않았다.
서두르지 않고 걸었으나 광장은 너무 가까웠다. 광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노점이 많았고, 어린 아이와 연인들이 많았다. 한가로이 햇살을 쬐는 노인들도 많았다. 여유로운 일상을 즐기러 나온 이들이었고, 그 중에서 무복이나 갑옷을 입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직 이성민만이 갑옷을 입었다.
더 괜찮은 옷을 입을 것을 그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니, 옷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오늘은 참 많이 웃는구나. 그런 생각도 했다. 의식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웃음이 나온다. 걸음은 보법을 펼칠 때보다 가벼웠고, 여유를 가장한 마
음은 사실 굉장히 급했다. 어쩌면 위지호연이 이미 와있을 지도 모른다. 이성민의 걸음이 빨라졌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먼저 인사 먼저. 그리고는 근황을 물을까. 1년 전에 만났을 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나를 목적으로 삼아라.
위지호연이 했던 말이다. 그 말에, 이성민은 악에 받쳐 내뱉었었다. 10년 뒤에 만나게 되었을 때 네 가슴을 꿰뚫을 정도로 강해지겠노라고. 그 말에 위지호연은 웃음을 터트리며 친구끼리 그래서는 안 된다고 했었다.
그래. 친구다.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성민은 위지호연의 등을 쫓았다. 위지호연의 존재는 너무 멀고 너무 커서, 10년 동안 쉼없이 달렸음에도 아직도 자신이 없다. 그것조차 좋다. 위지호연이 멀면 멀수록 가까이 가기 위해 달릴 수 있다. 1년 전에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으나, 오늘에는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위지호연은 어디에 있는지. 동등해졌을까? 바라지 않는다. 욕심이다.
‘나는 너에게 부끄럽지 않게 되었을까.’
하지만 이것은 바라였고, 욕심이 났다. 인정받고 싶었다. 칭찬을 듣고 싶었다. 격려를 듣고 싶었다. 위지호연은 언제나 솔직하게 말하곤 했다. 너는 재능이 없다고, 멍청하다고. 그런 말에 내심 상처를 받으면서도 인정받고자 발악했었다. 그런 위지호연이 인정해 준다면.
그것으로 끝일까?
분수대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솟구친다. 높이 솟구친 물줄기는 무지개를 만들었다. 마법인지 색소인지 모르겠지만 물줄기는 제각각 색이 달랐다. 아름다웠다. 분수대의 중앙에는 많은 사람들이 휴식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성민은 머리를 돌려 시계를 찾았다. 높은 기둥에 시계가 있었다. 이제 11시. 고작해야 11시.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다. 이성민은 분수대에서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의 떨림을 즐기며 눈을 감는다. 앞으로 1시간. 위지호연이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 1년 전에 만났을 적에도 오늘을 기약하지 않았나. 그러니 그녀는 온다. 그것에 대해 의심은 없다.
재잘거리는 소리가 바뀐다. 몇 번이나 바뀐다. 분수대는 몇 번이나 물을 뿜었다. 그럴 때마다 이성민은 머리를 돌려 시간을 확인했다. 12시가 되었을 때. 이성민은 벤치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분수대를 빙 돌았다. 워낙 넓은 곳이니까 위지호연이 다른 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없다. 없다… 조금 늦을 수도 있지. 당장 이성민만 하더라도 바로 어제 아슬하게 도착하지 않았나. 이성민은 쉬지 않고 분수대를 돌아다니면서 시계를 흘겨 보았다.
1시가 되었고, 2시가 되었다. …날짜를 착각했나?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오늘이 대체 며칠이냐고.
“3월 14일이지요.”
착각하지 않았다. 늦어지는 것일까…? 계속해서 기다리면 올 것이다. 그럼에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 속에 남는다. 이성민은 머뭇거리다가 네블을 불렀다.
“예.”
네블이 몸을 일으켰다. 이성민은 급히 물었다.
“위지호연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네블이 꾸벅 머리를 숙이고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성민은 초조하게 네블이 다시 오는 것을 기다렸다. 10분도 채 흐르지 않아 네블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소천마 위지호연이라면 지금 루베스에 와 있습니다.]“…예? 위지호연이 루베스에 있다고요? 대체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게… 지금 남쪽 성문에서 철갑신창과 격돌하고 있습니다만.]“뭐라고요?”
그 말을 듣고서 이성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철갑신창 유호정. 바로 어젯밤에 이성민과 여관에서 만났던 인물이다. 왜 그가 위지호연과 격돌하고 있다는 것인가?
[상황이 이상하군요. 소천마의 무위라면 철갑신창 쯤은 손쉽게 상대할 수 있을 터인데… 철갑신창이 소천마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말도 안 된다. 유호정이 유명한 창수라는 것은 이성민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호정이 위지호연의 상대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 왜 위지호연이 유호정에게 낭패를 겪고 있다는 건가? 아니, 지금은 그에 대해서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이성민은 앞뒤 보지 않고 경공을 펼쳐 남쪽 성문으로 달려나갔다.
“거리에서 경공은 안 됩니다!”
거리를 순찰하던 경비병들이 이성민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이성민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중앙 광장에서 남쪽 성문까지는 거리가 멀다. 밀집된 건물들과 사람이 많은 거리는 이성민이 마음 놓고 달리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성민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경공을 펼치자 경비병들이 호각을 불었다.
[철도로 가라.]이성민의 으름장에 침묵하고 있던 허주가 입을 열었다.
[기차를 타는 것보다 네가 달리는 것이 빠르겠지만. 뻥 뚫린 철도 위를 달린다면 남쪽 성문까지 빠르게 갈 수 있겠지.]허주의 조언은 이성민에게 도움이 되었다. 이성민은 가까운 기차 역으로 뛰어 가 철책을 넘어 철도 위로 떨어졌다. 정차 되어있던 기차가 커다란 경적을 울렸지만 이성민은 그 말을 무시했다. 멀리서 시끄런 호각소리가 들린다. 경비병들이 내는 경고음이다. 이성민은 그것도 무시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도 위지호연은 유호정에게 낭패를 겪고 있을 것이다. 위지호연에게 어떠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면 그녀가 유호정 따위에게 낭패를 겪을 이유
가 없다.
그러니 가야한다. 이성민은 내공을 가득 끌어올리고 극성으로 경공을 펼쳤다. 경적과 호각 소리가 멀어진다. 이성민은 철도 위를 미친 듯이 달리면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성민이 남쪽 성문 역에 도착하는 것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공을 아끼지 않고 경공을 펼쳤고, 무영탈혼이 워낙에 뛰어난 경공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성민은 호흡도 고르지 않고 철책을 다시 뛰어넘었다.
머지 않아 보이는 성문. 그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저곳이다. 이성민은 눈을 번뜩거리며 그곳으로 달렸다.
“소문만큼 못하군!”
유호정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철갑신창이라는 별호를 상징하듯이 그는 묵직하고 두꺼운 철갑옷으로 전신을 감쌌고 투구까지 썼다. 그런 유호정이 쥔 창은 시커먼 색으로 번들거리는 커다란 랜스였다.
유호정의 앞에서는 위지호연이 창백한 얼굴로 서있었다. 그녀는 제대로 서지 못하여 한 손으로 무릎을 짚고 있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꽉 다문 입술에서는 시커먼 핏줄기가 흐른다. 권존에게 입은 저주는 위지호연으로 하여금 본신의 무위를 펼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내공을 끌어 올릴 때마다 기혈이 뒤틀리고 모은 내공이 흩어진다. 그런 상태에서는 아무리 위지호연이 초절의 고수라고 하여도, 유호정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위지호연이기에 이런 몸으로 유호정을 상대하면서 버티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왜 나를 공격하는 것인지 모르겠군. 나는 아무 사고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호랑이가 상처를 입었다면 사냥해야지.”
유호정이 답했다. 유호정은 위지호연이 정상적인 몸 상태가 아님을 알았다. 그렇기에 싸움을 건 것이다. 위지호연이 이 도시에서 아무런 문제도 벌이지 않았다고 하여도, 소천마 위지호연의 이름은 무림맹 내에서 크게 경계받고 있다.
죽일 수 있을 때 죽여 놓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무림맹에 허락을 듣지 않았지만, 유호정은 이미 무림맹쪽에 전서구를 날려 두었다. 애당초 위지호연과 유호정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크론으로 돌아가기 위해 남쪽 성문에 왔는데, 이곳에서 위지호연을 만나게 된 것뿐이다.
“정의롭지 못하군.”
위지호연이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그 말에 유호정은 안면가리개 너머에서 두 눈을 번뜩 빛냈다.
“사마외도가 정의를 말하지 마라.”
“비꼬는 거야.”
“그것도 이해하지 못할 천치로 보이나?”
유호정은 그렇게 말라면서 발을 들어 땅을 내리 찍었다. 쿠우웅! 커다란 울림이 땅을 뒤흔들고, 위지호연은 버티지 못하고서 주저앉았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유호정을 노려보았다.
“내 행동이 정당하지 않다는 것은 안다. 정의롭지 않다는 것도 알고. 하지만… 소천마 위지호연의 목숨이라면, 편협하고 비겁하게 굴어도 취해 둘 가치는 있지.”
유호정은 그렇게 말하며 성큼거리며 위지호연에게 다가갔다.
“…지금이 몇 시지?”
위지호연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유호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라고?”
“정오는 넘었겠지?”
“뭔 멍청한 말을… 정오는 이미 아까 지났다.”
“그래?”
위지호연은 입술을 타고 흐른 피를 닦으면서 쿡쿡 웃었다.
“약속을 어겨 버렸네.”
유호정은 그 한탄 섞인 말을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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