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t the first day of my life in living alone, a portal opened RAW novel - Chapter 4
4. 연못에서 빛났다
단 하나의 사건이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도 있다. 하루아침에 인생의 항로가 바뀌는 거다.
섬을 상속받은 일이 그랬다. 얼굴도 몰랐던,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이모할머니의 납골당에 수차례 갔다. 수시로 감사하다는 인사를 가슴속으로 외쳤다.
쩌저적!
알 전체에 균열이 가는 순간, 다시 한번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마주하게 되리란 것을 직감했다.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옆으로 손을 뻗어 탁자 위의 등산칼을 쥐었다.
쩌걱!
검은 알이 세로로 갈라졌다.
“어…?”
양옆으로 벌어진 알껍데기 가운데에는 4~5세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이불로 써도 될 것처럼 풍성하고 긴 검은 머리카락은 등을 다 덮을 정도였는데, 빛나는 듯한 하얀 피부에 대비됐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나는 눈만 깜빡거렸다.
마수가 아니었던 건가? 다른 차원에서 온 인간? 알에서 나오다니…. 이건 뭐 혁거세도 아니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특정 차원에서는 알을 낳는 것으로 출산하는 인간 혹은 유사 종족이 있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는 없었지만.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고,
“……안녕?”
인사라도 건넸다.
알에서 나온 아이의 커다랗고 검은 눈동자에 내가 비쳤다. 아이는 말없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미소를 지었다. 입이 큰 편이라 양쪽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동양인 같으면서도 서양인 같기도 한 묘한 외모. 인간이 아닐 수도 있으니 인종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했다.
“말할 수 있어?”
나의 물음에 아이는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겉보기에는 4~5세 정도로 보여도 사실상 갓 태어난 상태.
“대화는 무리겠지.”
한숨을 푹 내쉬는데 아이는 뭐가 재미있는지 생글생글 웃었다.
“이제 어쩐다…….”
머리를 긁적이며 고민하는데, 갑자기 밖이 어두워졌다. 분명히 아침인데.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바다부터 그늘이 다가와 섬 전체를 덮었다. 고개를 들자 일정한 간격으로 결이 있는 구름이 하늘 전체를 가린 채 지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름의 모양이 이상한 걸 깨달았다.
“설마…….”
고래 꼬리가 보였다.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은 하늘혹등고래였다.
작은 개체는 약 15미터에서 큰 개체는 30미터까지가 하늘혹등고래의 크기.
하늘을 덮은 하늘혹등고래는 그 어떤 생물보다 거대했다.
전체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제주도가 하늘을 떠다니는 느낌.
나는 황급히 휴대폰을 들어 올렸지만, 하늘혹등고래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기지 않았다. 강력한 마력 탓이었다.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멀어지는 거대 하늘혹등고래를 바라보던 중,
빠직. 빠지지직.
컨테이너 안쪽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다시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가 무언가를 오독오독 씹어 먹고 있었다.
“뭐, 뭐야? 뭐 먹었…….”
아이는 단풍잎 같은 손으로 검은색 알껍데기 한 조각을 쥐고 있었다.
“……그거 먹어도 되는 거야?”
빠지직.
아이는 대답 대신 알껍데기를 과자처럼 베어 물었다.
역시나 보통 인간은 아닌 듯했다.
두꺼운 알껍데기를 먹는 게 조금 걱정되긴 했지만, 이미 상식의 영역은 한참 벗어난 상태.
“……괜찮으니까 먹겠지.”
얼굴에 웃음기를 잔뜩 머금은 아이가 다가와 내 바지를 잡았다.
“아마 같이 살아야겠지?”
나의 물음에 아이는 대답 대신 손에 쥐고 있던 알껍데기를 입에 넣었다.
빠득, 빠드득.
컨테이너 안에 알껍데기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 * *
빠르고 고단했던 도시에서의 삶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모르는 게 없던 익숙한 곳을 떠나 외딴섬으로 이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연히 더 나은 삶을 기대했다.
상속부터 이사 준비까지 많은 과정들을 거치며 생각할 시간이 많았다. 여러 가지 계획들도 세웠다.
빠득.
거기에 육아는 없었다.
일단 아이에게는 내 반팔 티셔츠를 입혔다. 팔과 허리 부분을 끈으로 살짝 묶으니 그럭저럭 원피스 같았다.
“그게 맛있어?”
나의 물음에 아이는 그저 눈을 마주치며 알껍데기를 씹어 먹었다.
“……나도 조금 먹어볼까.”
새끼손톱 크기의 알껍데기를 집어 들었다. 입에 넣어보지 않아도 확신했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씹을 수 있다는 확신도 들지 않았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동안, 아이는 쉬지 않고 알껍데기를 먹었다. 아마 필수적으로 섭취해야 되는 영양분 같은 거겠지.
나는 알껍데기들을 적당한 크기로 부순 다음 깨끗이 씻어 한곳에 모아뒀다.
“물도 좀 마셔.”
머그컵에 물을 따라서 건네자 아이는 양손으로 받고는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머그컵을 깨물었다.
카득.
깜짝 놀란 나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아냐! 그렇게 먹는 거 아니야!”
다행히 머그컵이 깨지지는 않았다.
“씹는 거 아니야. 다쳐.”
아이는 커다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컵 말고 물을 마시라고.”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내 나는 다른 컵에 물을 따른 다음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 물을 벌컥벌컥 다 마신 나는 빈 잔을 내려놨다.
“자, 봤지? 이렇게.”
아이는 양손으로 들고 있던 머그컵을 입으로 가져갔다.
“아앗.”
반은 마시고, 나머지 반은 다 흘렸다. 기껏 입힌 옷이 다 젖었다. 빈 머그컵을 손에 쥔 아이는 활짝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 옷이야 갈아입으면 되지 뭐.”
옷을 갈아입히는데 머리도 조금 젖은 상태. 워낙 숱이 많고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긴 탓이었다.
나는 타올로 물기를 닦아준 뒤, 고무줄로 머리를 묶어줬다.
“이러면 좀 더 편하겠지?”
아이는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어 보였다.
귀여웠다. 보고만 있어도 미소를 자아냈다.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 왜 많은 사람들이 아이를 가지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귀여운데, 고민도 됐다.
진짜로 같이 살아가야 할지, 아니면 어떻게 할지.
* * *
무엇이든 꼭 필요한 사람에게만 가는 건 아니다. 억만장자가 재미로 산 복권이 1등에 당첨되는 것처럼.
달그락.
아이는 블록놀이를 하듯 알껍데기들을 이리저리 쌓았다. 그러다 작은 조각을 하나씩 집어 먹기도 했고.
점심이 가까워져 오는데, 아직까지 식사도 하지 않았다. 계속 고민했다.
아이의 정체는 알 수 없다. 다른 차원의 인간인지, 이종족인지, 마수인지. 세상에 알려지면 연구대상이 되겠지. 무슨 생체실험 같은 걸 하지는 않겠지만, 행복한 삶을 꿈꿀 수 없을 것은 분명했다.
빠직.
아이는 벌써 알껍데기의 절반 이상을 먹었는데, 주기적으로 나를 힐끗 쳐다봤다. 마치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
항상 혼자였던 어렸을 때가 떠올랐다. 누군가가 함께였다면 조금 달랐을까.
“나랑 같이 살래?”
내가 묻자 아이는 활짝 웃어 보이고는 알껍데기를 한 입 깨물었다.
“알았다는 거야?”
말을 알아듣는 건지 아이는 대답을 하듯 알껍데기를 한 입 더 먹었다.
“……그래, 같이 살자.”
빠직.
살면서 아이들을 싫어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좋아하지도 않았다. 평생 아이를 키울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인생이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쯤이야 알고 있었지만, 육아를 하게 될 줄이야.
* * *
삼시 세끼 밥을 해 먹는 것도 일이다. 재미있는 일. 인생 즐거움의 반은 먹는 것에 있다고 한다. 살면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적은 손에 꼽는다. 언제나 살기 위해 영양분을 섭취했을 뿐.
섬에 와서는 제대로 끼니를 챙기려고 했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라면으로 대충 때우는데 아이는 곁에 와서 잠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 저기 가서 혼자 놀고 있어. 알껍데기 먹든지.”
아이는 빤히 쳐다볼 뿐.
이내 나는 알껍데기를 쌓는 시늉과 먹는 시늉을 했다.
“아까처럼 놀든지 먹든지 해. 계속 그렇게 보고 있지 말고.”
아이는 방긋 웃어 보이고는 양손으로 알껍데기를 잡더니,
빠직 빠지지직.
수박 먹듯이 먹었다.
의사 표현을 하는 게 분명했다.
한 가지 신경 쓰이는 부분은 지금까지 목소리를 한 번도 내지 않았다.
말이 통한다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괜찮겠지. 교감은 확실히 되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오래 걸려도 알껍데기는 내일이면 다 먹을 듯했다.
“그냥 밥을 줘도 되나…?”
4~5살이면 밥을 먹긴 하지만, 어른과 똑같이 먹을 수는 없다. 사람처럼 먹는다는 법도 없고.
대비를 해야 됐다.
“육지에 다녀와야겠네.”
먹을 것뿐만이 아니었다. 옷, 신발, 비상약, 장난감 등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같이 가야겠지?”
빠직.
아이는 알껍데기를 한 번 씹고는 생긋 웃었다.
* * *
“가자.”
나는 아이를 품에 안고 선착장으로 향했다. 혹시 몰라서 알껍데기를 봉지에 챙겼다. 애한테 이상한 걸 먹인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잘게 부숴서 과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아이는 품에 안긴 채 주위를 둘러보느라 바빴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자 고개를 쭉 빼고 크게 관심을 보였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응?”
아이는 손으로 하늘과 바다를 번갈아 가리켰다.
“비슷하다고?”
나의 물음에 아이가 활짝 웃었다.
짙푸른 하늘과 바다. 저 멀리 시선을 두면 물결 위와 물결 아래가 조금은 모호해 보였다.
“조금 그런 거 같기도 하다.”
요트에 올랐다. 내려놓자마자 아이는 신이 난 듯이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안 돼. 위험해.”
나는 아이를 요트 안쪽에 있게 할 생각이었다.
요트 안쪽에는 대형 소파와 접이식 테이블이 구비됐고, 주방(갤리)도 있으며, 선실에는 넉넉한 침실과 욕실도 있기에 쾌적했다.
육지까지 가는 동안 아이가 침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면 딱이다 싶었다.
하지만 아이는 내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알에서 태어나 처음 본 게 나였기에 부모로 각인된 걸까.
“그럼 여기 얌전히 있어야 돼.”
운전석 옆 의자에 아이를 앉혔다.
아이는 도자기처럼 새하얗고 고른 치아를 드러내며 웃어 보이고는 알껍데기 한 조각을 오물거렸다.
* * *
앞으로 한 달은 육지에 갈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는 김에 깜빡했던 것들도 구비하면 될 듯했다.
아이는 운전석 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긴 했지만, 비교적 얌전하게 있었다.
갑자기 딸이 생겼다.
키우기로 결심한 이상 딸이다.
갑자기 섬이 생길 줄도 몰랐고, 요트가 생길 줄도 몰랐는데, 딸이 생긴 게 가장 놀랍다.
“이름을 지어야겠구나 참.”
아이는 이해가 안 되는지 눈을 깜빡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난히 눈이 반짝거렸다. 하얀 피부도 묘하게 빛을 머금은 듯했고.
첫 만남은 검은 알에 들어 있을 때였다.
“검게 빛났으니까…….”
검을 현(玄)에 빛날 율(燏).
“현율이?”
뭔가 마음에 쏙 들지 않았다. 아이의 반응도 시큰둥했고.
“율 자는 괜찮은 거 같은데, 현 자가 안 어울리는 거 같네.”
아이와의 첫 만남을 다시 곱씹었다.
검은 알이 연못에 퐁당 떨어졌을 때가 떠올랐다.
연못 지(池)에 빛날 율(燏).
“지율이?”
아이는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알껍데기를 씹었다.
“이제부터 네 이름은 지율이야. 김지율.”
나는 혼자 뿌듯해했다.
“작명소 차려도 되겠네.”
지율이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눈을 보고 있자니 이름을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뭔가 바라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뭐라고 부르냐고?”
이상하게 눈빛만 봐도 말이 통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했다.
“아빠라고 불러. 아빠라고. 넌 내 딸이니까.”
지율이는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말을 못 하지 참. 내 이름은 김토일이고, 지율이한테는 아빠야.”
괜히 멋쩍어서 웃는 순간,
“빠아?”
지율이가 목소리를 냈다.
“어?”
감격과 놀라움에 고개를 돌렸고,
“빠아아?”
지율이가 다시 또랑또랑한 목소리를 냈다. 목소리에 물방울이 맺힌 것 같았다. 내 눈에도 물방울이 들어온 느낌이었다.
귀촌 첫날 차원문이 생겼다 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