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ra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73
“위하여-”
쨘- 하고 소줏잔이 부딪히는 맑은 소리가 난다.
은근히 술을 잘 먹는 세련이 잔을 한 번에 꺾어 목구멍으로 넘긴다.
“캬…죽인다.”
어울리지 않는 걸걸한 목소리로 세련이 탄성을 냈고, 유명은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누나 그런데 흥행에 관심이 있긴 해요? 투자금 회수할 의욕은 별로 안보이는데?”
“무슨 소리! 악착같이 회수해 낼 테다…는 농담이고, 예술영화라 당연히 돈은 꼴아박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그러시네? 대박 영화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투자금 이상은 뽑는 영화로 만들 생각이라고.”
“감독님 배포가 쩌시네요. 쉽지 않을텐데···”
“그래서 기대하고 있겠다고 했어. 엄청 불타오르시던데.”
“진짜 해내실 수도 있어요.”
“그럼 나도 개런티 달라고 해야지.”
소소한 얘기를 웃으며 주고 받다가, 그녀가 갑작스런 얘기를 했다.
“영화, 재밌더라.”
“재밌죠. 그런데 우리 촬영장 분위기가 유독 좋긴 했어요, 다 그렇지는 않을걸요.”
“영화보러가자.”
“갑자기요?”
“궁금한 게 생겼어. 지금 가자.”
꽂힌 듯 서두르는 그녀에게 유명이 물었다.
“무슨 영화? 보고싶은 영화라도 있어요?”
“아무거나 상관없어. 네가 보고싶은 걸로 보자.”
“음…그러면 ‘가족생활’도 괜찮아요?
강릉 시내의 모 영화관에서 유명이 선택한 영화는 평점 7.1의 영화였다.
코미디와 가족애가 어우러진 장르로, 촬영만 끝나면 유명이 보러가려고 벼르고 있던 영화.
이 영화의 평점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시사회 평 별로라도 윤한성 믿고 보러갔는데 실망입니다.
-연기력으로 유명한 배우 아니었나요. 연기가 퇴보한 것 같네요. 배역과 궁합 때문인지···
115분의 러닝 타임.
혹평이 쏟아졌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유명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과도기구나.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이 바뀌어 있다.
30대 후반의 나이, 이미 인지도를 탄탄히 쌓은 기성배우가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다시 걷는 방식을 배우고 있는 모습은, 정말로 멋졌다.
‘정말 멋진 사람들이 많구나.’
스크린 안의 한성을 바라보는 세련을 바라보며, 유명은 자신의 행운을 실감했다.
낭떠러지 길을 홀로 걸어가는 듯 위태로웠던 전생에 비해, 1년만에 좋은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났다.
앞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길을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똑바로 걸어가는 사람들.
자신도 그들을 닮고 싶었다.
*
“역시, 영화가 아니었어.”
“네?”
영화를 보고, 저녁 겸 술을 한 잔 하자며 들어온 자리에서, 세련이 앞뒤없는 말을 뱉었다.
“이번에 영화 찍으면서 생각보다 재밌는 거야. 그래서 혹시 이런 쪽에도 관심이 있었나 생각했는데···’발레’’영화’라서였을 뿐이었네.”
알고있는 사실을 확인하듯이, 그녀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난 역시, 발레가 아니면 안되나봐.”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듯한 강인함으로.
유명이 이해하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어떤 예술을 선택한 자가 아니라, 예술에게 선택당한 자들의 공감일지도 몰랐다.
“재활…시작하게요?”
이미 시작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유명은 모르는 척 물었다.
“15년은 자신없고…일단 2년은 해보려고. 어차피 은퇴하고 2년은 헛살았으니까.”
갸웃 기울어진 머리에 긴 머리카락이 한쪽으로 쓸려내려온다. 그녀가 장난치듯 비뚜름하게 웃는다.
“난 예쁘고 먹고 살 걱정도 없으니까, 그 정도는 낭비해도 괜찮지 않을까?”
거만한 말투를 지어뱉고 있으면서도, 쥐고 있는 술잔의 표면은 일렁일렁 파도치고 있다.
손이 떨린다.
겨우겨우 말로 꺼내어 보이는, 앞으로의 고통에 대한 결심.
그 말이 밉지 않다.
춤을 출 수 있다면 예쁜 얼굴도 좋은 집안도 미련없이 버릴 수 있을 그녀를 알기에.
“누나는 내 첫 파트너에요.”
“…응.”
“내가 멋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구요.”
“…”
“그 두 존재가 같은 사람이라는 게, 저는 무척 자랑스러워요.”
자신의 농담에 돌아오는 진지한 말에, 그녀가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 눈에 가득배인 진심.
그녀가 웃는다.
“방금 그 말 때문에 1년 늘어났다. 3년.”
“..하하.”
한 잔.
두 잔.
술이 들어간다.
그들의 이야기는 촬영장 뒷이야기로,
“촬영감독님이 감독님한테 존댓말 쓰실 때마다, 감독님 움찔 놀라시는 거 웃기지 않아요?”
영화의 해석에 관한 이야기로,
“화란은 내 안의 어둠과 같아. 내가 죽을만큼 원하는 기회를 가벼이 여기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마음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겠지만…이미 화란의 방식으론 영화에서 한 번 살아봤으니까, 이제 내 방식대로 살아보려고.”
밤과 술이 더해질수록 솔직해져 갔다.
그리고···
“유명아, 고마워.”
유명이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래 상상했던 팬텀은 절대자이며, 발레 그 자체와도 같은 인물이었어. 나를 선택해주지 않았지만, 그래도 따르는 것을 멈출 수 없는 본질과도 같은 존재.”
“그런데 너는 완벽하지 않은, 화란에게 집착하는 마음은 똑같은 팬텀을 보여주었지. 그 팬텀은…함께 부둥켜안고 위로를 주고받고 싶은 ‘인간’ 팬텀이었어.”
그녀의 목소리가 차분하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나는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홀로 설 거야. 앞으로 오랜 기간동안,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매달리지 않고, 오직 내 시간과 노력만을 믿으면서 강하게.”
하지만, 여린 손이 유명의 옷깃을 움켜쥔다.
덜덜 떨리는 손.
“하지만 마지막 밤만은…나의 팬텀과…함께 있고 싶어.”
“…나랑…오늘…같이 있을래?”
결국 끝에는 떨리고 마는 목소리.
유명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쥔 그 손을 살며시 떼어내어 손에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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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는 작품
다음날 아침,
커피 한 잔을 손에 들고 바닷가를 걸었다.
그들은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놓지 않은 두 손과 가끔 마주치는 시선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쨍하니 맑은 날, 아침바다가 짙푸렀다.
서울에 돌아온 후, 세련은 유명을 수원 집에 내려주었다.
“내가 먼저 연락할게.”
“…”
“잘 있어. 다음 작품도 잘 하고.”
“…누나.”
“빨리 가. 또 주저앉고 싶어질 것 같아.”
“…밥 잘 챙겨먹어.”
“너도.”
유명은 차가 떠나갈 때까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이후, 시사회며 기타 업무적인 일들로 그들은 종종 마주치지만,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없었다. 헤어질 무렵에만 몇 초간의 떼기 힘든 시선을 나누며 서로를 응원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몇년이 지나서였다.
*
오랜만에 해가 떠 있을 때 집에 돌아온 유명은 지연의 방에 들렀다.
“또 누워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