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55
055 함무라비의 법(1)
현실 땅따먹기를 하면 이런 느낌이려나.
“와아, 자존심 때문에 제 입으로 이런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지치네요.”
사무실에 쌓인 서류를 보자 샬롯은 이번만은 자기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듯 망연히 앉아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타이터스빌에서부터 클리블랜드까지 펜실베이니아주 동북부 전역을 발에 불이 나도록 움직였다.
일주일 동안 거의 쉬지 못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고생했어요, 샬롯. 그래도 덕분에 유전과 석유회사의 30퍼센트는 우리가 건졌잖아요.”
태선은 그런 샬롯을 사뭇 격려하며 말했다.
그 말처럼 불철주야 움직인 덕분에 유전과 석유회사를 제법 매입했다.
이게 폭력적인 수단까지 동원하는 다니엘 앤더슨과 경쟁해서 얻은 결과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무적이었다.
“그치만 더 매입할 회사도 없는데 이 정도라는 건······.”
샬롯이 몇 개의 책상 위에 쌓여있는 서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만 해도 처리할 일이 많다고 힘들어하는 듯싶더니 이제는 그 반대였다.
“나머지는 전부 그 다니엘 앤더슨 그 사람,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도 아까워요. 그 놈이 가져갔다는 뜻이잖아요.”
설령 자기가 저 서류를 다 처리해야 할지언정 너무 적어서 불만이라는 듯 토로했다.
“너무 분해요. 그래서 다른 생각을 못하겠어요.”
“그래도 저쪽은 많은 인력에 폭력까지 불사했으니 이 정도만 해도 선방했죠.”
“그래도 원랜 다 우리 건데···도저히 안 되겠어요. 가만히 있으니 아쉽다는 생각만 들어요. 우리 바람이라도 쐬고 와요.”
‘시간이···조금 남았군.’
누가 오기로 되어있기라도 했는지 태선은 회중시계를 슬쩍 보고는 일어섰다.
“그러죠. 스완 씨가 오기로 한 시간이 조금 남았으니 모처럼 나갔다 오죠.”
태선은 외투를 입고는 곧 샬롯과 함께 사무실을 나와 잠시 거리를 거닐었다.
슬슬 겨울인지라 날씨는 꽤 쌀쌀했다.
“어때요? 밖으로 나오니 좀 기분이 나아졌어요?”
“음, 아직 모르겠어요. 그냥 걷기만 하지 말고···그래, 태선의 고향에서는 겨울이 어땠는지 이야기해주세요.”
“조선의 겨울이라. 똑같죠. 겨울이니 춥고. 더구나 제가 살던 곳은 특히 추운 곳이었거든요.”
자기가 나오자고 했으면서 추위를 타는 체질인지라 샬롯은 옷깃을 여미면서 물었다.
“어머, 나중에 태선의 고향에 가보고 싶었는데 그럼 겨울은 피해야겠네요.”
“아! 그런데 더 춥기는 해도 그래서인지 난방에 관해서는 더 나았네요.”
“예? 제가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동양은······.”
샬롯이 눈치 보며 조심스레 말하자 태선은 옅게 웃었다.
그녀가 하려는 말을 대충 짐작할 수 있기에 선수 쳐서 먼저 말했다.
“네. 과학이나 문물은 동양이 서양에 많이 배워야 하겠죠. 하지만 동양, 아니 엄밀히는 제 고국인 조선이 겨울 난방에 있어서만큼은 뛰어나거든요.”
“어머, 태선이 이렇게나 자랑하다니 더 궁금해지는데 빨리 말해줘보세요.”
“사실 조선에는 특별한 난방 장치가 있어요.”
태선은 온돌의 원리에 대해 샬롯에게 말해줬다.
“여기서는 벽난로로 난방을 하잖아요. 제 고국에서는 바닥에 돌을 깔고 그걸 데운 열기로 난방을 하거든요.”
“정말요? 그런데 그거 고기 훈제 조리법··· 아닌가요?”
아까 분해서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 못하던 그녀였지만 흠칫 놀란 반응.
적어도 그녀의 관심을 다른 데로 환기시켜주려던 목적은 성공한 것 같자 태선은 미소 띠며 말을 이었다.
“겨울철에 직접 뜨뜻하게 등 지져보면 훈제든 뭐든 됐으니 신경 안 쓰게 될 걸요.”
“음, 그 정도라니···저번에 국밥도 그렇고 태선은 설명만 그럴듯하게 잘해서 제가 궁금하게 만드네요.”
“하하, 국밥 진짜로 해준다니까요. 약속하죠. 이번 문제가 끝나면 국밥 해드릴게요.”
“오, 정말이죠? 방금 시간도 정확하게 말하셨어요. 이번 건 끝나고··· 그럼 뺏긴 유전과 석유회사들 우리가 되찾아온 그 시점으로 잡으면 되죠?”
다만 사기를 북돋워 주기는 했는데 좀 지나쳤던 것일까.
이 정도로 의욕을 내다니. 심지어 자기 입으로 유전과 석유회사들을 빼앗긴 사건을 다시 언급하면서 분해하는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에이, 뭐 어때. 사기가 더 오르면 좋은 거지.’
기왕 약속하는 김에 태선은 선심을 더 써주기로 했다.
“거기에 이건 언제 된다고는 약속 못 하지만 온돌을 겪게 해준다고도 약속하죠.”
“온돌···이요?”
“아, 이름을 말 안 해줬네요. 아까 제가 말한 난방 방식이 온돌이거든요.”
“그게 여기서도 가능해요?”
거기까진 기대 안 했는지 샬롯이 안 그래도 큰 녹색 두 눈동자를 더 동그랗게 떴다.
저런 모습을 보면 괜히 더 놀려주고 싶어지고 싶어지는 것이 인지상정.
“가능하죠. 그리고 기왕 할 거라면 온돌보다···아!”
온돌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태선은 흠칫했다.
온돌에서 발전된 난방기구를 말해주려다 불쑥 생각이 들었다.
‘···일러?!’
이제 마차가 다니는 대로를 건너가려는 참이라 각별히 조심했어야 하건만.
그조차 잠시 잊을 정도로 무언가에 정신이 쏠린 듯했다.
‘오, 그래! 생각해보니 이제 발전기도 만들었고 석유 증류도 되니 보일러도 사업화가 되잖아.’
“왜 그래요, 태선? 눈치가 무언가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의 느낌인데?”
늘 옆에 붙어있다 보니 눈치챘는지 샬롯이 물었다.
마침 온돌의 원리에 대해서 설명해준 터라 태선은 그걸 개량해서 바닥에 튜브를 깔고 물을 데워서 돌리는 보일러 난방을 말해주려고 했다.
“어어, 저 마차 왜 저래?!”
하지만 마침 새로운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른 참이라 정신이 팔린 탓인지.
“거기, 피하세요! 저 미친 마차가 왜 저렇게······.”
태선은 다른 행인의 외침을 듣고서야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마차 한 대가 돌진해오는 것을 봤다.
아무리 도로라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에서는 속도를 좀 늦추어주는 것이 에티켓이었다.
‘멈출 생각이 없어···?’
마차는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오히려 태선과 샬롯을 삼킬 듯 돌진해왔다.
태선은 급히 샬롯을 안으며 옆으로 구르듯 몸 날리는 순간 찰나였지만 스쳐가듯 마부의 표정을 똑똑히 봤다.
‘착각이 아니다. 작정하고 샬롯이랑 나를 치려고 한 거야!’
다만 그 순간은 찰나였고 마차는 그대로 지나가버렸다.
“으흑!”
마음 같아서는 되든 안 되든 마차를 뒤쫓고 싶었으나 샬롯이 신음을 흘렸다.
다행히 둘 다 치명상은 피했으나 자신의 아래 깔린 샬롯의 옷이 찢어지고 거기로 퉁퉁 부어오르는 발목이 보였다.
“괜찮아요, 샬롯? 미안해요, 급히 피하느라.”
“미안하기는요. 태선이 아니었으면 저 마차에 치여서 큰 일이 날뻔···윽!”
말을 하던 중 통증이 더 심해졌는지 샬롯의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방금 전에는 그래도 약간 부어오른 정도라 일어설 수 있을 듯 싶어서 손을 내밀어 일으켜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태선의 손을 잡고도 일어서지 못하고 쓰러진 샬롯의 발목은 눈에 바로 보일 정도로 부어오르고 있었다.
***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하나 불행이라 해야 하나.
천운에 태선의 운동 신경이 더해져 중상을 입는 일은 겨우 피했다.
다만 샬롯은 다리가 부러져 입원해야 했다.
“죄송해요, 태선. 지금 우리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아뇨, 그런 말 말아요. 일단 샬롯은 안정을 취하는 게 다른 뭣보다 급선무입니다.”
···라고 말은 해도 확실히 샬롯이 입원한 게 된 것은 타격이 작지 않았다.
하물며 더 신경 쓰이는 건 마부의 표정과 눈빛.
‘무슨 느와르 영화도 아니고···빌어먹을!’
다만 아무리 그래도 마차로 사람을 치어버릴 생각을 하다니 심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발은 다쳤어도 손은 괜찮잖아요. 죄송하지만 서류를 이쪽으로 가져다주시면······.”
그 와중 샬롯은 일 중독자 아니랄까봐.
나름대로 여기서도 일을 할 방법을 떠올려내고는 말하는데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누구일까요? 의사 선생님이라면 아까 왔다가 갔는데.”
“그러게요. 사람을 보내서 모두에게도 샬롯이 입원했다고 알리긴 했지만 벌써 병문안 왔을 리도 없는데.”
태선은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병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 너머에 서있는 남자는 낯이 익으면서도 누구인지 당장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병문안을 올 정도로 친분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 저···저 사람?!”
다만 샬롯이 그를 알아본 듯 소리쳤다.
“태선, 그 남자예요! 그날 저스틴 씨의 모임에서 다니엘 앤더슨에게 귓속말했던 그 남자요!”
그 말을 듣자 비로소 태선은 얼굴이 떠올랐다.
동시에 마차가 자신들에게 돌진해온 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같은 추측을 샬롯도 했는지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거 절 알아보시는군요. 다쳤다고 들어서 병문안을 와봤습니다만?”
더구나 사실상 초면이나 마찬가지이면서.
아직 잭이나 개리슨이나 지인들도 소식을 보냈을 뿐 아직 병문안을 안 왔거늘.
실실 웃으며 저딴 소리를 내뱉는 건 결코 좋은 의도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역시 다니엘 앤더슨과 한 패로군. 유전과 석유회사는 폭력적으로 빼앗고 이번에는 이따위 협박질을 하려고 찾아오다니.’
일단 이 인간의 면상이 샬롯에게 노출되는 건 좋을 게 없을 터였다.
태선은 밖으로 밀고 나갔다. 놈도 딴에는 육체파인지 몸이 단단해서 버티려 했지만.
태선이 밀어붙이자 조금도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연신 뒷걸음질을 쳤다.
“으윽, 뭐 이런 힘이···컥?!”
거기서 그치지 않고 태선은 그의 멱살을 잡아채 마침 병실 옆의 으슥한 곳으로 밀어붙여 으름장을 놨다.
“혹시나 싶었는데 직접 찾아오다니 배짱이 좋군.”
“하하, 알아서 이런 으슥한 장소를 골라주···컥!”
“죽일 생각이었는데 안 돼서 직접 처리하려고 찾아왔냐? 그렇다면 상대를 잘못 골랐어.”
실실 대는 표정을 유지하는 채로는 제대로 대화가 안 된다.
이런 놈들을 상대로 한다면 자신과 소중한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폭력은 자기네의 전매 특허가 아니란 걸 몸소 깨닫게 해줘야 한다.
“컥···커흑! 이 새끼···컥!”
녀석이 딴에는 반격하려고 했으나 타고난 피지컬에 프로는 아니었어도 21세기의 발전된 격투기를 야간반을 다니며 배운 바 있는 태선이었다.
“커헉···그, 그만!”
힘으로 어쩌지 못하자 놈은 급히 소리쳤다.
태선은 펀치는 더 날리지 않았지만 하박으로 밀어붙여 놈의 목을 옥죄면서 물었다.
아니, 물으려는 순간 은빛이 번뜩였다.
뒤춤으로 갔다가 나온 놈의 손에 어느새 나이프가 들려있자 태선은 더는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했다.
나이프를 찌를 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바짝 붙으며 놈의 사타구니에 니킥을 먹여줬다.
퍼억───!
“꺼윽···꺼으으으······.”
놈이 나이프를 떨어트리고는 죽어가는 소리를 냈다.
하기야 왠지 둘 중 최소한 하나는 터졌을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야 녀석 사정이고 태선은 바닥을 기다시피 하는 녀석을 내려다봤다.
그러며 나이프를 주워들고는 자세를 낮춰 얼굴을 들이밀었다.
“총이 아니라 칼이라. 그래, 정말로 죽이는 게 아니라 협박하려는 목적이라면 칼이 더 효과적이긴 하겠지.”
으르렁거리듯 말하며 태선은 손가락을 놀려 나이프를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태선이 뜻밖에 칼을 잘 다루어내자 놈이 고통에 겨워하면 흠칫했다.
“다니엘 앤더슨이었던가. 네 친구에게도 말했는데 내가 조선에서는 거칠게 살았거든.”
스윽───!
“이런 칼보다 조금 큰 걸로 고기 써는 기술도 좀 배웠는데 그걸 사람한테 쓸 마음을 들지 않게 해주면 좋겠어.”
“···주, 죽일 생각은 없었소. 그냥 협박이나 하려던 거였지.”
“마차도 그랬다고 할 건가? 죽일 생각은 없었고 협박이나 하려던 거다?”
“그, 그렇소.”
녀석이 술술 불었다. 자기 딴에는 변명이라고 댄 것이겠지만 마차 사고도 사주했다고 실토한 셈이었다.
문제는 경찰에 신고한다···이 시대에 그런 걸로 간단히 문제 해결이 될 리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짓거리 벌이는 녀석들에게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은······.
자신들이 직접 보복할 힘이 없으니 경찰에 의존하는 약한 인상을 심어줄 따름.
“네 의도가 뭐든 그건 중요하지가 않아. 중요한 건 너네의 수작질에 내가 위협을 느꼈다는 사실이지.”
말하며 태선은 더욱 바싹 나이프를 놈의 목에 들이밀며 사이코패스처럼 광기에 물든 것처럼 눈을 빛냈다.
외모가 이질적이라는 건 본능적인 거부감을 주기 마련이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태선이 검은머리 동양인이라는 점은 이 나라에서 협박을 할 때는 더 잘 먹히는 경향이 있었다.
하물며 분위기를 살벌하게 조성한 다음인지라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미, 미쳤군! 정말로 죽이기라도 할 셈이오? 살인자가 돼서 당신이 일군 사업이고 뭐고 다 말아먹을······.”
“그걸 왜 네가 걱정하나. 너희들이 이미 내 사업을 잡수려고 수작질을 벌이고 있는데?”
“그···그건···그래도 살인자가 되면 당신한테 좋을 건 하나도 없을 거요.”
“너한테 좋을 건 더 없지. 그리고 이왕 하는 거 다니엘 앤더슨이라는 놈의 멱도 같이 따면 좋을 것 같군.”
처음에는 무슨 악어 눈물도 아니고 살인자 되면 안 된다니 하던 녀석이 씨알도 안 먹히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
“당신 동생! 태경 킴이었나. 동생이···아아악!”
“그다음 말은 신중히 뱉는 게 좋을 거야.”
목에 댄 칼에 힘을 더하며, 태선은 나직이 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