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ack haired oil tycoon RAW novel - Chapter 89
089 율리시스 그랜트(3)
“육군 장군···인가.”
율리시스 그랜트는 벽에 걸어놓은 자신의 군복.
거기 붙은 별 네 개짜리의 어깨끈 휘장을 보며 중얼거렸다.
“장군이라.”
나중에 육군 원수라 불리게 되는 자리.
같은 장성이었던 윌리엄 셔먼이나 필립 셰리던조차 그냥 장성이라 그랜트는 육군에서 대통령 다음이라 할 수 있었다.
“······.”
그럼에도 율리시스 그랜트의 미간 사이 주름을 더 깊어져 근심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전쟁도 끝났고 그 공로로 대통령에게 직접 육군 장군으로 임명까지 받았다.
전후 처리가 남았지만 이 뒤로는 어차피 남부는 패했으므로 자신이 관여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하건만···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그랜트는 뭔가 허전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참으로 무상하구먼. 뭘 해야 한단 말인가.”
물론 할 일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었지만 미국이 남과 북으로 갈려 싸운 전쟁을 걸치며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꼈었다.
“이론과 실전은 달랐지. 뿐만 아니라 조직 체계나 훈련에 있어서도 많은 부분이 달라져야 해.”
그건 분명히 이 나라가 다시 이런 위기를 겪지 않고 더 찬란하게 빛나기 위해서는 누군가 선도할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은 다소 지리한 여정이 될 터였다.
“우습구먼. 피 공포증이 있는 주제에 장군이 돼서는······. 막상 전쟁터를 벗어나서는 다시 그리워하다니.”
그래서인지 그에게 워싱턴에 머무르는 나날들은 마치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다.
똑──똑──똑──!
“장군님, 드레이크입니다.”
거기에 노크하는 부관 드레이크의 목소리.
요즘 들어 대개 저 녀석이 이렇게 부를 때면 누가 만나러 왔다면서 전하곤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정치인들이었다.
전쟁 영웅으로 자신이 등에 업은 큰 인기를 정치에 이용해보려는 것이겠지.
“···내게 나쁜 건 아니야. 궁극적으로 이 나라를 더 부강하고 좋게 만들려면 군대만으로는 어렵고 정치에도 손을 대야 하니.”
그렇지만 그런 마음을 먹고 있으면서도 선뜻 아직 정치를 시작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기야 지금 장군이 돼서 군대를 개선하려는 일조차 미적거리고 있었다.
전쟁터에서는 굳은 뚝심으로 유명한 그랜트였지만 설령 철인이라도 남북 통틀어서 수십만 명이나 죽은 전쟁을 겪은 뒤가 아니겠는가.
···전쟁 도중이었다면 자신을 채찍질했을지라도 이제는 끝났다며 한발 물러선 뒤.
“······.”
지금처럼 허공을 바라보며 멍하니 있을 때가 최근 들어 자주 있었다.
“그랜트 장군님, 저 드레이크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밖에서 부관 드레이크가 노크하면서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데도 그것이 그냥 뇌를 거쳐 흘러가 버리고만 있었다.
아무래도 전쟁터의 포화나 고함치는 소리 따위가 너무 큰 자극이었던지.
주변의 자극이 인지에 닿지 않았다. 마치 아무것도 아닌 세상에 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이 또한 우습군. 전쟁터를 벗어났으면서 난 또 거기 길들여져버린 것인가.”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나···그랜트는 여린 성정의 소유자였다.
전쟁터에서 부하들에게 진군하라고 명령하고 죽어나가는 비명을 들으며 후방에서 펑펑 울었더랬다.
아마 자신의 그런 모습은 전쟁터에서 같이 한 병사들만이 알고 있을 터.
“그리고 살아남은 부하들은 나보다 훨씬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을 테지.”
쾅──쾅──쾅──!
“장군님?! 그랜트 장군님?!”
무슨 일이 생겼으리라고 오해했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격렬해졌다.
드레이크의 목소리가 마치 전쟁터의 고함처럼 높아지자 그제서야 아이러니하게도 그랜트의 귀에 닿았다.
드레이크는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는 문을 열었다.
“장···아, 계셨군요. 어휴, 걱정했습니다.”
“무슨 일인가?”
“오늘 약속을 잡아두셨잖습니까. 이제 곧이라 알려드리려고요.”
“아, 약속··· 혹시 어떤 것이었지? 공화당 의원들과 만남 말하는 겐가?”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정치권에서 들러붙기에 이런 말부터 나올만 했다.
그렇지만 부관 드레이크의 표정을 봐서는 이번에는 아무래도 잘못 짚은 모양이었다.
“오늘 뉴욕에서 온 태선 킴이라는 사업가를 만나기로 약속을 잡으셨습니다.”
“···아아, 그랬었지.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는구먼.”
“호텔 아래층의 카페에서 있습니다만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할까요?”
“아니, 괜찮네. 바로 가지.”
겉옷만 가져와서 걸친 뒤 그랜트는 부관 드레이크의 안내를 따라 호텔을 내려갔다.
‘검은머리 동양인이라 했지.’
내려가면서 그랜트는 얼마 전 자신을 찾아온 한 아가씨를 사뭇 떠올렸다.
샬롯 푸어 로렌스라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별 관심 없었다. 그냥 정치권에서 자신을 홀리려고 보낸 여자라고 생각했지만···알고 보니 아니었다.
‘독립전쟁에서 활약한 녹스 장군님의 후손이었다고 했지. 알아보니 정말로 그랬고···그런 아가씨가 동양인 사업가의 비서로 일하고 있었다니···허허 참.’
다시금 떠올려봐도 너무나 의외인 일이라 그랜트는 속으로 너작게 웃었다.
그리고 푸어 장군님의 후손이라는 걸 알고 특별히 그 아가씨를 만나준 당일도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웃었었다.
‘그 뒤에 반응이 가관이었지.’
겉모습이나 인종만 보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조심스럽지만 따끔하게 일침을 쐈다.
그 당돌한 모습에 그랜트는 오히려 샬롯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다.
‘뭐 그리고 실제로 그 아가씨의 말이 맞지.’
전쟁터에서 그랜트는 분명히 목도했다.
백인이라고 선하고 용맹한 군인이 아니었다. 당연히 총알이 빗겨 가는 것도 아니었다.
흑인이라고 무조건 악하고 게으른 것도 아니었다. 무생물도 아니며 그들도 총알을 맞으면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하며 죽어 나자빠졌다.
그렇지만 같이 싸웠다. 모두 같은 전우였다.
‘나야 전쟁터에서 이를 깨우쳤다 하더라도······. 그 샬롯이라는 아가씨 역시 그만한 감정적인 교류가 있던 건가.’
얼마나 훌륭한 동양인이기에 그러려나.
하물며 사업적으로도 아주 크게 성공하고 있다고 하니 그랜트로서는 궁금해졌다.
그래서 만나기로 한 것이었다.
“오셨군요! 다시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그랜트 장군님.”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먼저 자신을 알아본 샬롯이 일어나며 인사를 건넸다.
“이쪽이 제가 말씀드린 태선 킴 사장님이세요.”
그리고 샬롯의 소개에 옆에 있던 검은머리에 훤칠한 동양인 사내가 입을 열었다.
“만남을 허락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랜트 장군님. 영광입니다. 저는 태선 킴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짤막하게 인사하며 악수를 나눠보니 일부러 힘을 준 건 아닌데 악력이 제법 좋았다.
‘겉옷을 입었는데도 탄탄한 체격이 보이는군. 사업가인데 평소에 단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양이야.’
성품의 단면이 보인다. 저런 몸을 만들고 유지한다면 게으른 성품은 아니었다.
오히려 군인으로 치면 정예병처럼 자기 관리가 철저한 타입.
“일단 앉지.”
아울러 자신이 앉고 나서야 다시 자리에 앉는다.
어쩌면 그가 살던 동양의 관심인지도 모르겠지만 상대를 공경하는 모습이 은연중 나타났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하기야 애초에 그를 소개한 샬롯부터가 호감이 들었었다.
“날 만나자고 했다고. 용건이 무엇인가?”
다만 겉으로는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은 채 자못 엄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율리시스 그랜트가 속으로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아니, 워싱턴에 오며 이런 엄숙한 표정이 아주 잘 먹혀들어 정치권에서 접근해올 때마다 시답잖은 요구 따위는 쳐낼 수 있었지만.
‘이 아저씨···속은 여리면서 엄숙한 연기 잘 하시네.’
지금 눈앞에 있는 동양인 사업가는 그의 숨겨진 몇몇 일화조차 꿰고 있다는 걸.
‘전쟁터에서는 우직하게 돌격하라고 외쳤으면서······. 막상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는 비명을 듣고서는 혼자서 펑펑 울었다지.’
그 외에도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면서 전쟁을 혐오한다거나 자퇴를 고민했다거나 피 공포증이 있다거나.
행진이나 제식 같은 군바리 티 내는 걸 싫어한 반면 문학을 읽는 것을 좋아해서 감수성이 풍부했다거나.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이렇게 됐겠지.’
그리고 이 시대는 아직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는 고사하고 개념조차 없다.
‘전생에 내가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가진 정보들 그리고 샬롯을 통해 이래저래 알아본 정보들을 종합해보면······.’
율리시스 그랜트도 감수성이 많은 성격에 심리적으로 충격이 없을 리 없었다.
물론 동시에 그는 우직한 성품을 가졌으니 이겨낼 것이다.
실제로 그는 몇 년 뒤에 대통령까지 되니 그렇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전쟁이 막 끝난 지금 아직 후유증이 필시 있을 터였다.
‘이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그 부분을 찔러야 한다.’
그걸 위한 몇 가지 전략은 가지고 나왔다.
그중 무엇을 꺼내야 할까? 혹은 어떤 순서로 꺼내고 어떤 것은 숨겨야 할까?
“날 보러 왔다면서? 따로 할 말은 없는 건가? 전쟁 영웅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거면 충분히 봤을 테니 이만 일어나도록 하지.”
아무래도 중요한 자리인지라 고민이 길었다.
“물론 전쟁 영웅의 얼굴을 뵌다면 좋지만 저는 영웅이라 생각하지 않아서요.”
“···?”
자신을 전쟁 영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랜트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는지 멈칫하며 쳐다봤다.
그럴 터였다. 물론 내심으로 전쟁 영웅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도 있기야 하겠지만 이런 말을 면전에서 하겠는가.
“저는 그랜트 장군님 역시 전쟁의 피해자 중 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전쟁의 피해자···다?”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태선의 표정이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심지어 방금 그랜트가 짐짓 일어서려고 했는데도 여전히 그대로 앉아 있는 채···그랜트는 뒤늦게 그걸 알아차리고는 흥미가 돋았는지 도로 앉았다.
“종전 협정에서 로버트 리 장군과 만난 이후 가장 흥미로운 대화가 될 것 같군.”
이야기를 더 해보라는 듯 그랜트가 쳐다봤다.
“전쟁이 끝났고 이제 모두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겁니다. 아니,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요.”
“그렇지. 연방정부에서도 재건사업이니 뭐니 하면서 거창하게 준비하더구만.”
“예, 그리고 실제로 국가 차원에서는 필요한 일이죠. 실제로 그렇게 종전을 선언하고 재건 모드로 이행할 수 있겠죠.”
이번에는 태선이 도리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듯 그랜트를 지그시 봤다.
“하하, 재밌군. 그 비서에 그 사장이로고. 내게 그런 식으로 대답을 요구하다니.”
“무례했다면 용서해주십쇼. 전쟁에 참가하지도 않은 녀석이 함부로 말을 내뱉는다고 보여질까 우려가 돼서요.”
“내가 듣기로는 자네가 게티즈버그에서 전구로 큰 공을 세웠다던데. 그렇지 않은가?”
“게티즈버그에서는 전구로 승전에 기여를 하긴 했지요.”
그랜트 장군은 옅게 웃었다.
“그렇다면 자네도 이 전쟁에 기여했다고······.”
그때 부관 드레이크가 슬쩍 그랜트의 귀에 대고 뭐라고 소곤거렸다.
그랜트가 살짝 놀랐다는 듯 재차 부관에게 확인하곤 시선을 돌려 태선을 봤다.
“오호라, 군복을 공급한 것도 자네였군. 거기에 역에도 전구를 설치해서 원활한 보급에도 기여했다지.”
“머리칼은 검은색이나 저도 미국인입니다. 또한 이 나라의 정신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업가로서 할 일을 했을 따름이죠.”
물 흐르듯 나오는 태선의 말에 그랜트의 무심하던 표정에 감정이 어렸다.
아니, 그보다는 여린 감성을 숨기느라 철저히 단련한 가면이 뚫린 것이리라.
“큼! 물론 그래야지. 다른 사업가들도 자네 같은 마음가짐이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이내 헛기침을 하면서 괜히 다른 말을 했지만 이미 다 봤더랬다.
하기야 여느 사업가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입바른 말이라고 여겼을 터였다.
다만 태선은 말하기 이전에 실제로 군복이며 전구며 많이 지원했다.
그러니 같은 말이라도 진심이라고 보일 수밖에 없었다.
“잠시 말이 샜군. 아까 하던 말을 다시 해보지.”
그래서 그랜트는 드러내지 않으려 해도 언뜻 보이기로 더 관심을 갖게 된 듯했다.
“그 내가···아니, 전쟁에 참여했던 군인들이 피해자이고 현실에 녹아들지 못할 거라고 했단 이야기 말이네.”
심지어 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
“한 번 이야기해보게나.”
부하들의 고통과 고충을 너무도 잘 아는 탓에, 얼굴에 감정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만큼 이 문제를 공감하고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거겠지.’
다행히 첫수부터 제대로 짚었고 먹혀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