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19
뼈대가 되는 줄거리와 컨셉은 전부 ‘그리스 신화’에서 따왔다고.
때문에, 비록 연극과는 사용하는 용어가 조금 다른 뮤지컬일지라도.
이번 공연에서만큼은 사용되는 모든 언어를 연극에 맞추기로 했다고 한다.
극 문화의 시초인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의미하는 ‘코러스’ 배역이란, 뮤지컬에서 말하는 ‘앙상블 배우’의 역할은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조금 더 넓은 개념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하나의 극적 장치다.
즉, 화음을 통해 노래에 풍미를 더하고 춤을 통해 무대를 더 풍성하게 해주며.
때로는 극의 사건 진행에 직접적으로 개입해 주 인물들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위협하기도 하는 등의 액션까지 선보이기도 한다.
일정 수준의 가창력을 갖췄다고 판단은 들지만, 아직 뮤지컬 무대 경험이 없는 상태.
그러나, 대사 전달력과 배역으로서의 감정처리만큼은 현 WMAC 배우 중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배우인 백우진.
맥은 현재의 우진에게 찰떡인 코러스 역할을 먼저 준 것이었다.
우진도 맥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루카스의 세세한 설명을 귀에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으로는,
‘재밌겠다. 빨리하고 싶다.’
이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숙소에 짐 풀고, 조금 쉬고 계세요. 저녁에 데리러 오겠습니다.”
“저녁에요?”
“네, 우진을 기다리는 사람이 워낙 많아야지요. 설마, 첫날부터 조용히 넘어가려고 한 건 아니겠지요, 우진?”
루카스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첫날부터 어마어마한 환영식이 기다리고 있다?
우진이 활짝 미소지었다.
208화
히드로공항에서 차로 약 30분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이곳이 여러분을 위해 저희가 준비한 숙소입니다.”
‘팀 우진’이 런던에서 일정을 소화하는 내내 묵게 될 숙소였다.
외관부터가 고급스러운 펜션처럼 보이는 숙소는 2층 구조의 연립주택이었는데,
“우와!”
“완전 펜션이네?”
“역시 국내랑은 스케일부터가 달라. 한국이었으면 모텔에서 장기 투숙이었을 텐데….”
내부는 웬만한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보다도 훨씬 넓고 좋았다
‘거실과 2층 테라스는 공용.’
‘인원수에 맞게 각자 방 하나씩.’
‘층마다 화장실 별도 등등.’
앞으로 반년 이상을 타국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우진 일행을 위해 WMAC 측에서 최대한으로 신경 써서 숙소를 잡아준 배려가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그런 와중에,
“여자들이 2층 쓰면 안 될까요?”
“우진아, 어때? 우리가 1층 써?”
“전 아무 데나 상관없어요.”
“땡큐!”
셰어하우스 문화가 워낙 발달한 나라가 바로 영국 아닌가.
“합숙 진짜 재밌을 것 같아요!”
“나도. 기대되는데?”
문화적 특색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숙소를 ‘쫙-’ 둘러본 고이와 혜정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 모습을 본 준안이 ‘피식-’ 웃으며 다가가 말했다.
“누가 보면 놀러 온 줄 알겠어?!”
“기분만 살짝 내봤습니다.”
“열일은, 내일부터….”
“나도 너희들처럼 설레는 게 사실이다만, 일단 짐부터 풀자고. 정리할 게 너무 많아.”
“네~!”
“알겠습니다!”
“자, 해산!”
각자 챙겨온 짐을 푸는 게 우선인지라.
준안과 고이, 혜정이 순식간에 개인 짐을 들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세 사람은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동시에 움직였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1층 거실에는 우진과 루카스만이 남았다.
루카스가 호쾌하게 웃으며 우진에게 말했다.
“하하! 다들 에너지가 넘치네요.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좋은 숙소를 마련해주셔서 힘이 나는걸요.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저희가 당연히 해드려야 하는 부분인걸요.”
“참, 루카스. 그 대본이랑 MR 좀 받을 수 있을까요?”
“아! 그러고 보니, 정작 제일 중요한 걸 놓치고 있었네요. 여기 있습니다.”
루카스가 거실 탁자에 놓여있던 대본과 USB를 건넸다.
‘대외비’라고 떡하니 적힌 테이프가 눈길을 끌었다.
“뮤지컬에 있어서 음악은 곧 본질이고, 음악에 있어서 음질은 그야말로 생명이지요. 우진이 쓸 예정인 방에 스피커를 설치해드리겠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배우에게 아낌없이 지원해주는 게 국내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
확실히 대우가 남다르니, 우진은 더욱 무거운 책임감이 들었다.
그 말인즉슨….
그만큼 열정을 불태울 수 있어서 좋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잠시 후,
“다 됐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루카스.”
“아닙니다. 그러면, 일단 푹 쉬시고요. 2시간 뒤에 제가 픽업하러 다시 오겠습니다.”
“아까 말씀하셨던?”
“네, 맞아요. 우진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는데, 이 밤을 어찌 그냥 보낼 수 있을까요! 웨스트엔드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하하!”
루카스는 우리를 보고 에너지가 넘친다고 하였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호쾌한 웃음을 연신 터트린 그는 이내 자리를 떠났다.
우진은 간단하게 짐을 정리한 뒤,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당연히 손에는 대본을 쥔 채로.
역시….
대본을 읽는 것이 배우에게는 휴식의 일종이라 생각하는 그의 평소 모습이 영국에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스 신화 3부작이라….”
공항에서 숙소로 오는 동안.
루카스에게 간단하게 들었던 내용만으로도 사실 우진은 떨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스 연극을 소재로 뮤지컬을 창작했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도 흥미롭지 않은가.
어렸을 때, 만화책으로 많이 읽었었던 ‘그리스·로마 신화’의 줄거리가 어렴풋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렇게 들여다볼 수 있게끔 하는 대본이라니.
과연 무슨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증을 더는 참을 수 없었기에, 우진은 대본을 펼쳤다.
“이아손, 펠리아스, 아테나….”
천천히 주요 등장인물들이 적힌 목록부터 읽었다.
“…그리고, 메데이아.”
그랬다.
맥 오브라이언 음악 감독이 총괄, 제작하는 WMAC의 신작이자 그리스 신화 3부작.
그 첫 주자의 제목,
기원전 1300년경, 그리스 각지에서 불세출이라 일컬어지던 영웅들이 한데 모였던 대원정.
‘아르고호 원정대’의 서사를 뮤지컬로 재탄생시킨 작품이었다.
“…스케일 보소.”
영국으로 와야지만 대본을 보여준다고 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혼잣말을 읊조리던 우진의 눈빛이 번뜩였다.
* * *
2시간 뒤.
루카스가 숙소를 재차 방문했다.
그는 ‘팀 우진’을 데리고 WMAC 본사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진!”
“대체 이게 얼마 만이에요!”
“보고 싶었어요. 우진이 우리와 함께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한데 모인 반가운 얼굴들과 재회했다.
가장 먼저 그를 환영해준 이들은 릴리와 앤, 그리고 피터.
그동안 수십 통의 이메일로 서로 안부를 물으며 재회하기만을 기다렸던 친구들이 우진이 들어서자마자 버선발로 뛰쳐나왔다.
“다들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참, 베니스 영화제 소식 들었어요. 늦었지만, 정말 축하해요. 우진!”
“축하해요!”
“만세!”
세 명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환영 인사도 세 배, 축하 인사도 세 배로 쏟아졌다.
웨스트엔드에서 최고의 자리에 서 있는 배우와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한 신인들이, 서로 거리낌 없는 사이임이 단번에 드러나는 광경.
준안과 고이, 혜정은 막상 그 모습을 직접 보니 신기한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쳐다보았다.
할 말이 많지만, 일단 소개가 먼저 아니겠는가.
우진이 자신의 스태프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사말이 오고 갔다.
“일단 들어가요. 맥이 스튜디오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가요. 마이클도 있어요.”
“하하하!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가 벌써 귀에 들리는 것 같아요.”
“그렇죠? 오늘만 해도 맥이 마이클한테 입 닥치라는 말을 일곱 번이나 했어요.”
“아니, 그걸 다 세고 있었어?”
“잠깐만. 일곱 번밖에 안 했다고? 그게 더 놀라운데?”
로비는 물론이거니와, 발이 닿는 곳마다 금세 떠들썩해지니.
정말이지,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그만큼 반가웁다는 거겠지.
릴리와 앤, 피터를 따라 내부 스튜디오로 향했다.
여담이지만, WMAC 내부 시설 중에 ‘스튜디오’로 칭하는 곳은 두 군데라고 한다.
본 공연장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연습용 무대 시설과 녹음실이었다.
맥은 지금 녹음실 스튜디오에 있다고 했다.
에서 주인공 이아손 역을 맡은 마이클의 노래를 지도 중이라고.
“짜자잔! 맥, 마이클! 귀한 손님 오셨어요!”
녹음실 문을 열자마자 릴리가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뮤지컬 배우의 발성이란.
릴리를 따라 들어서자마자, 우진은 맥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맥은 천천히 다가와 악수를 건넸고, 우진이 그의 손을 잡았다.
맥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환영합니다, 우진.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이렇게 다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감독님. 좋은 기회를 주셨는데, 이제야 감사 인사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악수는 이어 포옹이 되었다.
그가 ‘나’를 얼마나 반가워하고 있는지는 진작 시선에서부터 느껴졌다.
우연한 첫 만남이 인연으로 발전했으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감독과 배우, 에이전시 대표와 소속 배우’가 되었으니.
이유는 모르겠다만.
맥과 눈이 마주친 찰나, 뭔지 모를 뜨거운 뭉클함이 내면에 가득 찼다.
그건 맥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생각한다.
두 사람이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사이에,
“이렇게 또 한 명의 웨스트엔드 스타가 탄생하는 것인가? 정말 보기 좋은 장면이야!”
“마이클! 녹음은 다 끝냈어?”
“릴리. 너도 알겠지만, 나는 노래하는 신사잖나. 이미 완벽하다고!”
은근슬쩍 녹음 부스에서 빠져나온 마이클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입 닥치고 녹음실로 들어가 주면 좋겠어, 마이클.”
“맥, 나도 우진하고 인사 좀 나눕시다. 당신들만 재회한 게 아니라고요!”
“닥치고 들어가, 제발… 이번에 끝내면 인사하게 해줄게.”
“오, 천하의 맥이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겠지요?”
“그냥 좀 닥….”
“오케이, 오케이. 돈 앵그리!”
맥이 우진에게 보였던 것과는 정반대의 표정과 목소리로 마이클에게 말했다.
‘냉혈한’, 그 자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짓는 맥을 뒤로하고, 마이클이 다시 녹음 부스로 들어갔다.
릴리는 두 사람을 보고 있으면 늘 ‘덤 앤드 더머’ 같다며 빵 터진 웃음을 주체하지 못했고,
“피터, 방금 여덟 번이 되었어.”
“맞아, 앤. 아주 정확해.”
앤과 피터는 멍한 표정으로 쓸데없이 진지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이 정신 없이 흘러가는 전체 상황을 보고 있자니,
“여기 WMAC 맞죠?”
“우진이한테 말로만 들었을 때는 몰랐는데, 직접 보니까…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뭔가, 개그맨실 온 것 같아요.”
준안과 고이, 혜정은 가까스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우진, 미안합니다. 마이클하고 릴리가 아직 녹음할 게 살짝 남았어요. 잠깐만 기다려줄 수 있죠?”
“그럼요, 감독님. 천천히 하세요.”
그렇게, 재회의 반가움은 잠시 넣어두기로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