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238
“저도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릴리한테 주셨었던 작품들, 잘 봤어요. 배우님의 연기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꼭 만나 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뵙게 되네요.”
“좋게 봐주셔서 저야말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보여주신 연기 디테일들에 소름이 돋았었습니다. 이런 배우와 계약할 기회를 놓쳤다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만, 조만간 꼭 함께 작업해볼 기회가 생길 거라 기대합니다.”
미쉘은 무척 솔직한 사람인 것 같았다.
협업하고 싶다는 의사를 표출할 때의 표정과 목소리가 굉장히 직설적인데, 그 모습이 오히려 위트 있다고 느껴져서 듣는 사람으로서는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랄까.
“저도요. 할리우드 역시 웨스트엔드와 같은 꿈의 무대니까요.”
뮤지컬의 성지를 거쳐 영화의 본고장으로 향한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상상.
우진과 미쉘이 악수하며 웃음 지었다.
227화
2개월 넘게 출·퇴근했었던 ‘아폴로 빅토리아 극장’을 마지막으로 나설 때의 느낌은 참 오묘했다.
1층부터 3층까지, 텅 비어있는 객석을 몇 번이나 둘러본 것인지.
매번 2,500명의 관객이 꽉 들어차던 진풍경들이 눈에 생생하게 아른거렸다.
물론 팀이 팀으로 재탄생해서 이곳으로 돌아오기까지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을 예정이나.
어쨌든 작품 가 오늘로써 종연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기에, 진한 아쉬움이 몰려오는 것은 당연했다.
단, 그것에 깊게 취해있을 여유 또한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하나가 가면, 다른 하나가 오는 것이 순리니까.
“갑시다!”
“네-!”
맥 오브라이언이 선두에 섰고, 그 뒤로 우진을 포함한 전 출연진이 섰다.
모두가 한 차례 크게 호흡을 들이쉰 찰나, 맥이 힘차게 극장 문을 열었다.
이윽고,
– 우르르!
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팬들이 쏜살같이 몰려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이었는데, 무대 연기 영역에서만 존재하는 이러한 문화는 한국이나 웨스트엔드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팬 미팅을 하는 기분이 들어 그저 행복했고, 이미 여러 번 반복된 터라 익숙해졌다.
이제는 소소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몇 가지 요소들이 눈에 띄는 경지였는데, 그중에서도 오늘처럼 전 팀원이 각각 텀을 두지 않고 다 같이 극장을 나서는 경우가 특히 그러했다.
예를 들면,
“이봐, 우진! 자네 주위로 모여드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는군!”
“무슨 말씀을?! 그래 봤자 우리 이아손 님 앞에서는 지렁이 앞에서 주름잡는 격입니다!”
“과연 그럴까?!”
“네?”
“저쪽을 보라고, 우진! 마녀 메데이아는 오늘도 인파에 묻혀 사라졌다고!”
“Wow-!”
“이아손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메데이아한테는 상대가 안 된단 말이지. 역시 남편은 와이프를 절대 이길 수 없어, 하하하!”
기다리고 있던 팬들 저마다의 발걸음이 가장 처음으로 향하는 목표물은 제각각이다.
즉, 의 구성원마다 그 주위로 몰려드는 팬들의 규모가 전부 달랐는데,
‘주연은 주연끼리.’
‘조연은 조연끼리.’
‘코러스는 코러스끼리.’
‘스태프는 스태프끼리.’
그렇게 주변에 형성되는 원의 크기를 두고 짓궂은 장난을 치기도 했고, 때로는 기분 좋은 신경전이 펼쳐지기도 했다.
우진을 둘러싸는 팬들은 날이 갈수록 많아졌다.
시작은 유일한 동양인 배우라는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다만, 두 달이 지난 지금은….
그가 ‘오르페우스’ 배역으로서 보여준 연기에 매료된 덕분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행보였다.
릴리나 맥은 워낙 인기가 압도적이라서 논외로 친다 해도, 어느덧 우진의 인기는 마이클 못지않게 뜨거워졌으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저, 루시아요! 우진 배우님, 팬입니다! 저 K-Pop도 정말 좋아하는데, 한국 꼭 가보고 싶어요!”
“감사합니다, 루시아. 앞으로도 열심히 연기할게요!”
“와-! 다음 공연도 기대할게요!”
“저도 사인해주실 수 있으세요?!”
“당연하죠! 성함이?”
“로웬입니다!”
극장 문을 나서자마자 시끌벅적해진 웨스트엔드의 거리.
우진은 최근 들어 문화의 차이라는 걸 많이 실감하고 있었다.
만약 한국에서 잘나가는 연예인이 길거리를 지나가다가 팬들에게 둘러싸였다고 하면, 아마 대부분은 매니저나 주변 스태프가 제지하는 사이에 황급히 현장을 빠져나가는 그림을 떠올리기 쉽다.
아, 애초에 촬영 일정이 아닌 이상에야 혼자서 거리를 걷는 경우도 거의 없겠지만.
있다고 한들,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게 최대한 얼굴을 가리고 나간다든가 하는 식이고.
반면, 영국은 자유도가 굉장히 높은 문화였다.
무슨 말이냐면, 지금 이렇게 알아보는 팬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어도 특별한 제지가 거의 없다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인천공항에 어머니와 누나를 픽업하러 갈 때조차도 사진에 안 찍히도록 조심하라고 소속사에서 당부하거늘.
영국에서는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고 좋은 점도 있었다.
우진은 종종 생각했었다.
배우는 결국 연예인이고, 연예인은 대중의 사랑과 관심이 있어야 생명력을 얻는 직업군.
그런데, 왜 연예인은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존재라는 구분을 늘 은연중에 지어야만 하는 것일까?
한국에서 거리를 다닐 때는 마스크나 모자, 선글라스 등으로 얼굴을 최대한 가리는 게 습관이었다.
그렇게 하라고 해서 했다만, 곰곰이 돌아보니 정말 꼴불견이었구나 싶은데….
일상생활 중 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면,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 들어 먼저 다가가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지 못한 게 아쉬웠을 뿐인데, 영국에서는 원 없이 소통하고 있어 행복했다.
여담이지만, 릴리도 웨스트엔드 거리를 혼자서 다닐 때가 많다고 했다. (사실 오빠 루카스와 아들 윌리엄까지 해서 셋이서 산책 다닐 때가 대부분이지만.)
사람들이 알아보든, 말든.
갑자기 걷고 싶어지면 카페에 가서 커피를 한 잔 사서 거리를 마음껏 걷는다고.
그러다가 누군가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고 했다.
그렇게 열혈 팬에서 찐 친구로 발전한 사이도 있고, 물론 그와 반대로 안 좋은 기억으로 남은 관계도 몇 번 있었다고.
그래도 웨스트엔드 길거리에서 만나 인연을 쌓아가는 관계는 좋은 점이 더 많다고 덧붙였었지.
우진은 릴리의 그런 말이 참 좋았다.
‘나’랑 인연이 닿은 계기도 길거리에서의 만남 아니었던가.
한국에서는 ‘내’가 배우라서 혹은 연예인이라서,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멀리서 바라보며 ‘우와-’하고 신기해하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그런 시선 없이 오히려 ‘좋은 연기를 보여줘서 고맙다!’라는 식의 기분 좋은 피드백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더 일반적이었다.
어쩌면, ‘나’는 여태껏 이런 자유를 바라왔는지도 모르겠다.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하루다.
“자, 오늘 저희 막공 보러 와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드립니다. 아쉽지만, 저희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오늘은 이만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창 인파가 몰렸을 즈음, 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현장은 순식간에 질서정연해졌고, 곳곳에서는 아쉬운 표정이 만연했다.
그때였다.
맥이 데렉에게 속삭였다.
“데렉.”
“네.”
“음, 혹시 극장 2층 라운지에서 찍으면 다 나오려나?”
“사진이요?”
“어, 부감(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찍는 촬영 기법) 풀샷처럼 전체 다 나오게.”
“가능하죠!”
“그럼 여기 모여주신 분들 다 나오도록, 한 컷만 부탁해.”
“아, 네. 알겠습니다!”
맥의 제안에, 데렉이 ‘후다닥-’ 극장 라운지도 달려갔다.
잠시 후,
“사진 한 컷만 찍겠습니다! 다들, 여기 봐주세요!”
데렉이 카메라를 들어 보이며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찰나.
맥이 ‘피식-’ 웃으며 마지막 인사말을 전했다.
“저희 팀의 다음 공연이 5월 말입니다. 지금 찍는 이 사진은 넉넉하게 인화해서 차기 그리스작 공연 기간 때 입구에서 배부해드리겠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분들, 다 보러 오실 거죠?”
“네-!”
“그럼요-!”
“좋습니다. 데렉, 얼른 찍게!”
“네, 그럼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 찰칵!
사진 속의 대규모 인파, 모두가 웃고 있었다.
정말이지.
셰익스피어의 희곡 제목 중, ‘한여름 밤의 꿈’이 생각나는 순간이었다.
* * *
“요즘 할리우드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요.”
“변화요?”
“네, 뭐랄까. 추세가 서서히 바뀌고 있는 거죠.”
뮤지컬 뒤풀이 현장.
공연이 끝난 직후에 무대 뒤에서 잠시 인사를 나눈 뒤, 그곳에서 재회한 미쉘은 우진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추세가 바뀐다니요?”
“배우들은 잘 모르는 얘기인데, 제작사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이미 나오고 있어요. 앞으로는….”
미쉘이 칵테일을 한 모금 들이켠 뒤, 말을 이었다.
“…TV의 시대가 서서히 끝날 거라고.”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했다.
우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생이었던 2020년을 떠올려보면, 놀랄 이야기는 아니었다.
대중이 작품을 볼 수 있는 플랫폼은 늘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리고,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원생인 2020년에는 OTT(Over-The-Top, 인터넷을 통한 방송 프로그램·영화 등의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의 꽃이 핀 시대가 자연스럽게 도래했었고.
그 바람이 서서히 시작된 게 이맘때쯤이었다는 건가.
신기했다.
“저희 UTA에서 동양 쪽, 특히나 한국·일본·중국 3개국의 엔터 산업으로 진출하려고 했었던 이유도 이거였죠.”
“아, 저는 단순하게 동양인 배역이 필요해서라고만 전해 들었었거든요.”
“놉! 그것도 맞지만, OTT 서비스로 발을 넓히기 위해서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아티스트들을 확보하는 게 더 중요했죠.”
“그렇군요.”
미쉘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확보라는 단어가 혹시 안 좋게 들렸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전했다.
우진이 손을 내저으며 웃어 보이자, 그녀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릴리는 두 사람의 대화를 재밌게 들으며 과일 안주와 치즈 크래커를 흡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걸 바쳤으나, 끝내 배신을 당하는 메데이아를 표현해야 하는데 어떻게 하루 세끼를 든든하게 먹겠냐는 이유로 1일 1식만 해왔으니.
오늘 회식만큼은 허리띠를 졸라매겠다고 했던가.
뭐, 아무튼.
“미쉘, 그나저나 저번에 저한테 제의 주셨었던 그 작품은 어떻게 돼가고 있어요?”
“요?”
“네, 맞아요. 에릭 감독님.”
“휴… 그거, 말도 마세요.”
미쉘이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한 제스쳐였다.
우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십에 너무 빠지면 안 되겠지만, 어쨌든 ‘나’와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었던 주제이다 보니 궁금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미쉘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진 씨 캐스팅이 불발된 게 정말 아쉬웠죠. 처음부터 한국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싶었었거든요.”
“진짜요?”
“네. 왜냐하면, 솔직히 한국 배우들이 일본·중국 배우들보다 연기를 잘하거든요. 편견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그래요. 할리우드 제작자들도 많이들 그렇게 생각하고요.”
미쉘이 덧붙인 이유는 이러했다.
일단, 언어의 차이 때문인지 아주 기본적인 발음에서부터 차이가 난다고 했다.
한국인 배우들의 영어 발음이나 구사하는 능력이 나머지 2개국 출신 배우들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고 유창한 경우가 많다고.
연기의 기본은 대사 전달이다.
여기에서부터 한국인 배우들이 뛰어난 경우가 많다는 걸 이미 할리우드에서도 알고 있단다.
거기에다가, 원래 우진에게 주어졌었던 배역에 해당하는 연령대의 일본 남자 배우들을 죄다 추린 뒤에 연기력을 지켜본 결과….
“이 또한 편견일 수 있지만, 일본 배우들은 연기력이 좀… 구식이에요. 뭐랄까, 방송 연기도 연극처럼 한다고 할까요? 과장이 좀 심한 구석이 있어요.”
연기력에서 탈락이었다고 했다.
그녀는 일본이 애니메이션을 제외하면, 영화나 드라마 산업이 죽어버린 지 오래란 평이 괜히 나온 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나마 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 전 세계에서 히트를 기록한 작품도 꼭 ‘실사화’만 되면 별로라고….
“그 이유가 뭐겠어요? 연출력도 문제지만, 연기력도 문제지. 학창 시절의 풋풋한 로맨스나 ‘서바이벌’ 혹은 ‘서든 데스’ 류의 작품들은 괜찮은 것 같거든요? 그런데, 그 밖에는… 아무튼, 캐스팅디렉터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한국인 배우를 최선으로 두고 중국인 배우를 차선으로 둘 수밖에요.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UTA 디렉터들이 공통으로 가진 생각이에요.”
역시 배우들이 모르는 이야기가 아주 많구나.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는 곳이 바로 술자리고, 실제로 굉장히 도움이 되는 정보들이어서 경청하게 된다.
우진은 미쉘이 푸는 썰에 점점 빠져들었다.
중간에 릴리가 살짝 염려를 표하기도 했으나, 미쉘은 ‘오프 더 레코드’가 아닌 얘기만 하는 것이라며 괜찮다는 의사를 표력했다.
“아무튼, 그래서 우진에게 갔었던 대본이 결국은 중국인 배우에게로 갔어요. 중국 제작사랑 접촉했고, 캐스팅까지 완료됐죠.”
“차선책이라고 하셨으니, 다행이네요.”
“그렇죠.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죠. 크랭크인 전까지만 해도요.”
미쉘이 크래커를 집어 들었다.
이내,
– 아그작.
그것을 씹는 소리가 범상치 않게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 확실한 모양이었다.
우진과 릴리는 마른침을 절로 삼켰다.
228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