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ary of a genius actor RAW novel - chapter 50
그의 말이 끝나자 류 감독은 환하게 미소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녀석 이거, 허투루 배운 게 아니었네?”
“에이, 감독님. 무슨 말씀이세요? 제가 감독님 옆에서 짬밥이 몇 년인데요.”
“정확히 봤어. 나도 너랑 생각이 같다.”
“제2의 류창민으로 드디어 인정해주시는 겁니까?”
연재필의 농담에 류 감독이 손을 저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그가 건 전화의 수신자는 제작사 대표였다.
“류창민입니다.”
통화는 길게 이어졌다.
* * *
제작사 대표와 통화 후, 이어서 류 감독은 배급사 측과도 의견을 조율했다.
그리고 최종으로 합의된 사안.
‘한 씬 추가. 맥시멈 10분.’
류 감독은 우진과 성철을 방으로 불렀다.
자신과 조감독 못지않게 이 영화에 대해서 제일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으니까.
최종적으로 염두에 둔 세 개의 씬 중에서 과연 어떤 씬을 넣으면 좋을지 고민이 깊어졌다.
막말로 계급장 떼고, 편하고 자유롭게 의견을 공유했으면 좋겠다는 류 감독의 말로 토론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 후보인 씬.
[영화의 초반부,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이 죄인들을 과녁판에 묶으라 명한다. 그리고 멀리서 화살을 날리면서 죄인들의 부인, 여식에게 그 장면을 보게 한다. 남편, 그리고 아버지를 살리고자 처절하게 용서를 빌어보지만, 연산의 화살은 자비 없이 죄인들의 숨통을 끊는다.]해당 씬은 결국, 긴 논의 끝에 배제하기로 하였다.
이미 갑자사화의 희생자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은 촬영이 끝난 부분이기도 하고, 초반부에 인서트 컷으로 들어갈 것이며, 후반에 김처선을 죽이는 장면으로도 연산의 잔악한 면을 보여 주기에 충분하다는 이유였다.
그다음,
[연산에 의해 종4품 숙원에서 종3품 숙용으로 등급이 올려진 장녹수의 악행이 강조되는 장면. 특히 해당 장면은 이후 최전향과 수근비, 두 명의 여인을 거열형으로 죽이고 기생 옥지화마저 치마를 밟았다는 이유로 가혹한 고문을 가해 죽인 뒤 효수하는 대목으로 이어진다.]이 씬 역시 논의 끝에 네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연산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고, 해당 씬이 이어지기 전까지 영화에서 보여주는 연산의 모습으로도 충분하다.
장녹수의 이런 면을 부각함으로써 연산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것을 한 번 더 강조할 필요가 굳이 없다는 의견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후보.
[연산이 강무를 나가면서 통행로에 있는 민가를 죄다 허물라는 명을 내린다. 마을의 사는 백성들이 모두 거리에 나와 애원하지만, 연산의 손짓 하나에 군사들이 그들을 거칠게 쫓아낸다. 결국, 한 명이 분노를 이기지 못해 연산에게 달려들다가 사로잡힌다. 연산은 그 자리에서 그를 참한 뒤, 그의 식솔들마저 참하라 명한다. 연산이 타고 있는 가교(駕轎, 조선 시대에 임금과 세자의 장거리 행차에 사용하던 가마)를 뒤로하고 백성들의 처절한 비명이 울린다.]“이 장면도 불필요한 설명이라 생각합니다.”
우진의 말에 류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성철도, 연재필도 그의 의견에 동감하고 있었다.
한 씬 추가는 이미 외부적으로 합의된 사안이니, 이왕이면 이야기 흐름에 가장 적절하면서도 임팩트가 큰 씬을 넣고 싶은데….
그래서 스토리보드에서 제외했었던 씬들 중에 가장 괜찮은 장면 셋을 뽑았는데도, 막상 의견을 주고받다 보니 그저 그랬다.
“그래도 이 중에서 선택을 해야 하니….”
류 감독의 신음이 깊어졌다.
머리를 계속 굴려봐도, 한 번에 ‘이거다!’라는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성철과 연재필도 마찬가지였다.
순간의 적막함이 점점 늘어지려는 찰나였다.
“아예 새로운 씬을 넣으면 어떨까요?”
우진의 말에 세 사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새로운 씬이요?”
“네.”
“구체적으로 얘기해 봐요.”
“제가 연산군을 분석하면서 각종 기록을 최대한 찾아본 건 이미 아실 겁니다.”
첫 미팅 때처럼 큰 화두를 던지고 점점 이야기를 좁혀나가는 우진의 화술.
류 감독과 성철은 우진이 던지는 서론에서부터 이미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흥미 있으면서도 도움이 되었던 것을 뽑아보라면, 바로 연산군이 직접 지었던 시입니다.”
“어제시요?”
“그렇습니다.”
“이유는?”
“연산의 마음이 가장 잘 녹아 들어있으니까요.”
그의 말에 류 감독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시야 이미 두 번이나 대사로 나왔으니까.
그런데도 또 넣자는 말인가?
“이미 두 번씩이나 시를 읊는 대사가 있는데. 굳이 또 넣을 필요가 있을까요?”
류 감독의 말에 우진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앞의 두 시는 성격이 각각 다릅니다. 첫 번째는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의 마음, 즉 분노를 대변한 대사였고, 두 번째 어제시는 장녹수의 품에 안기기 전에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였죠. 두 시가 나오는 시점도 초반부와 중반부에 각각 하나씩이고요.”
류 감독의 머릿속이 순간 띵하고 울렸다.
동시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저는 각각의 장면에서 어제시가 의미하는 바가 아주 크다고 생각했습니다. 평범한 군주에서 광기 어린 군주로 돌변할 때의 마음과 쾌락에 젖어있을 때의 마음이 잘 드러났거든요. 그렇다면 이제 후반부, 즉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연산의 최후를 그리기 전에도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견입니다.”
초반부, 중반부, 그리고 후반부.
각각의 단계에서 어제시로 연산의 상태 변화를 표현한다는 획기적인 생각이었다.
류 감독은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왜 저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라는 아쉬움과 더불어 시나리오 구성에도 탁월함을 보이는 우진에게 다시 한번 놀랐다.
“아주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조감독하고 오성철 배우 의견은 어때요?”
류 감독의 물음에 두 사람 역시 손뼉을 치며 동의했다.
그러자 그가 우진에게 본격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우진 배우가 생각하는 장면의 구성은 어떻습니까?”
우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연산군과 장녹수의 기록을 찾아보면서 유독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시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리 영화 시나리오에서는 그리지 않고 있었거든요.”
우진은 자신의 대본을 펼쳤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 대신들이 중종반정을 일으키는 모습이 담긴 씬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가 말하는 시점은 바로 이 장면 전에 등장하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말하는 시점.
그것은 바로, 1506년 8월 23일.
중종반정 일주일 전이었다.
* * *
“중종반정 일주일 전에 연산군이 잔치를 즐기던 도중에 어제시를 내뱉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오직 장녹수와 전비(典備)만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고요.”
우진은 대본에 끼워둔 프린트물을 펼쳤다.
연산이 지은 어제시들이 전부 적혀있었다.
우진은 그중에서 하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바로 이 시입니다.”
류 감독과 연재필, 그리고 성철은 그가 지목한 시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내 그들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동시에 눈빛이 번뜩였다.
“감독님. 시 내용이 상황에 딱 맞는데요.”
연재필의 말에 성철이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우진이 말을 이었다.
“중반부에서부터 등장하는 쾌락에 젖은 연산의 모습이 그대로 후반부까지 이어지는 것에서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 전에 자신의 미래를 예견하는 씬을 넣으면, 훨씬 납득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리고, 제가 느낀 또 다른 아쉬운 점을 보완해줄 수 있는 씬이라 생각합니다.”
류 감독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다른 아쉬움이요?”
“네.”
우진은 대본의 첫 장을 펼쳤다.
등장인물들이 쭉 나열되어있는 페이지.
그의 손가락이 다시 한번 어딘가를 가리켰고,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연산군, 임사홍.
그다음으로 나오는 이름 세 글자.
[장녹수]46화
연기와 연출.
두 예술 분야의 가장 큰 공통점.
바로, ‘팀플레이’라는 점이다.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여러 사람의 열정과 책임감이 필요하다.
감독이나 배우 개인이 잘해서 되는 일이 당연히 아니다.
또한, 두 분야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요구되는 능력.
바로, ‘창의력’.
그래서 류 감독은 늘 타인의 의견을 듣고 수용하는 것에 적극적이었다.
자신에게 의견을 주는 사람이 경험이 적어도 상관이 없었다.
경험이 많고 적음이 창의력을 결정짓는 절댓값은 아니니까.
하지만, 업계의 특성상 자신에게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는 사람은 드물었다.
항상 무언가를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감독님이 맞습니다.’라는 고정적인 답변만 내놓을 뿐.
그나마 나머지 하나도 의견을 피력하는 것에는 소극적이었다.
류 감독에게는 ‘거장’이라는 타이틀이 주는 수많은 장점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한 개의 단점이기도 했다.
그런데,
“악녀로서의 장녹수가 아니라 예인(藝人)으로서의 그녀 모습도 한 번은 나와야 한다고 봅니다.”
젊은 배우의 거침 없는 의견은 매번 류 감독의 간지러운 부분을 속 시원하게 긁어주고 있었다.
적극적인 태도만으로도 마음에 드는데, 내는 의견마저 항상 그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들이었다.
감독이자 대본을 직접 쓴 자신보다 오히려 시나리오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느낌을 준다.
‘연산이 아니라 장녹수에 힘을 주자고 할 줄은….’
성실성, 노력, 창의력, 연기력, 태도 등 그의 모든 게 다 놀랍고 마음에 들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돋보이는 우진의 좋은 점은 바로,
‘자신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 배우다.’
그의 팀워크였다.
어렵게 할애된, 무려 최대 10분을 그릴 수 있는 씬.
배우들 간의, 그리고 연출과 배우 간의 기 싸움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의견을 낼 수 있고, 그 의견이 추가되는 씬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자리에서 보통의 배우라면, 자신을 위한 씬을 만들고 싶은 욕심이 드는 게 당연하다.
류 감독이 본, 작품보다도 개인의 위상을 더 중요시하는 배우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그런데, 우진은 달랐다.
그는 이야기 전개를 가장 먼저 생각하고 있었고, 작품이 빛날 수 있는 방향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향성만 맞는다면, 자신보다 더 신인이거나 무명인 배우를 부각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첫 촬영 때, 연산이 엄 귀인과 정 귀인을 무참히 살해하는 장면.
그리고, 중반부에서 연산이 처소에 든 세 명의 흥청들과 한밤을 보내는 장면.
이미 두 장면에서, 의도적으로 단역 배우들의 얼굴이 한 컷이라도 더 잡힐 수 있게끔 움직인 우진의 배려.
촬영분을 매번 수십 번씩 돌려보며 확인하는 류 감독이 모를 수가 없었다.
연기나 연출에 전혀 영향이 가지 않는 선에서 자연스럽게 배려하는 우진의 모습을 흡족하게 지켜보고 있던 류 감독이었다.
‘작품의 방향성에 적합한 장면이니, 홍일점으로서 고생하는 신인 후배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싶습니다. 허락해주십시오, 감독님.’
그리고, 그는 이번에도 류 감독을 흡족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우진의 진지한 표정을 보며 류 감독은 깨달았다.
그가 추가 분량의 씬 주인공을 장녹수로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은 단순히 배려 때문만이 아닌 것을.
작품에 맞는 내용과 더불어 또 한 가지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진 배우는 다희 배우의 연기력을 믿고 있군요?”
류 감독의 말에 우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께서 저와 성철 선배님께 휴가를 주셔서 촬영장을 나서려는 찰나에 다희 배우가 저한테 말했었습니다. 돌아오면 깜짝 놀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그는 말을 덧붙였다.
“어제 촬영 때, 신다희 배우는 장녹수 그 자체였습니다. 대사 톤 한 마디에 제 감정이 들쑥날쑥 움직였어요. 그 연기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보고 싶네요.”
솔직한 직언.
‘우진이 만약 연산군 시대에 살았던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처선이 아니었을까.’라는 재밌는 생각과 함께 류 감독은 호쾌하게 웃었다.
“조감독.”
“예, 감독님.”
“신다희 배우 오라고 하세요.”
막힌 곳이 뻥 뚫리니, 이제 남은 것은 추진력을 얻는 일뿐.
류 감독의 말에 연재필이 방을 나섰다.
여자 숙소는 위층이니 핸드폰으로 연락해도 될 텐데, 직접 데리러 가는 걸 보면 그 역시 고민이 풀려 신이 난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다희가 방으로 들어섰다.
약간 긴장을 했는지, 그녀는 평소 보여주던 ‘신블리’와는 다르게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
류 감독의 정중한 손짓에 그녀는 우진의 옆에 앉았다.
“다희 배우를 부른 이유는….”
그는 다희에게 앞서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해주었다.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듣던 다희는 이내 자신에게 큰 기회가 주어졌음을 깨닫고 눈물을 글썽였다.
믿기지 않는 듯 터져 나오는 환호를 가까스로 참으며 감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축하한다, 다희야.”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거라 믿어. 기대할게.”
네 사람은 흐뭇하게 웃으며 진심을 담은 축하로 그녀를 격려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연신 허리를 숙였다.
네 사람이 만류해도 다희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커리어가 전혀 없는 배우를 이렇게까지 신뢰해주는 현장에서 데뷔작을 맞다니.
이러한 큰 행운에 보답하는 길은 최고의 장녹수를 보여주는 방법뿐.
다희가 설렘과 기쁨을 가라앉히고 다시 자리에 앉자 류 감독이 몇 가지 사항을 체크했다.
“노래는 어느 정도 해요? 춤이나 무용을 배운 적이 있어요?”
만약에 이 장면이 처음부터 시나리오에 있었다면, 오디션 단계에서 진작에 확인했을 사항들.
류 감독의 물음에 다희가 숨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