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057
01060 1060화
잠시 후 돌아온 닥터 미첼이 숨가쁘게 말했다.
“미군에서도 실상을 듣더니 놀라더군. 짐작은 했지만 최악의 상황에 당황한 눈치야.”
“그럼 지원하겠단 겁니까?”
“이야기를 들으니 그동안 다른 쪽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렇다면 이해가 갑니다.”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으나 반대로 닥터 미첼이 핏대를 올렸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 좌우간 오늘 밤에 최대한 정부군의 눈을 피해서 지원 물품을 전달한다고 했어.”
닥터 미첼의 확답을 듣고야 태수는 안도했다.
“오늘 밤이라. 그때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겁니다.”
“더 빨리 전달하고 싶어도 상황이 여의치가 않은 모양이야.”
“전달된다는 게 중요하죠.”
태수는 그 외에는 관심이 없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닥터 미첼도 동조했다.
“그래. 우리가 전쟁을 막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우리는 우리의 할 일만 하면 되는 거지.”
“좌우간 이렇게 바로 연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닥터 최를 위한 일인가. 거기 있는 닥터 슈미트와 의료진들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내가 나서야지. 그리고 NGO를 대표해서 이 이야기는 꼭 하고 싶어.”
“…….”
태수가 멀뚱히 바라보자 닥터 미첼이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정중하게 말했다.
“그 사선을 지나 닥터 제임스를 데려와 준 거 말이야. 내가 NGO 모두를 대신할 자격은 없지만 그들의 마음은 대신 전달하고 싶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라도 우리끼리는 이렇게 인사하고 살아야지.”
“이러시면 전 뭐가 됩니까.”
난색을 표하는 태수의 모습을 보자 닥터 미첼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고마운 걸 어쩌나.”
“저도 NGO라면서요?”
“그건 또 그렇지.”
“그런데 이러시면 또 내외하시는 겁니다.”
태수의 말에 닥터 미첼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되는군. 이거 실례했어.”
“아, 이제 좀 마음이 편하네요.”
“사람 참. 인사를 받을 때는 또 받아 주고 그러는 거야. 그리고 내 확신하지. 앞으로 NGO에 도움을 요청하면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거야.”
그 소리에 태수의 눈빛이 살짝 반짝였다.
“그 말씀…… 이상하게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거 같은데요.”
“기억해 두라고 하는 소리야.”
“그럼 당장 일기장에 써 놓겠습니다.”
태수가 기분 좋은 얼굴로 분위기를 풀자 닥터 미첼도 밝게 미소 지었다.
“꼭 적어 놓고 필요할 때 연락하도록 해.”
“그럼요. 그리고 기왕이면 닥터 미첼부터 모시고 싶습니다.”
“나? 나야 언제든지.”
닥터 미첼이 흔쾌하게 허락하자 태수도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마친 태수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지휘 텐트를 나섰다.
타머시에서 악전고투중인 닥터 슈미트와 다른 의사들과 환자들, 그리고 시민들에게 마음의 부담을 던 기분이다.
아마 이번 일로 닥터 미첼을 통해 태수의 이름이 NGO 모든 의료진에게 알려질 터였다.
물론 태수야 닥터 미첼의 말대로 한국에 한 번씩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제임스를 위한 일이라 대가를 원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알아서 챙겨 주겠단 보답까지 마다할 일은 없다.
한가지 확실한 건 NGO 의료진들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난해한 환자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거였다.
좀 더 욕심을 내자면 신속대응센터의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아질 게 분명했다.
그 이상 바랄 것도 없었다.
태수는 NGO를 이용하고 싶을 뿐, 남용하거나 악용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이들은 환자에 대해 순수하다.
그건 언제나 존중해 줘야 할 부분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를 옮긴 태수는 디아브와 아크사가 입원한 텐트에 도착했다.
슬쩍 막을 걷어 안을 들여다본 순간 태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아크사가 디아브의 병상 옆에 앉아 간호를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치료를 위해 코에 산소흡입기를 단 채였다.
아크사가 디아브의 머리에 올려놓은 젖은 수건을 걷어 물에 담갔다가 꼭 짜서 다시 올려놓았다.
빙그레.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열을 내리기 위한 민간요법은 만국 공통인 모양이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수건을 짜서 다시 디아브의 머리에 올리고 그 곁에 자리했다.
그리고 디아브의 손에 자기 손을 살포시 얹었다.
부녀는 아랍어로 몇 마디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물론 태수 입장에서 전혀 알아듣진 못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에 사랑이 가득했다.
그리고 곧 아크사가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태수에게는 생소한 음률이었지만, 디아브는 그런 아크사를 하염없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순간을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런 태수의 입에는 뭔가 뿌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짝짝.
노래가 끝나자 열정적으로 박수를 친 태수가 모습을 드러내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디아브에게 물었다.
“어떤 노래입니까?”
“아이함 아마드(Ayham Ahmad)라는 사람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낡은 피아노로 시리아 전쟁에 대해 노래한 곡입니다.”
“어떤 내용입니까?”
“내 형제여, 야르무크는 당신을 그리워합니다, 라는 곡입니다. 노랫말은 ‘야르무크로 돌아와요. 당신 어머니 야르무크를 버리지 말아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지요.”
태수는 숙연해졌다.
그리고 상상했다.
전쟁터에서 들리는 피아노곡.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지만 상당히 매력적인 장면으로 가슴에 다가왔다.
태수는 이어서 비장 비대증 환자의 텐트를 찾아갔다.
텐트 앞에 도착할 무렵, 안에서 막이 걷히더니 신혜미가 걸어 나왔다.
동시에 서로를 발견한 두 사람은 살짝 놀랐다.
“어? 선생님.”
“푹 쉬었습니까?”
태수가 놀람을 숨기며 묻자 신혜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푹 잔 거 같아요. 선생님은요?”
“저도 잘 잤습니다.”
“아, 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세요.”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신혜미가 멋쩍은 칭찬을 건넸다.
그런 반면 태수는 신혜미를 빤히 바라봤다.
첫눈에 봐도 어제보다 화장이 좀 더 진해진 것 같았다.
태수의 눈빛이 매서워지자 신혜미가 얼른 먼저 이야기했다.
“어제 너무 일찍 자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어요. 오랜만에 화장도 하고 멋 좀 냈는데, 어때요?”
“예쁘네요.”
“감사해요.”
“그래도 화장 안 한 모습이 더 예쁜 거 같기도 하고요.”
태수가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자 신혜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더운지 손부채를 부치며 신혜미가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로.”
“환자 상태 좀 확인하려고 왔습니다. 신 선생님께서 선수를 치신 거 같긴 하네요. 어떻던가요?”
“확실히 비장을 제거한 후에는 경과가 빠르게 좋아지고 있어요.”
신혜미가 바로 대답하자 태수가 눈을 굴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정말 다행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제는 좀 한가하신 겁니까? 그럼 식사 같이하시죠. 마침 점심시간인데요.”
태수는 적극적으로 말했다. 생사고락을 함께한 사이인데 밥 한 끼 먹자는 게 흠되는 말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혜미는 갑자기 뭔가 서두르듯이 대답했다.
“죄송해요. 제가 선약이 있어서요.”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죠.”
“다음에.”
신혜미는 슬쩍 고개만 숙이며 곧장 태수를 지나쳐 갔다.
왠지 오래 대화하는 걸 피하는 느낌이었다.
태수는 섭섭한 감정보다 다른 예감이 들어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화장이 두꺼워졌다라.”
태수 시선이 반사적으로 신혜미에게 돌아갔다.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쭉 지켜봤지만 걸음걸이가 흐트러지진 않았다.
진짜 기분을 내려고 한 건지도.
지금은 그저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나마 상태가 악화된 거 같지는 않아 다행이기는 했다.
태수가 텐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휴식을 즐기려는 순간이다.
사락.
텐트 입구를 막고 있던 막이 걷혔다. 그리고 그 사이로 얼굴이 하얗게 질린 박성민이 들어왔다.
“으으으.”
아주 바짝 질린 모습에 태수가 얼른 다가갔다.
“선배, 선배!”
“귀…… 안 먹었어, 자식아.”
“그런데 왜 이러십니까?”
“닥터 막스밀리언. 까득.”
박성민은 이까지 갈며 눈빛을 강하게 번뜩였다.
자세히는 몰라도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치료하는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태수는 그에 대해 자세히 아는 바가 없기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힘드십니까?”
“…….”
“그렇게 노려보진 마시고요.”
“안 그러게 생겼어? 너 같았으면 벌써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을 거야. 나같이 치료 의지가 강한 사람만이 견딜 수 있는 거라고.”
박성민이 그렇게 말해도 태수는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럼요. 선배님이니까 가능하시죠. 그보다 오늘 치료는 끝난 겁니까?”
“아니. 밥 먹으러 온 거야. 2시간 후에 또 가 봐야 돼.”
“저런.”
“그보다 이 아저씨는 왜 안 와? 점심시간이 다 지나가는데.”
하얗게 질린 얼굴로도 박성민은 김혁권을 챙겼다.
두 사람의 끈끈함을 알고 있는 태수는 가볍게 대꾸했다.
“곧 오시겠죠.”
그 말이 끝난 직후 텐트 막이 한 번 더 들썩이더니 김혁권이 들어왔다.
“내가 밥 주는 어미 새도 아닌데 더럽게 찾네.”
“우리끼리 밥 먹으면 또 화낼까 봐 찾는 거 아닙니까.”
“됐으니까 일단 밥부터 먹읍시다. 하도 떠들었더니 배가 다 고프네.”
김혁권이 휘휘 손을 저으며 말하자 박성민의 눈치가 영 심상치 않았다.
그러는 사이 다들 간편하게 식사 준비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본격적으로 식사를 이어 가던 중 김혁권이 뜬금없이 태수를 향해 물었다.
“닥터 최, 그 닥터 신이라는 의사는 도대체 뭐 하는 사람입니까?”
“갑자기 신 선생은 왜요?”
“조금 전에 닥터 미첼이 제임스 병문안을 왔더라고.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는데 내가 끼어들 틈은 없었고.”
“그런데 신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단 말이니까?”
태수가 묻자 김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닥터 신이 닥터 미첼을 찾아가서 타 지역으로 이동하는 의료팀이 있냐고 물었다던데.”
“…….”
“위험 지역도 상관없다고 그랬다면서 최대한 빨리 출발하고 싶다고 했다던데. 가만히 듣고 보니까 이상한 거야. 남녀를 떠나서 대부분의 의사들이 그런데 자원하는 경우가 많지 않잖아.”
김혁권의 말에 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예 없진 않죠.”
“아, 닥터 최는 자원했었지. 좌우간 그건 다른 문제니까 넘어가고. 닥터 미첼 말이 뭔가 조금 급한 표정이었다고 하더라고.”
“음.”
태수가 짧게 탄식하자 김혁권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본인이 희망하니까 우선순위에 넣어 놓았다고는 하는데, 제임스도 닥터 미첼도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던 모양이야.”
“…….”
“마냥 열정적인 의사라고 생각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급하다고 하더라고.”
“다른 건 없습니까?”
“뭐, 별로. 닥터 미첼이 일이 있다면서 금방 가던데. 제임스 옆에 있으면 잔소리가 많아서 다들 잘 안 오려고 하잖아요.”
김혁권의 말은 당연히 농담이었다.
모두에게 인기가 좋고 존경의 대상인 제임스이기에 텐트 속은 항상 북적일 터였다.
아마 오래 대화를 나누기엔 썩 좋은 환경이 아니었을 거라 생각했다.
김혁권은 할 말이 끝났는지 식사를 이어 갔다.
그러나 태수는 어딘지 힘이 빠진 손길로 변했다.
신혜미가 닥터 미첼을 찾아가서 의료 파견을 자원했다고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임스와 함께 타머에 들어갈 때도 도착한 다음 날 바로 출발했다고 했었다.
순간 태수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뭔가 불길했다.
식사가 끝난 후, 김혁권과 박성민은 각자 볼일을 위해 텐트를 나섰다.
혼자가 된 태수는 잠깐 시차를 두고 텐트를 벗어났다. 그리고 바로 신혜미를 찾아 나섰다.
애써 안전한 곳으로 데려왔는데 다시 위험한 곳으로 가는 걸 지켜볼 순 없었다.
아니 그전에 불길한 예감이 틀렸기를 바랐다.
태수는 신혜미와 간호사들의 텐트의 도착했다.
텐트 입구의 막이 옆으로 걷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