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555
01558 1558화
그러던 중 황경자가 태수를 조용히 불렀다.
“그런데…… 태수야.”
“네, 어머니.”
“민수가…… 우리 애가 진짜…… 여기서 중요한…… 사람이니?”
황경자의 질문이 뭔가 이상하단 걸 직감한 태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어요?”
“박성…… 그, 그 사람.”
“아, 네. 박성민, 최고의 선배님이시죠. 연성에서 인턴 할 때 치프님이시기도 했고요.”
“그래…… 고마운 사람. 그분이 잠깐씩…… 애들을 내보냈는데…….”
“역시 선배님이 잘 챙겨 주셨네요. 그런데 쟤들은 왜 한잠도 못 잔 얼굴인 거야. 그보다 그랬는데요?”
태수가 투덜거리다 얼른 본래 주제로 돌아왔다.
황경자는 그런 태수에게 나지막이 말했다.
“어제…… 여기 병원장…… 이라는 분이 찾아왔었어.”
“아, 병원장님이요.”
“그분이…… 고맙다고, 살아나 줘서…… 감사하다고 했어……. 그리고 과장님들도…….”
“…….”
남은 말이 있음을 직감한 태수는 조용히 기다렸다. 황경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뜻이니?”
“제 생각을 그대로 말씀드려도 될까요?”
“그래…… 그래 주라.”
“민수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을 살렸어요. 정말 코앞에서 죽어 가는 게 보이는 사람들도 있었고요.”
“…….”
황경자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태수가 말을 이었다.
“그런 민수가 있어야 더 많은 사람들이 제2의 삶을 살 수 있잖아요. 그런데 어머니가 이렇게 저와 얼굴을 보고 있지 않으셨다면…….”
“다른 사람들은…….”
“네, 또 다른 환자들은 그 기회를 잃을 수도 있겠죠. 민수가 좌절했다면요.”
태수는 이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기에 조금 과감하게 말했다.
오히려 그게 황경자로서는 이해하기 쉬웠던 모양이다.
“그래…… 그랬구나.”
“그리고 저도 마찬가지예요. 정민수라는 친구가 있어야 같이 노력할 수 있거든요. 병원장님께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걸 거예요.”
태수의 말에 황경자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민수가…… 그런 의사구나……. 그랬어.”
“그럼요.”
“하나만 더…… 물어도 될까?”
황경자의 물음에 태수가 얼른 대답했다.
“그럼요. 어머니, 궁금한 건 다 물어보셔도 돼요. 민수 없을 때 다 얘기해 드릴게요.”
“너희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니?”
“거기라면…… 혹시 카슈미르요?”
“그래…… 거기. 백발이 성성한…… 노인 양반이 찾아와서…… 그 경험이 지금…… 너희를 있게 했다고.”
황경자가 말하는 사람을 떠올린 태수는 누군지 바로 짐작했다.
“그분이 전 병원장님 되십니다. 그분도 다녀가셨네요.”
“아이고, 인사를…….”
“격식 따지시는 분은 아니니까 제가 나중에 따로 찾아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황경자가 고개만 끄덕이고 태수를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엔 앞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태수가 슬쩍 한 번 더 물어봤다.
“카슈미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세요?”
“그래.”
“이거 좀 긴데. 좋습니다. 그럼 저도 준비 좀 하고요.”
눈을 찡긋거린 태수가 작정을 했는지 가운을 한 번 뒤로 펄럭이며 편안한 자세로 바꿨다.
그런 태수의 모습에 황경자는 좀 더 기대 어린 표정으로 변했다.
이내 준비가 끝난 태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건 모두 사실입니다. 100퍼센트 진실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
“제가 예민한 부분은 좀 알아서 각색하면서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카슈미르에 민수가…….”
태수는 그때부터 카슈미르에서의 일을 하나씩 풀어 놓았다. 아직도 태수의 머릿속엔 그 일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생생했다.
너무 잔인하거나 끔찍한 일들은 물론 알아서 피했다.
대신 최대한 사실대로 말하고, 자신들이 느꼈던 감정이나 슬픔에 대해선 숨기지 않았다.
기쁜 일도, 감동적인 일도 마찬가지였다.
카슈미르에서의 생활이 무려 2년 반이었다. 그 수많은 이야기들은 시간이 아무리 넉넉해도 부족할 정도였다.
태수가 전해 주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황경자는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양손은 덮고 있던 이불을 조용히 꽉 쥐었다.
재미있는 일화도 많았고, 눈물이 핑 도는 일들도 많았다.
태수는 신이 난 얼굴로 이야기했지만, 어머니의 입장에선 즐겁게만 들을 수 없는 아들의 이야기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수술 후 2주일이 된 날, 황경자는 정민수와 김아름의 지극정성으로 회복해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그사이 김혁권과 송현미 간호사도 수시로 병문안을 와서 간호와 말동무를 자청했다.
그들뿐만이 아니라 박성민, 이선정 간호사, 신창용 등등 정민수와 끈끈하게 얽혀 있는 의료진들의 방문이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덕분에 중환자실이 매일 북적거렸다.
오죽하면 하석준 팀장이 다른 환자들의 회복에 방해된다며 일반 병실로 올렸다는 소문까지 돌았을까.
큼지막한 1인실은 이젠 세 식구가 된 가족이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태수도 그 순간을 같이 기뻐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 병원 병실 정말 커. 이 정도면 큰 원룸 사이즈잖아.”
“그래. 여기 보호자 침대도 좋고.”
“좀 편하게 쉬겠네. 어머니랑 같이.”
태수의 말에 정민수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보다 너 초곡리로 언제 가냐?”
“안 그래도 전화해 봤는데 당분간은 여기 있으라고 하던데.”
정민수의 말에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봤다.
“보건의 복지가 언제부터 이렇게 좋았어?”
“나도 몰라. 있으라니까 나야 좋지.”
“그건 나도 좋은데…… 너 혹시 전역이 미뤄지는 거 아니야? 한 달 단위로.”
“야, 그런 끔찍한 소리를.”
정민수가 펄쩍 뛰자 태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초곡리가 싫어?”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은 아니잖아. 내가 놀러 가서 주저앉아 있는 건 몰라도 얽매여 있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다고.”
“나도 그때 그렇긴 했지.”
“알면서 사람 식겁하게. 혹시라도 이장님한테 그런 뉘앙스 풍기기만 해 봐.”
“나도 욕먹어. 좌우간 통증도 많이 가셨으니까 경계 레벨을 좀 하향 조정하고.”
태수가 걱정하자 정민수가 빙긋 웃었다.
“나도 아니까 걱정 말고.”
“그래, 알았다.”
툭.
정민수의 어깨를 가볍게 다독인 태수는 황경자에게 다가갔다.
일반 병실로 올라온 만큼 확실히 안색이 좋아졌다.
진통제 없이도 고통을 덜 느꼈고, 폐의 회복도 순탄한지 호흡도 좋았다.
태수가 가까이 오자 황경자가 먼저 반겼다.
일전에 태수와 반나절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눠서 그런지 이젠 정말 아들같이 친근하게 대했다.
“우리 최 팀장, 이제 가려고?”
“네, 어머니. 오붓한 시간 그만 방해하려고요.”
“방해는 무슨. 최 팀장도 우리 식군데.”
“전 그렇게 생각하는데 민수는 아닌가 봅니다. 얼른 가래요.”
“우리 아들이 가라면 가야지.”
황경자가 정민수의 편을 들자 태수가 울상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이러실 줄 몰랐습니다.”
“내 배 아파서 낳았는데 내가 편들어야지.”
“역시 배 아파 난 아들이 최고지요. 하하. 그럼 어머니, 푹 쉬세요.”
“최 팀장, 항상 고마워. 알지?”
“몰라요. 다음에 와서 좀 자세하게 듣겠습니다. 그럼.”
태수가 넉살을 한껏 부리며 인사하자 황경자도 푸근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가 미소 띤 얼굴로 병실에서 나온 순간이었다.
우르릉.
천둥소리에 움찔한 태수가 복도 창문으로 다가갔다.
하늘이 꾸물꾸물했다.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사악!
생각을 하기 무섭게 비가 쏟아졌다.
게다가 빗방울이 엄청 굵었다.
그런데 시원했다.
태수는 가슴속을 쓸어내리듯이 퍼붓는 빗줄기를 그저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때였다.
툭.
건드리는 느낌에 태수가 움찔하며 옆을 바라보자 박성민이 서 있었다.
그는 태수의 어깨에 팔을 얹은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야, 왕창 쏟아지네. 하늘에 수도꼭지 고장 났나 전화 한번 해 봐야겠는데?”
“이번 주부터 장마라더니요.”
“그러게 말이야. 요즘 장마는 늦여름부터 시작인가 봐.”
“장마 지나가면 기온 뚝 떨어지겠죠.”
태수의 말에 박성민이 감성적인 눈빛으로 밖을 바라봤다.
“그러면 또 한 해가 가겠지. 뒤돌아서면 1년 지나니 나이를 어디로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선배는 음…… 그렇죠.”
“뭐냐, 그 시비가 느껴지는 말투는? 마치 ‘원래 나이를 어디로 드시는지 모르잖아요.’라는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데.”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 결혼 준비하셔야 되는 거 아닙니까?”
태수가 슬쩍 화제를 돌리자 박성민이 가자미눈으로 째려봤다. 그것도 잠시, 결혼 이야기에 뚱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 그래도 이번 겨울로 계획을 잡고 있어.”
“생각보다 늦어지네요?”
“네 형수님이 무슨 대회에 출품한다고 작업실에서 나오질 않으신다.”
“예술의 길은 멀고도 험하죠.”
태수의 말에 박성민이 딴죽을 걸었다.
“예술 하는 분이랑 결혼하기가 멀고도 험해. 무슨 비포장도로도 아니고, 아주 우여와 곡절이 끊이지 않아.”
“대신에 다시 작업 시작하실 때까지는 자유롭잖아요.”
“그건 좋단 말이지. 작업 끝나면 두 달은 매일 얼굴 볼 수 있으니까.”
박성민은 그 생각만 해도 좋은지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태수는 다양한 박성민의 표정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날씨도 습한데 선배까지 습하게 왜 그러십니까?”
“자식이 사랑을 몰라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밥 먹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사랑이 무슨 응급수술입니까?”
태수가 한마디 건네자 박성민이 인상을 구겼다.
“……너 나가. 나가서 저기 빗속에 좀 서 있어. 뭔 감성이 이렇게 메말라 비틀어졌는지.”
“안 그래도 나갈 겁니다. 집에 가야 되니까요.”
태수가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놀리고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걸어갔다.
그때 뒤에서 박성민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어떻게 아직도 인생이 직진이냐? 돌아서! 돌아서라고.”
“왜요?”
“저쪽으로 가.”
박성민이 가리키는 곳은 엘리베이터였다.
태수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사장님 호출. 내가 괜히 여기 왔겠냐? 넌 딱 걸린 거였다고.”
“아, 빨리 나갈걸.”
“후회해도 소용없다. 얼른 빨리 후딱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뛰어가도록. 이상!”
찡긋 미소를 지은 박성민이 돌아서서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걸어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본 태수도 곧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이사장실에 도착하자 정용철 이사장이 웃는 얼굴로 태수를 맞았다.
“이거 요즘 병원에서 너무 자주 보는 거 아닌가?”
“그런가요?”
“며칠 전에도 본 거 같은데.”
“저랑 좀 비슷하게 생긴 분들이 많은 편이라.”
태수의 넉살에 정용철 이사장이 어이없다는 듯 바라봤다.
“그렇게 돌아오기 싫어?”
“조금 더 시간을 주십시오.”
“그렇다고 치고. 정 선생 어머니는 일반 병실로 잘 올라가셨고?”
정용철 이사장이 화제를 돌리자 태수도 조금 긴장을 풀며 대답했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아주 수월하게 이동 마무리 지었습니다.”
“앉아서 펜대나 굴리는 내가 뭘 해.”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고 계시는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정 선생도요.”
태수의 말에 정용철 이사장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빚을 안겨 줘야지.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보건의 끝나면 군말 없이 이쪽으로 올 거 아닌가.”
“단지 그런 이유라고 하신다면 저도 더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리고 그 일은 내 전결 사항은 아니었어. 회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일이야.”
“회장님이요?”
태수가 놀라 바라보자 정용철 이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 팀장이 처음 동성종합병원으로 정 선생을 데려온 순간부터 잘 부려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셨다던데.”
“회장님은 충분히 그러실 수 있죠.”
“그동안 정 선생이 활약해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보답도 있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기도 하고.”
“복잡한데 전부 이해가 갑니다.”
수긍하는 태수를 바라보며 정용철 이사장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