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747
01750 1750화
박성민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은 탓이다.
이기준하고 같이 왔다니.
같은 팀이기에 이제 와 특별할 건 없었다. 그리고 박성민과 이기준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다.
무엇보다 이 수술은 절대 실패로 끝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기준이 목표한 걸 이루는 시간이 늘어날 터였다. 철두철미한 이기준이기에 이런 변수도 아마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이기준이 가진 욕심이라면 수술은 이미 성공하고도 남았다.
태수는 그걸 알기에 마음 편하게 돌아섰다.
이기준이 마냥 위만 탐하는 쓰레기는 아니란 걸 알기에 더더욱 안심이 되었다.
수술실에서 나온 태수는 주위를 둘러봤다.
저쪽에 휠체어에 앉아 고개 숙여 기도하는 최현주가 보였고, 그 옆에 선 유병태도 보였다.
유병태가 먼저 태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2차 수술…… 가능성이 있어?”
“선배하고 이 선생이라면 충분히.”
“그래. 알았어. 잠깐만, 잠깐 그대로 있어.”
유병태는 단단하게 일러 놓고 최현주에게 향했다.
그리고 뭐라고 몇 마디 나누는 것 같더니 최현주가 두 손을 꽉 쥐고 몸을 웅크렸다.
행동만으로도 감사함이 느껴졌다.
태수는 일부러 최현주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서로가 같은 마음이라는 걸 이렇게 보고 있는데 굳이 다가가 물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곧 유병태가 다가왔다.
“가자.”
“가?”
“김대영 씨 보호자들이 지금 오고 있어. 최현주 씨 보호자는 이미 와 있고.”
유병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중년 부부가 다가와 최현주를 끌어안았다.
태수가 계속 쳐다보자 유병태가 이어서 말했다.
“여기 입원하는 것 때문에 잠깐 자리를 비운 것뿐이야. 그래서 내가 잠시 같이 있었던 거고.”
“다들 돌아간 거 아니었어?”
“나하고 소현이만 남았어. 최현주 씨가 너무 불안해해서.”
“그럼 최 간호사는?”
태수가 묻자 뒤에서 최소현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찾으셨어요?”
“아…… 거기 계셨습니까?”
“여기 전에 간호장교 선임이 계셔서 잠깐 인사드리고 왔습니다. 의과는 다르지만 수간호사라서 흉부외과 쪽에 잘 얘기해 주신다고 합니다.”
딱딱해진 최소현의 말투에 태수가 의아하게 쳐다봤다.
“왜 다시 ‘다나까’입니까?”
“아, 선임을 만나고 와서…… 저도 모르게…….”
“갑자기 바뀌시니까 의아해서 그런 겁니다. 그보다 이제 우린 돌아가죠. 언제 끝날지 모를 수술인데 끝까지 기다리긴 힘듭니다.”
태수가 앞서자 유병태와 최소현 간호사가 뒤를 따랐다.
태수는 수술차를 타고 복귀하며 생각했다.
이번 출동에서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됐다.
김대영의 수술은 잘 끝날 거라 의심하지 않았다.
앞으로 김대영과 최현주가 써 내려갈 사랑의 기록에 이 사고까지도 추억이 되길 바랐다.
그리고 태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피하고 있는 건 아닐지 스스로를 돌아봤다.
한가지는 정확했다.
만약 다시 사랑을 한다면 김대영처럼 내 사랑에 책임을 질 수 있는 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외에 응급의료대를 향한 사람들의 환호와 자진해서 도와준 일들이 떠올랐다.
솔직히 놀랐다.
떠올릴 때마다 감사하고 가슴 벅찬 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저 기억하고 있는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도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치료할 터였다.
그중에 어느 누군가는 오늘 스트레쳐카를 밀어 준 사람일지도 모른다.
아니, 모두가 그들이란 마음가짐으로 대하고, 또 그들의 병에 공감하고 싶었다.
오늘 출동에 대해 태수는 몇 번이고 곱씹으며 병원으로 복귀했다.
태수는 상황실에 자리하고 있었다.
박성민이 부재인 상황이라 태수가 상황실에서 진두지휘를 맡았다.
피곤하고 힘든 하루였다.
그래도 할 일이 있어 출동 일지를 작성하던 중이었다. 야간 근무자인 홍진만이 슬그머니 다가와 커피를 내려놓았다.
“팀장님, 차 한잔 드시고 하십시오.”
“그래. 고마워. 그런데 상황실이 좀 썰렁하네.”
“다들 들어가셨으니까요. 팀장님이 조금 전에 억지로 집에 보내셨잖습니까.”
홍진만의 대답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었다.
“다들 고생했는데 턱 받치고 앉아 있었으니까. 그보다 내가 한눈파는 사이에 특이사항은 없었지?”
“팀장님이 상황 보시는 게 특이사항입니다.”
홍진만의 넉살에 태수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타 준 커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신 태수가 시간을 확인했다.
수술실에 환자를 인계한 후 지금까지 6시간 정도가 흘렀다.
태수가 머릿속에 잡아 놓은 예정대로라면 30분 전에 끝났어야 했다.
성공을 의심하진 않지만 전화가 빨리 걸려 오길 바랐다.
그때였다.
띠리릭.
상황실 전화기가 울리고 근무자가 곧 태수를 찾았다.
“팀장님, 1번 전화요. 박 팀장님이세요.”
“아, 감사합니다.”
태수는 앞에 있는 키폰 전화기를 조작하고 수화기를 들었다.
“선배님, 접니다.”
“아이고, 죽겠다. 그런데 넌 왜 들어가라니까 안 들어가고 거기서 뻐팅기고 있냐?”
“선배님 전화 기다렸습니다. 어떻게 됐습니까?”
태수가 묻자 박성민이 평소와 같이 말했다.
“미치는 줄 알았지. 중간에 심장 멈추고, 막 되살리고. 그뿐이야? 갑자기 혈압 팍 떨어지는데 확인해 보니까 대동맥궁 쪽에 문제 있고.”
“아찔하셨겠습니다?”
“그래도 니가 처음부터 경고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원인 찾는 것에만 몇 시간은 더 까먹었을 거라고.”
“잘 들어맞았다니 다행입니다. 이제 복귀하셔야죠.”
“여기서 바로 퇴근할 건데. 너도 들어가. 진만이한테 말해서 비상은 지방으로 돌리라고 하고.”
박성민의 말에 태수가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말했다.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몇 시간 후면 출근인데요.”
“넌 그렇지. 나는…… 오프지롱.”
“이따가 오후에 출근하셔야 합니다.”
“내가 왜? 나 오픈데? 가기 싫은데?”
“12시 지났으니까 오늘이네요. 무슨 날인지 아시죠?”
태수의 물음에 박성민의 목소리가 축 가라앉았다.
“젠장. 퇴소 날이네. 하루 더 있으라고 하면 안 되겠지?”
“선배도 싫으셨다면서요.”
“죽는 줄 알았지. 난 속성반이라서 보름밖에 안 했는데도 진짜 바깥세상이 엄청 그리웠다고.”
“그런 사람들이 한 달 만에 나오는 날입니다. 팀장님이 빠지면 안 되는 거죠.”
태수의 말이 일리가 있었는지 박성민이 툴툴거렸다.
“나 팀장 안 할래. 너무 힘들어. 개인 시간도 거의 없고,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야.”
“차관님께 말씀을…….”
“이 자식이. 넌 꼭 개그를 다큐로 듣더라. 농담이야. 내가 어떻게 이 좋은 기회를 내 발로 차 버리겠냐? 걱정 말고 이따가 오후에 보자고.”
뚝.
박성민은 뭐가 그리 급한지 태수의 인사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수화기를 다시 내려놓는 태수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흘렀다.
박성민의 농담은 처음부터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수가 기분이 좋은 건 역시 수술에 성공했단 소리 탓이었다.
역시 박성민과 이기준이 만나니 어려운 흉부 수술도 척척 해냈다.
태수가 더 이상 깊은 생각을 삼갔다.
일단 출동 일지 먼저 마무리 짓는 게 중요했다.
출동 근거와 예산 사용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고, 보건복지부 장관에게까지 올라가는 보고도 겸하고 있었다.
사실만을 정확하게 작성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태수는 그 속에 김대영의 수술 성공에 대한 내용도 추가했다.
그리고 몇 가지 더 작성을 마무리한 후에야 출동 일지를 덮었다.
탁.
그 위에 두 손을 올린 태수는 그제야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태수는 일차적인 일을 마친 후 퀭한 눈빛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지켜보던 홍진만이 결국 슬쩍 다가와 상당히 우려 어린 시선으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팀장님, 저쪽에서 좀 주무시죠.”
“무슨 소리야? 내가 쉬면 아무도 없잖아.”
“저 있잖습니까.”
“…….”
홍진만이 자신을 가리키며 눈빛을 쏘아 냈다.
태수가 아무런 대꾸 없이 바라만 보자 홍진만이 발끈했다.
“왜요? 제가 뭐요? 상황 보는 게 뭐가 힘들다고요. 연락 오면 다른 곳으로 보내면 되는 거 아닙니까?”
“…….”
“잘할 수 있다니까요. 저 못 믿으세요?”
“응.”
태수의 짧은 대답에 홍진만이 울컥했다.
“제가 또 뭐가요?”
“많이 컸네. 이제 대들기도 하고.”
태수의 일침에 홍진만이 당황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대꾸했다.
“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하하.”
“더 할 말 있어?”
“아닙니다.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럼 앉아서 상황 봐.”
태수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홍진만이 멍한 표정으로 쳐다봤다.
“저 못 믿으신다고…….”
“난 네가 열심히 한다고 하면 그게 더 불안하다고. 그냥 앉아서 오는 전화나 잘 받아. 그럼 좀 잔다.”
태수가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뒤에 남은 홍진만은 놀림을 받았단 걸 그제야 깨닫고 버럭했다.
“팀장님!”
“…….”
휙휙.
태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손만 흔들었다.
이내 상황실 한쪽에 마련된 간이침대에 누운 태수는 눈을 감았다.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했던 하루가 드디어 끝을 맞이했다.
어느새 날이 밝았다.
오전은 별다른 문제 없이 보내고 오후가 됐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박성민이 어슬렁거리며 들어왔다.
“흐아암! 좋은 점심.”
“오셨습니까.”
태수가 먼저 인사하자 앞서 출근한 오전 근무자들이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박성민은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이 가볍게 손을 들며 인사를 받아 줬다.
그가 소파에 앉자 태수가 다가서서 말했다.
“조금 있으면 도착할 거랍니다. 퇴소하고 점심 먹고 이쪽으로 온다고 했거든요.”
“그래. 바깥 음식이 얼마나 그리웠겠냐. 하암, 자식들. 그래도 후딱후딱 와야 마무리하고 가지.”
박성민의 말에 태수가 얼른 변호에 나섰다.
“그 개고생을 했는데 조금은 자유롭고 싶겠죠.”
“뭐, 그렇다고 치고. 밤새 별일 없었지?”
박성민의 물음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조용했습니다.”
“그럼 됐어. 그게 제일 좋은 소식이다. 으아아아! 기지개를 켜니까 조금 괜찮네.”
박성민은 곧 도착할 레벨 훈련 퇴소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컨디션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태수는 그런 박성민의 옆에 앉아 서류를 내밀었다.
“일단 제가 임의대로 인원을 나눴습니다만.”
“오케이. 사인은 니가 알아서 하고.”
“제가 어떻게 선배님 사인을 합니까?”
태수의 반박에 박성민이 같잖단 표정을 지었다.
“가끔 하잖아. 나 몰래.”
“…….”
태수가 입을 다물자 박성민이 힐끔 쳐다봤다.
“니 생각이 내 생각이고, 내 생각이 내 생각이니까 그냥 진행하라고. 그럼 됐지?”
“뭐, 그러시다면.”
“피곤한데 자꾸 괴롭히지 마라. 그저 늘어지고 싶으니까.”
박성민이 투덜거렸다.
이런 기분이 계속된다면 곤란하다.
태수는 박성민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고, 가라앉은 기분을 어떻게 하면 끌어 올릴 수 있을지도 생각해 놨다.
그 생각대로 태수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박성민에게 부탁했다.
“어제 어떻게 된 겁니까? 엄청나게 어려웠던 그 수술 과정 좀 말씀해 주세요.”
“자식. 또 이 형님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대수술을 듣고 싶어? 그러면 이 형이 귀찮고 조금 피곤하지만 얘기해 줘야지. 그러니까…….”
박성민은 언제 피곤했냐는 듯 신이 난 얼굴로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돌변한 그의 모습을 다른 의료진들은 이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박성민을 손에 쥐고 좌우로 흔드는 태수의 노련함에 감탄할 뿐이다.
박성민의 무용담은 길게 이어졌다.
정확한 내용보다 미사여구와 은유적인 설명이 더 많이 차지했다. 하지만 태수는 그 속에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배울 점을 머릿속에 담아 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