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1854
01857 1857화
태수가 얼떨떨한 눈빛으로 변해 갈 때였다.
그제야 지제이가 조용히 영어로 설명해 줬다.
“부족장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건 저희 부족 대대로 전해져 오는 환영식입니다.”
“환영하는 얼굴들이 아닌데요.”
“외부에서 가져온 나쁜 기운을 몰아내는 중이라서요. 좋은 기운으로 바꿔 주는 의식입니다.”
“아, 그렇군요.”
태수는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리카는 아직 샤머니즘으로 가득한 대륙이었다.
자신들만의 종교적 의식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활에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잠바크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상황이라 태수는 약간 당황하고 있었다.
태수의 당혹감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지제이의 설명에 안심이 되자 곧장 의사의 눈빛으로 돌아왔다.
태수는 빠르게 눈을 굴려 부족민들을 살폈다.
척. 척.
박자에 맞춰 발을 구르는 절도 있는 행동이 인상적이었다.
그런 그들 중에는 분명히 환자가 있을 터였다.
여기에 온 목적 또한 환자를 치료하고, 혹은 병을 앓고 있는 누군가를 조기에 발견해 치료하는 거였다.
그렇기에 태수의 시선은 날카로울 수밖에 없었다.
예리한 태수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상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숨겨진 병이라면 모를까,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는 바로바로 발견이 가능했다.
가장 먼저 신경을 자극한 건 의외로 부족장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에서 뭔가 인내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를 가장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았다.
그 후 태수는 시선을 넓게 옮겨 부족민들을 확인했다.
‘오른쪽 세 번째, 발목이 안 좋고, 그 옆의 옆에 있는 분은 손등에 상처가 있고…….’
태수는 최대한 많은 부족민들의 문제를 살폈다.
하지만 당장 움직이지는 않았다. 아직 의식이 진행 중인 탓이었다.
정말 응급한 환자가 없는 이상 태수는 이 의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이들의 오랜 전통이니 따라 주는 게 예의였다.
그 순간 태수는 의아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힐끔 시선을 돌리자 지제이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왜 저만 합니까? 다들 같이 왔는데요.”
“일행들 대표로 하는 겁니다. 닥터 최가 대표고, 또 가장 한가해 보여서요. 그리고 이거 정식으로 하면 이틀은 해야 할 거라서 약식으로 하는 겁니다.”
“가, 감사합니다.”
태수는 황당함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인사했다.
한가해 보인다는 오해가 가장 황당했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는 태수가 한가해 보일 터였다.
그래도 짧게 끝내 준다니까 더 이상 뭐라고 하지 않았다.
지제이의 말처럼 의식은 곧 마무리됐다.
마지막으로 부족장이 태수를 강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두 팔 벌려 안았다.
그리고 뭐라고 큰 목소리로 떠들자 지제이가 바로 통역해 줬다.
“환영한답니다. 이제 좋은 기운만 가득하니 여기에서 모든 일이 순탄하게 잘 풀릴 거랍니다.”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전해 주세요.”
“당연한 거라고 하시네요.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어보십니다.”
“이제부터 제가 지목하는 분들은 바로 저쪽 의사들에게 가시면 됩니다.”
“알겠다고 하십니다.”
지제이의 통역 덕에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 점이 가장 좋았다.
태수는 의식이 진행되는 도중에 발견한 환자들부터 빠르게 지목했다.
“저기 누런 티셔츠 입으신 분, 다리 한쪽 절고 계신 분…….”
태수가 한 명씩 지목할 때마다 지제이가 호명했고, 그 상대는 바로바로 의료 천막으로 향했다.
그렇게 10명 정도 보낸 후였다.
의료 천막이 붐비기 시작하자 태수는 청진기를 목에 걸며 지제이에게 말했다.
“저 좀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다들 편하게 앉으시라고 해 주세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진찰을 할 겁니다. 평소 아픈 데가 있으면 말씀해 주시고, 그게 아니어도 진찰에 협조하게 해 주세요.”
태수의 말에 지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부족의 언어로 뭐라고 크게 말하자 부족민들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았다.
태수는 지제이와 함께 먼저 부족장에게 다가갔다.
“평소 아픈 곳이 있는지 물어봐 주세요. 조금이라도 불편한 곳이 있으면 솔직하게 말해 달라고 하시고, 이후 모든 분들에게도 똑같이 해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지제이는 짧게 대답하고 바로 부족장에게 부족의 언어로 물었다.
서로 뭐라 대화가 오갔지만 태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초조해하지 않을 수 있는 건 카슈미르에서도 처음에는 이랬다.
떠날 때가 되어서야 간단한 안부를 물을 만큼의 언어를 습득했을 정도다.
언어 체계가 완전히 달랐기에 아예 알아들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 지제이가 부족장의 말을 전했다.
“잠을 깊게 못 자고 아침에 빨리 일어난다고 하시네요. 그리고 가끔 옆구리 쪽이 당겨서 인상이 찌푸려질 때도 있고요.”
“제가 청진기로 살필 테니까 계속 말씀해 주세요.”
태수가 청진기를 한쪽 귀에만 대고 청진판을 부족장의 가슴에 댔다.
부족장은 몇 년 전에 NGO가 한 차례 방문해서 그런지 청진기를 낯설어 하진 않았다.
오히려 상체를 부풀려 태수에게 내보이며 지제이와 대화했다.
지제이는 그 대화를 계속 통역해 줬다.
태수는 한 귀로 그 소리를 들으며 다른 귀로는 청진판을 통해 들려오는 내부 소리에 집중했다.
그런 태수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췌장 쪽 문제란 느낌은 받았는데 그 원인이 명확하지 않았다.
해당하는 약을 처방하면 당장의 아픔은 줄어들겠지만, 췌장 기능이 저하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가만히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태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정말 췌장 쪽의 문제일까?
췌장 부근이 아프다고 무조건 췌장염을 의심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인체의 감각기관은 전혀 엉뚱한 곳에 통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가령 신장이 아픈데 등이 뻐근한 경우가 많다.
그건 온몸의 신경들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췌장의 신경과 가장 밀접하게 연결된 흔한 질병은 뭘까?
태수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부족장의 상복부, 즉 위장 부근이 살짝 들어가도록 눌렀다.
“크윽!”
부족장의 입에서 순간 억눌린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족민들이 지켜보는 앞이라서 최대한 고통을 참았을 것이다.
부족장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건 태수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췌장에서 조금 떨어진 위장 쪽이었다.
태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확인차 지제이에게 통역을 요청했다.
“가만히 있을 때는 이쪽이 아픈데, 막상 누르니까 누른 부위가 더 아프지 않느냐고 물어보세요.”
“네, 맞답니다. 여기가 아픈 곳인 줄 알았다고 하시는데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보다 소화가 잘 안 되고, 또 먹을 기분도 안 들고 배고파서 억지로 먹지 않는지 물어보세요.”
“그것도 맞답니다. 계속 속이 불편해서 가끔은 잠도 제대로 못 잔다고 하시네요.”
지제이가 통역하는 사이 부족장은 놀란 눈빛으로 태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태수는 그런 부족장을 바라보며 지제이에게 말했다.
“가벼운 위염 증상이라고 하세요.”
“위염…… 이란 단어가 없는데요.”
“그럼 위에 이렇게 자잘한 상처가 나서 하얀 염증이 생긴 거라고 하세요. 대충 비슷한 느낌으로 통역하시면 알아들을 겁니다.”
태수의 말에 지제이가 잠깐 설명하자 부족장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러자 지제이가 얼른 태수에게 물었다.
“이렇게 되면 큰 문제가 생기는 거 아니냐고 여쭤보시는데요. 아직 후계자가 없어서 물러날 수 없다고 하시고요.”
“약만 며칠 잘 먹으면 된다고 전해 주세요.”
“그러면 안 아프냐고 물어보시는데요?”
“며칠 후면 배고픔도 느끼고, 고기도 잘 소화시킬 거라고 하세요. 잠시만요. 바로 돌아오겠습니다.”
태수는 부드럽게 미소 지은 후 양해를 구하고 잠깐 의료 천막으로 향했다.
진료하던 유병태가 태수를 보고 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약 좀 챙기러 왔어. 저쪽에서 해결할 수 있는 건 해결해야지. 그보다 어때?”
“아무런 문제 없어. 이 정도 상처들이면 아주 편안하게 있다가 갈 수 있을 거 같아.”
“나도 그러고 싶은데 장담은 못하겠다. 여기 온 사람들이 부족 전체가 아니래. 그리고 남은 부족은 엄청 많고.”
그 소리에 미소 짓고 있던 유병태의 얼굴이 실망으로 급격히 물들었다.
“그래. 놀러 온 건 아니니까.”
“좌우간 고생하자고. 시작이 반이라잖아.”
태수는 대화하는 와중에 챙겨 든 가방을 어깨에 들쳐 멨다.
다시 부족장 앞으로 다가온 태수가 가방을 내려놓고 약병의 약을 조금 덜어 비닐봉지에 담아 건넸다.
그리고 설명은 지제이에게 했다.
“식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걸로 조금씩 하시고, 식사 후에 이거 하나씩 먹으면 된다고 하세요.”
“지금도 아프다는데요.”
“팔 좀 내밀어 달라고 하시고요. 진통제하고 위산 억제제를 놓을 거니까 당장은 아프지 않을 거라고 해 주세요. 그렇다고 약 거르지 마시라고 꼭 전해 주시고요.”
태수는 말을 하는 사이 가방 입구를 조금 넓게 펼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사기와 약병을 하나씩 꺼내 부족장에게 주사하고, 또 다른 주사기와 약병으로 재차 주사를 놓았다.
가방 속에는 포장을 뜯지 않은 주사기가 엄청나게 많았다.
태수에겐 철칙이 하나 있었다.
일회용 의료 도구는 절대 재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태수뿐만이 아니라 모든 의사들이 마찬가지였다.
하나의 주사기를 여러 사람에게 돌려서 사용하면 큰일 난다.
주사기에 묻은 혈액을 타인의 몸에 주입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통 헌혈을 할 때 급작스럽게 필요한 순간이 아니라면 가급적 몇 가지 검사를 진행한다.
서영우와 최소현 간호사를 같이 보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런 절차를 생략해야 하는 응급한 경우도 있지만 그건 피치 못할 때였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미리미리 헌혈을 받아 놓는 것이다.
하지만 주사기는 그런 장치가 전혀 없었다.
재사용하게 되면 C형 간염이나 패혈증, 심각하면 HIV에 걸릴 수도 있다.
간경변이나 간암으로까지도 발전한다.
얼마 전 한창 언론에서 비난했던 한 병원의 주사기 재사용도 그런 위험 탓이었다.
실제로 집단 감염 현상이 발생하기도 했다.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이 수두룩한 한국에서도 큰 문제인데, 병원에 갈 수 없는 이런 지역에선 무조건 새 주사기를 써야 한다.
진통제와 위산 억제제를 놓고 조금 시간이 지나자 부족장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가 뭐라고 말하자 지제이가 통역해 줬다.
“여러분도 NGO처럼 믿을 수 있을 거라고 하시네요.”
“믿어 주시는 만큼 좋은 치료로 보답하겠다고 전해 주세요.”
“이렇게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하십니다.”
“별말씀을. 자, 그럼 우리는 다른 분 치료로 넘어가죠.”
태수는 부족장의 뜨거운 눈빛을 미소로 받고 지제이와 함께 옆으로 이동했다.
그 후로 태수는 여러 부족민들을 살폈다.
약 하나로 치료될 수 있는 병들이 상당했다.
그러나 반대로 상황이 좋지 않은 환자들도 있었다.
태수는 그런 환자들은 바로 의료 천막으로 보냈다.
시간을 들이면 충분히 고칠 수 있는 병들이었다.
하지만 태수는 여기서 1차적인 진료를 중심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병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병인지 파악하는 걸 우선으로 했다.
뒤에 있는 의사들의 실력을 알기에 그쪽에서 2차 치료를 받게 하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태수는 도성민과 교대해 아침 식사를 했다.
부족민들도 아침을 거르고 온 터라 넉넉한 비상식량을 나눠 먹기도 했다.
비상식량에 함께 동봉된 간식은 따로 모아 부족의 아이들에게 나눠 주며 친분을 다졌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부족민들에게서 큰 병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까 유병태가 말한 대로 시작이 좋았다.
게다가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었다.
사방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 진료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부족민들이 예상외로 많았다.
태수는 아직 남은 부족민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좀 더 오시던데, 이제 다 온 건가요?”
“아니요. 반 정도 온 겁니다.”
“네?”
“저희가 이 일대에서는 상당히 큰 부족이라서요. 부족민들도 좀 많은 편입니다.”
설명을 하는 지제이는 자부심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