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099
02102 2102화
평소라면 잔소리를 엄청 길게 했겠지만 그조차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태수는 포크와 나이프를 쥔 손을 멈추고 잠시 생각했다.
두 사람의 하소연은 결코 과하지 않았다.
다들 그동안 상당히 빡빡한 일정을 보냈다.
태수도 그렇지만 팀원들 역시 정신적으로 메말라 가고 있었다.
신혼여행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박성민도 처음에는 잔소리에 잔소리를 거듭했지만 이젠 조용했다.
다른 팀원들도 아우성치다 지쳐 멈춘 지 오래였다.
무엇보다 김혁권과 박성민의 입씨름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서로 예민할 대로 예민해져 자극적인 상황을 알아서 피했다.
태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원한 건 아니었다.
계속 마음 쓰였던 일들이다.
이젠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란 판단이 섰다.
달그락.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태수가 휴대폰을 들었다.
전화를 거는 상대는 닥터 데이먼이었다.
“닥터 데이먼.”
“오, 닥터 최, 상당히 이른 시간인데 무슨 일이시죠?”
“저희 이제 좀 쉬겠습니다.”
태수가 뜬금없이 선포하자 닥터 데이먼의 목소리가 조금 당혹스럽게 변했다.
“쉬신다고요?”
“살고 봐야겠습니다. 다들 너무 지쳤습니다.”
“음.”
“일단 재충전 좀 하고. 이후 수술은 그때 상황 봐서 다시 결정하겠습니다.”
태수의 선언에 닥터 데이먼의 목소리가 빠르게 들려왔다.
“갑자기 이러시면……. 계속 VWD 환자들이 연락해 오는 중인데요.”
“저희도 한계가 있습니다.”
“그거야 알지요.”
“그리고 중증 환자들은 거의 수술했잖습니까. VWD도 경증은 수술보다 관리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아실 거고요.”
태수가 의학적으로 접근하자 닥터 데이먼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알고 있습니다.”
“무리하게 수술하지 말고 요양부터 좀 하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이제 VWD 수술을 완전히 끝내신다는 의미입니까?”
“정말 급성으로 악화된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 환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라도 숨 좀 돌리겠습니다.”
“닥터 최 의견이 그러시다면.”
닥터 데이먼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했다.
연 5회 수술은 이미 넘어선 지 오래였다.
면허증이나 자격증이란 빌미도 이젠 통하지 않았다.
사실 태수와 팀원들은 그 이상의 수술을 진행했다.
편법을 써서 증서를 취득하는 데 도움을 준 일에 대한 보답의 의미도 있었다.
그런 모든 상황을 알기에 수술을 강요할 수가 없었다.
태수도 그런 점을 닥터 데이먼의 목소리로 판단하고 이어서 말했다.
“그동안 여러모로 신경 써 주신 점 모르지 않습니다.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거야 뭐…….”
“그리고 한국으로 들어갈 일정을 확실히 정한 건 아닙니다.”
“…….”
“한숨 돌리며 이후 저희 일정을 좀 더 확실하게 잡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태수가 거기까지 말하자 닥터 데이먼의 차분한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힘드신 걸 알면서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죠.”
“양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당장 닥터 최가 담당하는 환자가 없으니 휴식에도 문제가 없을 겁니다.”
닥터 데이먼의 말에 태수가 안도했다.
“그 점도 감사하고요.”
“아닙니다. 좀 갑작스럽지만 편하게 쉬시기 바랍니다.”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태수가 휴대폰을 내렸다.
좌우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정민수와 도성민의 모습에 태수가 엄지를 내보였다.
척.
“오늘부터 제대로 휴가.”
그 말과 동시였다.
정민수와 도성민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야호!”
“휴가다!”
아이들처럼 기뻐하는 그 모습에 태수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진작 좀 여유를 줄 걸 그랬나.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기까지 멈출 줄 모르는 게 태수의 성격이었다.
그 추진력에 팀원들이 더욱 힘들지 않았나 스스로 조금은 반성하게 됐다.
그런 태수를 보며 도성민이 물었다.
“넌 안 즐거워?”
“즐거워.”
“표정은 썩었는데?”
“그냥……. 그동안 내가 너무 밀어붙이지 않았나 해서.”
“쓸데없는 생각은. 그렇게 진행하지 않았으면 축축 늘어졌을 거 아니야.”
도성민의 말에 정민수가 동조했다.
“맞아. 중간중간 쉬었으면 지금도 계속 면허증이네, 자격증이네 이러고 있었을 거야.”
“특히 선배. 신혼여행을 3차까지 잡아 놓으신 분인데 오죽했을까.”
“한 차수 때마다 3박 4일 스케줄이라고.”
기분이 좋아졌는지 도성민과 정민수의 대화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박성민에 대한 험담을 멈추지 않고 바로 간호사들로 넘어갔다.
“간호사님들은 또 오죽하셔?”
“내 말이. 쇼핑 못해서 몸살 날 지경이시잖아.”
“난 이번 쇼핑이 버킷리스트에 있는 줄 알았다니까.”
줄줄 이어지던 대화도 계속되진 않았다.
적당히 알아서 멈추자 태수가 옅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다들 이제 하고 싶은 것 좀 하자.”
태수의 제안에 두 사람 모두 활짝 웃었다.
“그래. 그러자고.”
“갑자기 밥맛이 확 좋아지는데?”
“난 먹고 잘 거야.”
“나도 일단 한숨 더 자고 움직일 거라고.”
엎치락뒤치락 대화하며 아침 식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태수도 내려놓았던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들었다.
모두 좋아하는 일이면 태수도 좋았다.
휴가 소식은 아침 식사 후 바로 알려졌다.
당연히 호텔이 들썩일 정도로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했다.
하지만 바로 호텔 밖으로 나가진 못했다.
누적된 피로부터 풀기 위해 다시 각자 숙소로 돌아가 잠부터 청했다.
그리고 3일이 지났다.
누적된 피로를 날려 버린 팀원들은 호텔 밖으로 나갔다.
워싱턴에서 못한 쇼핑부터 시작하겠다며 단단한 포부를 밝히고 떠나갔다.
박성민과 엄예림도 다시 신혼여행을 떠났다.
다들 떠나가고 태수만이 홀로 호텔에 남아 있었다.
태수는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한국 상황을 파악하고 앞으로의 일정도 잡아야 했던 탓이다.
다방면으로 현 상황을 알아야 하기에 휴대폰이 식을 틈이 없었다.
그래도 편안한 숙소에서 하는 전화라 전혀 힘들지 않았다.
생각난 김에 아이들과도 통화하고, 또 여러 지인들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난 후였다.
모두의 여행과 쇼핑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었다.
태수도 하루는 그들과 함께 쇼핑했다. 구입한 가족과 아이들의 선물은 그 자리에서 바로 한국으로 보냈다.
태수는 그렇게 쇼핑을 마무리 지었지만 팀원들은 아니었다.
오늘도 다들 쇼핑하러 떠났다.
숙소에 남은 건 도성민과 서영우뿐이었다.
그들도 연이어 끌려간 쇼핑에 지쳤는지 오늘은 쉬고 싶단 연락만 받았다.
오전에는 편안하게 쉰 태수도 오후가 되어서야 슬슬 호텔 밖으로 나섰다.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는 맑은 날이었다.
태수는 일광욕도 할 겸 산책을 시작했다.
우선 패더슨 공원으로 향했다. 도심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자연을 즐길 수 있는 장소로 그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태수는 어느새 패더슨공원에 도착해 천천히 거닐었다.
공원은 한가로웠다.
잔디밭에 편안하게 누워 책을 읽는 모습이 심심치 않게 보였다. 친구나 연인이 함께 와서 즐거운 수다를 나누기도 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을 그림으로 담기도 했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백인과 흑인이 대부분이었고, 유색인종은 간간히 보였다.
관광객보다는 지역 주민들이 많았다.
그들 중 일부는 태수를 힐끔거렸다.
“저기 닥터 최 아니야?”
“맞는 거 같네.”
“여기서 보네.”
“그러게 말이야.”
태수에 대한 대화도 그 정도가 끝이었다.
그래서 태수도 편했다.
타인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서양 문화가 태수에게는 여유로 다가왔다.
공원을 한 바퀴 돌며 태수는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앞으로 응급의료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VWD 전문 수술팀을 한국에서도 유지해야 하나?
앞으로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하나?
여유로운 시간이라 그런지 여러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딱히 정리하려 애쓰지 않았다.
그렇다고 방치할 생각도 없었다.
정리가 되는 부분은 정리를 하고, 또 그렇지 않은 부분은 뒤로 미뤄 두기도 했다.
여러 생각을 하는 사이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렇게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
공원을 벗어난 태수는 여전히 다양한 생각을 이어 가고 있었다.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그러다 배고프면 식당에 들어가서 밥 먹고, 좀 더 늦어지면 호텔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주변이 조금씩 어둑어둑해지며 네온사인에 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미국의 밤도 한국과 비슷했다.
해가 지면 술집들이 흥했고, 삼삼오오 웃고 떠들었다.
주변이 시끄러워도 태수는 스스로의 생각을 고찰하는 데 좀 더 집중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걸어가던 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주변이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던 태수는 조금 더 지난 후에야 그걸 알아챘다.
그리고 멈춰 선 태수는 주변을 둘러보다 멈칫했다.
할렘가였다.
각종 범죄가 판치는 곳으로 유명했다.
가장 유명한 할렘가는 뉴욕 맨해튼 뒷골목이었다.
알프레드 과장이 그곳에는 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을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본 태수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건널목 하나 건너왔는데 이렇게 달라질 수가 있나.”
패더슨 공원에서 멀지 않은 도로였다.
그런데 왕복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좌우가 너무도 달랐다.
저쪽은 불빛이 번쩍였고, 여기는 어두웠다.
그저 느낌이 그랬을 뿐, 확연하게 차이 나는 건 아니었다.
태수는 이 길이 낯설진 않았다. 병원에서 호텔로 돌아올 때 지나는 길이었다.
주로 미니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가끔 맥주 한잔하기 위해 걷기도 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평소 걸어 다니던 길은 건널목 반대편이란 거였다.
그런데 분위기는 확실히 달랐다.
벌써 골목 안쪽에서 헐렁한 옷을 입은 흑인들이 태수를 경계하고 있었다.
태수를 가리키며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한 명은 휴대폰을 들고, 다른 두 명은 태수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괜히 문제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할렘가의 모든 사람들이 위험하진 않다.
여기도 사람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폭력단이나 범죄와 연루된 인물들이 많고, 총기 사고가 잦았다.
공권력으로 무장한 경찰도 깊숙이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무법지대였다.
그런 위험성을 알기에 여기 오래 머물 생각이 없었다.
둘러보자 저쪽에 건널목이 있었다.
그걸 발견한 태수는 그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건물을 몇 개 지나쳐 가던 중이었다.
태수가 힐끔 돌아보자 방금 전 봤던 흑인들이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품에 손을 넣은 모습도 확인했다.
그런 행동은 총을 가졌을 가능성이 높단 뜻이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들이 다루는 총만큼 위험한 게 없다.
총이라면 지긋지긋하게 경험한 태수였기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래서 미국이 싫어.’
이에 비해 한국은 정말 안전한 나라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발걸음은 좀 더 빨라졌다. 무서움보다 괜한 시비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휙휙.
발걸음이 빨라진 만큼 건물들도 바로바로 지나쳐 갔다.
그렇게 건널목에 가까워지던 중이었다.
골목길에서 웬 흑인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왔다.
“헉헉!”
거친 숨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허리를 굽히고 고통스럽게 숨을 토해 내는 모습이 멀리서부터 뛰어온 느낌이었다. 그리고 꺼먼 얼굴에 투명한 땀방울이 고루 맺혀 있었다.
30대 후반?
존스홉킨스 병원의 흑인 의료진들과 교류가 있기에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그 정도로 추측됐다.
특별히 몸에 문제가 있어 보이진 않았다.
폐가 터질 듯이 뛰어온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