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2511
02514 2514화
그때 방금 커피를 받아 든 남자가 대뜸 다가와 태수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최 팀장님.”
“네, 안녕하세요.”
“저기 실례지만, 뭐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커피를 든 남자의 표정이 상당히 무거웠다.
안 좋은 일임을 직감한 태수는 그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승낙했다.
“어떤 점이 궁금하십니까?”
“실은 제 아내가…….”
커피를 든 남자가 조금 어두운 목소리로 자기 사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여러 상황들이 겹쳐 안타까운 내용이었다.
태수를 보고 살갑게 인사를 하려고 접근한 사람들의 표정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저런…….”
“쯧.”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환자, 혹은 보호자였다. 그저 외래를 보러 온 이들도 있지만, 그들도 넓은 의미로는 환자였다.
그래서 커피를 든 남자의 사정에 동질감을 느끼고 함께 안타까워했다.
반면 태수는 그런 그의 사정을 흘리지 않고 모두 귀담아들었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나름대로 조언도 건넸다.
“제가 보기에는…….
“그러면 그런 경우에는…….”
“그건 또 이렇게…….”
태수는 상대에게 건네는 한마디도 허투루 말하지 않았다.
그가 느끼는 감정을 감싸고, 또 그의 사정을 이해해 그 입장에서 조언하려 노력했다.
사람들은 그런 태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환자가 아니라고 밀어낼 수도 있고, 진료 시간이 아니라서 외면할 수도 있었다.
그저 오다가다 만난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표정 하나, 한마디에 담긴 진심을 알아챘다.
“최태수가 왜 대단하냐고 묻는다면?”
“바로 저 모습이지.”
“그래. 쉽지만 쉽지 않은 일이야.”
사람들은 일행들과 대화하며, 또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태수의 진솔한 응대에 진심 어린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고민거리가 많이 해결됐는지 커피를 든 남자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팀장님, 감사합니다. 정말 막막했는데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좀 감이 잡힙니다.”
“그저 제 생각을 말씀드린 겁니다. 그게 정답은 아니니까 더 좋은 방법을 한 번 더 찾아보시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
태수의 진솔한 말에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겠습니다. 후우, 속이 다 시원하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보다 커피 다 식었는데…….”
“괜찮습니다. 아니, 딱 좋습니다. 더 방해하면 실례겠네요. 그럼 먼저.”
꾸벅.
커피를 든 남자가 미소 띤 얼굴로 다시 한 번 깊게 고개 숙였다.
그리고 멀어져 가면서도 뒤돌아 태수를 한 번 더 바라보고,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거듭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태수도 마찬가지였다.
거듭된 인사도 흘리지 않고 마주 고개 숙이며 인사했다.
“네, 하하……. 아, 또. 네네, 살펴 가십시오.”
너무 잦은 상대의 인사에 태수가 난감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그가 떠나가자 태수의 주변에 슬슬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용건은 다양했다.
“저기, 사진…….”
“사인 좀…….”
“저도 상의를…….”
이런저런 얘기가 한 번에 들려 뒤섞였다.
태수는 그 상황에서도 표정 하나 구겨지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빠라밤.
휴대폰 벨소리가 울리자 태수가 얼른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그렇게 휴대폰을 꺼내 든 태수는 액정에 떠오른 이름에 가볍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금 김선미를 검사하고 있는 김규석의 전화인 탓이다.
김선미가 병원 건물 안으로 들어간 지 이제 30여 분이 지났다. 첫 검사를 시작했을 시간인데 전화가 왔단 사실이 너무도 이상했다.
불길함?
‘무슨.’
그런 생각을 어이없다고 치부한 태수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그래, 김 선생, 오랜만이야.”
“팀장님, 좀 와 보셔야겠습니다.”
김규석은 인사도 생략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호출했다. 그 소리에 태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지금 어디지?”
“2층 CT실입니다.”
“……바로 갈게.”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은 채 대답한 태수가 휴대폰을 내렸다.
그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던 걸까?
주변에 몰려든 사람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거리를 벌렸다.
고마웠지만 지금은 그에 대해 인사할 여유조차 없었다. 김규석의 호출에 온 신경이 그쪽에 쏠려 있었다.
휙!
바로 돌아선 태수는 빠르게 커피숍을 벗어났다.
그리고 빠르게 걷던 걸음은 끝내 뜀박질로 바뀌었다.
잠시 후.
끼익.
CT 제어실 문이 열렸다.
열린 문틈으로 살짝 상기된 얼굴의 태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제어실엔 김규석이 자리하고 있었고, 그 옆에 영상기사가 CT 기계를 컨트롤하고 있었다.
제어실 앞엔 전면이 유리로 되어 있었다.
유리 너머로 거대한 CT 기계가 보이고, 그 속에 김선미가 환자복을 입고 반쯤 들어가 있었다.
태수는 가쁜 숨을 억누르며 김규석에게 다가갔다.
김규석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 숙이며 말했다.
“인사를 먼저 드리고 싶지만, 그게 좀…….”
“후우, 후. 그건 나중에 하고. 그래서 무슨 일이야?”
태수가 바로 묻자 김규석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좀 봐 주십시오……. 기사님, 그 화면 좀요.”
“알겠습니다.”
탁, 슥슥.
영상기사가 빠르게 촬영된 영상을 뒤로 돌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다다른 간의 단면 사진이 빠르게 뒤로 돌아가는 모습은 시간을 거스르는 느낌을 줬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수는 진지한 얼굴로 모니터에 집중했다.
간의 상태는 이렇게 단층촬영으로 봐도 썩 좋지 않았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좀 더 뒤로 돌아가던 중 간의 단면 사진에서 우엽 쪽에 하얀 점이 시작됐다.
그 점은 더 뒤로 돌릴수록 커져 갔다.
그걸 본 순간 태수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점이 커지면 커질수록 태수의 두 눈이 가늘게 떨렸다.
‘저, 저건?’
꽈악.
뭔가 직감한 태수의 두 주먹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변화하는 태수의 표정을 본 김규석이 바로 지금까지 진행된 상황을 설명했다.
“조영제를 투여하고 간을 집중적으로 촬영하다가 발견한 겁니다.”
“…….”
“아시겠지만 종양입니다. 그리고 하얀색으로 찍히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김규석이 설명을 이어 가려던 찰나 태수가 손을 뻗었다.
스윽.
“그만. 거기까지만 얘기하자.”
“팀장님, 이건…….”
“그만 얘기하라고!”
갑자기 태수가 버럭 소리쳤다.
두 눈에서 쏟아져 나오는 강렬한 눈빛에 김규석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 모습에 태수는 숨을 길게 내쉰 후 말했다.
“후우. 김 선생, 무슨 생각 하는 줄 아는데…… 일단 지워.”
“……알겠습니다.”
“지금은…… 지금은 그렇게 하자. 그리고 전신 CT로 전환해. 조영 MRI도 바로 준비하라고 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김규석은 굳어진 얼굴로 대답과 동시에 전화기를 들었다.
그사이 태수는 영상기사에게 부탁했다.
“기사님, 시작점으로 좀 더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도 영상은 계속 촬영되는 거죠?”
“그럼요. 말씀하신 대로 전신 CT로 전환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영상기사는 딱딱한 태수의 목소리에 긴장한 채 대답했다.
그가 긴장할 만했다.
지금 태수의 눈빛은 말 그대로 살벌했다. 설령 김혁권이 와도 지금의 태수에겐 어떤 말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때 영상기사 앞에 있던 스피커에서 김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요, 이게 왜 이러죠? 전에는 이런 적이 없었는데요.
그 소리에 영상기사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태수에게 향했다.
태수 또한 멈칫했다.
김선미가 CT의 변화를 이렇게 빨리 눈치챌 줄 몰랐다. 그간 매년 건강검진을 받았단 EMR을 이렇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 생각도 잠시, 태수는 앞에 있는 마이크로 다가갔다.
“어머니, 저 태수입니다.”
-어? 어, 그래. 이거 최 팀장이 바꾼 거야?
“네. 어머니 몸속 구석구석 전부 다 봐 드리려고요.”
-뭘 그렇게까지 해. CT는 좀 답답한데…….
“제가 우격다짐으로 모셔 왔는데 확실하게 해야죠. 조금만 더 참아 주세요.”
태수가 마이크에 대고 부드럽게 말했다.
영상기사는 그런 태수의 모습을 곁눈질로 훔쳐봤다.
밝은 목소리를 내기 위해 입가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런 반면 이마부터 인중까지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 모습은 놀랍다 못해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
그에 대해선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신경 써서 단층촬영을 진행하는 것뿐이었다.
그사이 김선미를 안심시킨 태수가 마이크에서 입을 뗐다.
유리창 너머 김선미의 모습을 굳은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때 김규석이 태수에게 다가와 나지막이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 MRI 준비시켰습니다. 아마 우선순위가 바뀌어 어머니가 먼저 검사를 받게 되실 겁니다.”
“그래. 그런데 이게 첫 검사인가?”
“네. 앞서 Blood Test(혈액검사)로 피를 뽑았고, 실질적 검사는 이게 처음입니다.”
“혈액검사……. 아니, 내가 전화할게. 좀 지켜봐 줘.”
“걱정 마십시오.”
김규석은 태수만큼이나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태수에게 한 소리 들어서 기분 나쁘단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김규석은 지금도 화면에 떠올라 있는 저 흰점의 정체를 예상하고 있기에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그사이 옆으로 이동한 태수는 직접 전화기를 들어 혈액검사실에 전화했다.
바로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혈액검사실입니다.”
“저 최태수입니다.”
“안녕하셨습니까. 팀장님, 저 배현궁입니다.”
상대가 빠르고 간결하게 자신을 밝혔다. 진단의학과 소속 4년 차 레지던트로 태수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태수는 마침 잘됐단 얼굴로 물었다.
“지금 검사 중인 김선미 환자 혈액 분석 진행 중이지?”
“김선……. 네, 맞습니다.”
“배 선생, 지금부터 내 얘기 잘 들어.”
“네? 아, 네. 말씀하십시오.”
배현궁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흘렀다.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낮고 빠르게 오더했다.
“혈액검사에 AFP 포함시켜. 그리고 PIVKA-II 검사도 더 해 주고.”
“저기, 팀장님, 그 두 가지 검사는…….”
“쉿. 아무 소리 말고 최우선으로 진행해. 배 선생이 직접 진행하고, 그 결과는 EMR에 올리지 말고 나한테 직접 가져와.”
“……좀 이따가 찾아뵙겠습니다.”
“아니, 내가 전화하면 그때 가져다주라. 그리고 부탁한다.”
태수는 딱딱한 목소리로 인사 후 수화기를 내렸다.
다시 시선을 유리 너머 김선미에게로 향했다.
CT 기계 안에 누워 있는 그녀의 모습을 향한 태수의 눈빛이 계속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CT 검사를 시작으로 이어진 모든 검사를 태수가 함께했다.
이동은 휠체어의 힘을 빌렸다.
김선미가 휠체어에 앉아 있고, 태수가 뒤에서 천천히 밀며 다음 검사실로 이동했다.
김규석은 태수의 뒤에서 묵묵히 따랐다.
그러던 중 앞에 앉은 김선미가 슬쩍 돌아보며 태수에게 사과했다.
“아침에 화내서 미안해.”
“네?”
“바쁘고 중요한 사람인데 신경 쓰여서 이렇게 같이 다니는 거잖아. 내가 최 팀장 마음을 알면서도 모질게 말해서 미안하다고.”
“어머니도 참. 우리 사이에 그런 말씀은 섭섭하죠. 데이트……. 에이, 어머니랑 공원 한번 못 걸어 본 게 죄송하네요.”
태수는 그렇게 미소 띤 얼굴로 김선미를 달랬다.
스윽.
김선미가 슬쩍 손을 들어 뒤쪽으로 향해 왔다. 태수는 눈치껏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맞잡자 김선미가 나지막이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우리 공원 산책 가자. 그리고 이렇게 하나하나 신경 써 주고, 너무 고마워.”
“…….”
“검사 다 끝나면 같이 가서 밥 먹자. 내가 특별히 맛있는 거 해 줄게.”
“……네. 뭔지 몰라도 꼭 먹으러 갈 겁니다.”
“그래. 그러자.”
대답과 동시에 김선미는 잡은 손에 가볍게 힘을 줬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