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056
03060 3060화
계속된 상황에 태수는 속에서 열이 훅 올라왔다. 하지만 대부분 알고 지내는 기자들인데 아침부터 얼굴 붉히고 싶지 않았다.
한 번 화를 누르고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아침부터 그렇게 소리치면 목 안 아프십니까?”
“그러니까 몇 마디만 해 줘요. 우리 밤새 기다렸다니까.”
“저 이제 출근하는 길입니다. 들어가서 우리 입장부터 정리해야죠.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태수가 서글서글하게 분위기를 어루만지자 날이 서 있던 기자들도 살짝 누그러졌다.
그래서 그런지 농담 같은 타박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뭐 하고 이제 입장 정리를 합니까?”
“밤에요? 자야죠.”
“이 판국에 잠은 무슨. 어? 설마, 이 난리도 뒤로할 일이면……. 혹시 올해는 국수 먹나?”
슬쩍 짓궂은 질문이 들려왔다.
길게는 군병원 때부터 봤던 기자들이라 웬만한 사정은 그럭저럭 알고 있었다.
서로 경조사까지 챙기는 사이이기에 할 수 있는 농담이기도 했다.
그만큼 분위기가 풀어졌단 뜻이라서 태수도 빙그레 웃고 말았다.
“분식집에서 국수 사 드린다니까요.”
“또 이렇게 어영부영 넘어가는 겁니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닌 상황인 거 같은데요.”
태수가 슬쩍 상기시키자 다들 아차한 얼굴로 변했다.
그 민망함을 괜히 태수에게 돌렸다.
“아, 뭐 해요. 빨리 가서 뭐든 정리해서 나와요.”
“그야 그렇게 할 건데…….”
“알았어요, 알았다고. 조용히 하고 있을게요. 이 난리통에 최 팀장만큼 한가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환자는 무사히 회복 중입니다.”
태수는 조금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기자들 모두가 그 대답을 가장 태수답다고 느꼈는지 빙글 미소 지었다.
“맨날 환자 타령이야.”
“하하.”
“우리는 최 팀장 잘 알아요. 의심해서 온 거 아닌 건 아실 거고, 우리가 오피셜로 기사 쓸 순 없으니까 확인차 왔다고 생각합시다.”
“네. 얼른 확인시켜 드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세요.”
가볍게 인사한 태수는 돌아서서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몰려 있던 기자들도 다시 대기 상태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날을 잔뜩 벼린 표정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가한 분위기였다.
얇은 점퍼를 두르고 쪽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고, 주머니를 뒤적이며 내리막길 초입까지 걸어가는 모습도 보였다.
태수가 다시 나올 때까지 더 이상 소란은 없을 듯했다.
태수의 말.
그건 신뢰였다.
단 한번도 약속을 어기지 않았던 과거가 크게 도움이 됐다.
태수는 어느새 현관에 다가섰다.
기다리고 있는 두 사람 앞에 서서 가볍게 인사했다.
“시끄러운 아침입니다.”
“네, 그러네요.”
유지혁 비서실장은 나름 심각한 얼굴을 살짝 풀며 부드럽게 맞이했다.
그런 반면, 박주찬 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돌아가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눈치가 역력했다.
“기자들이…… 저 사람들이…… 저렇게 조용한 종족들이 아닌데…….”
“조용하던데요.”
“그러니까요. 저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의 목소리에 황당함이 짙어졌지만 태수는 여전히 덤덤했다.
“다 같은 사람인데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아무튼 기자들을 조용히 시키셨지만, 어쨌든 기다릴 걸 알고도 출근하신 거네요?”
“오프가 아니니까요.”
태수의 답이 너무도 간결했다.
반면, 평행선과 같은 대화가 계속되자 박주찬 형사는 순간 이마를 짚었다.
턱.
“아이고, 머리야.”
“병상 준비할까요?”
“거참…….”
박주찬 형사가 슬쩍 흘겨봤다.
그만큼 태수의 물음이 엉뚱하고 황당한 모양이었다.
태수는 은은한 미소 그대로 차분하게 말했다.
“화살은 이미 날아왔는데 피한다고 대수는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기자들하고 진짜 간담회라도 하시게요?”
“입장 정리란 걸 좀 하고 난 후에요.”
태수가 수더분하게 답한 순간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유지혁 비서실장이 조용히 한마디 했다.
“병원장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어제 서울에 출장……. 아, 늦게라도 내려오셨겠네요.”
“네. 성호병원장님하고 술 한잔하시다가 날벼락 맞고 바로 내려오셨답니다.”
“저런. 좀 주무셨나 모르겠네요. 일단 올라가서 얼굴부터 봬야겠습니다.”
태수가 미안한 얼굴로 한마디를 꺼내자마자 기다렸단 듯, 유지혁 비서실장이 휴대폰을 들었다.
“연락해 놓겠습니다.”
“아니요. 굳이 연락까지야. 기왕 휴대폰 꺼내신 김에 기자분들 아침 식사 좀 챙겨 주세요.”
“식사요?”
엉뚱한 부탁에 유지혁 비서실장이 살짝 당황했다.
태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부연설명에 나섰다.
“다 먹고살자고 저러는 건데 너무 민감할 거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배부르면 느긋해지니까 아주 푸짐하게 먹이면 더 좋겠네요.”
“역시 실장님은 뭘 아십니다.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유지혁 비서실장과 대화를 마치고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눈을 마주한 박주찬 형사가 살짝 질린 얼굴로 물었다.
“난 왜요?”
“발목 접질린 의경 친구는 신속으로 보내시라고요.”
“그거 좀 있으면 나을 텐데요.”
“…….”
태수가 빤히 바라만 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박주찬 형사는 괜히 다른 곳을 바라보며 답했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다행입니다. 자, 그럼 잠시 후에 다시 뵙죠.”
가볍게 고개 숙인 태수는 여전히 느긋한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 현관 안으로 사라졌다.
뒤에서 바라보던 박주찬 형사가 황당한 표정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난 아직도 저 사람 머릿속을 모르겠어.”
전에는 그래도 조금 궁금했는데, 이젠 진짜 알고 싶지 않은 표정이었다.
잠시 후.
태수는 백성현 병원장과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현관에서 일어난 일을 간단하게 말하자 백성현 병원장이 크게 웃었다.
“하하, 그 잠깐을 못 참고 결국 평정하고 왔나?”
“몇 마디 안했습니다.”
“그걸 기자들도 이젠 잘 알고 있는 거지. 최 팀장이 수틀리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단 것도 알고 있는 거고.”
백성현 병원장의 말에 태수는 약간 멋쩍어졌다.
“설마요……. 그런데 어제 서울 올라가셨는데 금방 내려오셔서 섭섭하셨겠습니다.”
“섭섭은 무슨. 술 마시다가 뉴스 보고 사레들려서 선배하고 둘이 얼마나 기침을 했는지 몰라.”
“좀 급작스러운 일이긴 했죠.”
태수가 인정하자 백성현 병원장이 쓰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 못다 마신 술이야 언제든 마실 수 있는 거고. 그러고 보니까 외과, 흉부외과 모두 자료 조사가 끝났다며.”
“네. 문자로 보고한 그대로입니다. 일정이 어떻게 되실지 몰라서 전화는 못 드렸고요.”
“최 팀장이 거하게 쏜다더니, 그쪽은 어땠나?”
이번엔 백성현 병원장이 물어 왔다.
태수도 씁쓸하게 웃더니 조금 과장해서 답했다.
“저희요? 옹기종기 모여 있는데 수류탄이 날아와 가운데 뚝 떨어졌습니다.”
“그래?”
“네. 콰광, 하고 터지는데 아주 얼이 빠져서 혼났습니다.”
태수는 일부러 돌려서 말했다.
가만히 듣던 백성현 병원장은 생각이 깊어진 눈빛으로 태수에게 덧붙여 물었다.
“그게 끝인가?”
“네?”
“할 말이 더 있지 않나 해서 말이야.”
“없는 거 같습니다.”
생각해 봐도 정말 없었다.
그런 태수의 답을 듣고도 백성현 병원장의 눈초리는 쉽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지?”
“뭐가 말입니까?”
“진상조사위원회가 일부러 늦은 시간에 급하게 발표했는데, 닥터 조나단은 기다렸단 듯이 반박 기자회견을 열었어.”
백성현 병원장이 정곡을 찔러왔으나 태수는 이미 짐작했단 듯 서슴없이 대답했다.
“조나단 준비성은 예전부터 알아줬습니다.”
“기사가 기다렸단 듯이 올라온 것도 그렇고, 또 응급의료대에 김 팀장과 함께 있었던 건 왜 그럴까?”
“기사야 워낙 기자들이 빠르니까요. 그리고 요즘 응급의료대 심층 분석한다고 매일같이 있는답니다.”
“…….”
백성현 병원장은 침묵한 채 바라만 봤다.
눈치는 빤했다.
알아서 이실직고하라고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는 거였다.
태수는 일단 모르는 척을 유지했다.
그러자 집무실엔 예기치 못한 침묵이 찾아왔다.
“…….”
“…….”
백성현 병원장은 쉼없이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계속 시선을 피하던 태수는 결국 그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이실직고했다.
“제가 김성국 차장에게 조나단을 만나 보라고 했습니다.”
“역시 그렇지?”
“……예상하셨던 거 같네요.”
“내가 아니라 석 선배가 딱 알아채더라고. 회장님 스타일이라고도 하시던데?”
백성현 병원장의 은근한 압박에 태수는 더 버티지 않고 순순히 털어놨다.
“네. 회장님께 어깨너머로 배운 겁니다. 만사불여튼튼이란 가르침이셨죠.”
“그래. 과하지 않은 준비성이었어.”
“칭찬 감사합니다.”
꾸벅.
태수가 고개를 깊게 숙여 인사했다.
그 인사를 받은 백성현 병원장이 무거운 눈빛으로 물었다.
“이 다음도 있나?”
“아니요. 이후 계획은 없습니다.”
“또 나중에 황당한 경험 하게 하지 말고.”
“진짜 없습니다. 참고 자료 넘기는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고, 혹시 몰라 대비책을 강구한 정도가 전부입니다.”
태수는 지금까지 세운 계획을 모두 밝혔다.
여기까지 예측하고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건 박성민과 이기준의 조언이 크게 작용했다.
그들이 연성대학병원에서 재직할 당시 간접적으로 경험한 일이 있어서 가능했다.
백성현 병원장도 그 정도는 넘겨짚어 본 모양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흘러갈지도 생각해 봤나?”
“정확하진 않지만…… 연성에서 바로 반박하진 않을 거 같습니다.”
“그 이유는?”
“지금 다시 반박한단 건 미국 의료진들하고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거니까요. 연성에서 그런 모험을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태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라 말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백성현 병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 예상이 꼭 맞는다고.”
“진짜요?”
“연성 내부적으로 밤새 결정 내린 게 2차 발표를 최대한 늦추자는 거라더군.”
백성현 병원장의 말투를 들어 보니 누군가에게 전달받은 내용인 듯했다.
그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다.
그 오랜 시간 연성대학병원에서 활동했으니 지금도 연락하는 누군가가 있을 터였다.
태수는 그 사람이 누군진 궁금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에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는 좀 더 자세하게 들어 두고 싶었다.
“2차 발표를 마냥 늦출 순 없을 텐데요.”
“명분은 곧 갖춰질 거야.”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진상조사위원회에 위원으로 들어온 의사협회 쪽 인사들이 대거 빠져나갔어. 그 빈자리부터 다시 채워야겠지.”
그의 말을 듣는 순간 태수는 머리를 파르륵 돌렸다.
곧 뭔가 알 듯 말 듯 느낌이 오자 고민하지 않고 바로 물었다.
“자체적으로 조사한다고 공표할 순 없는 상황이니까 또 다른 외부 인사를 영입하면서 시간을 버는 겁니까?”
“그래. 그리고 뒤로 물러나 있던 연성병원장이 어제 새벽부터 정면으로 나선 모양이야.”
“연성병원장이 나섰다라……. 그건 좀 흥미롭네요.”
태수가 가늘게 미소 지었다.
차경석 병원장이 벌써 나섰단 점은 좀 의외였다.
아니, 그렇게 나서야 했을 정도로 조나단과 브레드 김의 연합 공격이 큰 변수가 된 모양이었다.
백성현 병원장은 태수의 차가운 미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끼리 이후 계획이 다듬어지면 연성병원장이 뭔가 언론 발표를 하겠지.”
“그건 두고 보면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기자들 다시 만나야 하는데, 뭐라고 합니까?”
“하고 싶은 말 하면 되는 걸 뭘 나한테 묻고 그러나.”
“그래도 희망병원의 입장이란 게 있잖습니까.”
태수의 질문에 백성현 병원장이 시큰둥하게 말문을 열었다.
“그게 내 입장은 아니지.”
“제 입장도 아닙니다. 모두의 입장이어야겠죠.”
태수가 답하자 백성현 병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옳은 소리네. 그럼 최 팀장이 직접 찾아다니면서 물으면 되겠어.”
“제가요? 병원식구들 전부요?”
“이럴 때 차별하면 섭섭하지 않을까?”
“차별이 아니라, 이건 너무 비생산적인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태수는 얼른 정색하며 불가하단 뜻을 분명히 밝혔다.
지금부터 원내를 돌아다니면서 어느 세월에 설문조사를 한단 말인가.
그만큼 비합리적이고 비효율적인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