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3133
03137 3137화
“먼저 귀국하신 이유도 그 자료 준비 때문이잖습니까.”
“아니라고 말하긴 그렇지?”
“그러니까요. 이렇게 멀리까지 와서 남의 밥그릇 기웃거린단 소리는 사양입니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말할 건 아니지.”
오즈마가 우려를 보였지만 태수는 고개를 저었다.
“저도 심포지엄 준비해 봐서 압니다. 주최 측에서 묵직한 한 방이 있어야 어깨 펴지는 걸 말입니다.”
“흐음.”
“저희가 지금 준비하려고 해도 불가능하잖습니까. 이미 준비된 알찬 내용을 놔두고 모험할 필요는 없죠.”
태수가 나름 이치에 맞게 풀어서 말했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이제 와 카테리아나 케이스에 대해 정리해서 발표한다?
아무런 자료도 없었다.
바로 자료를 구한다고 해도 오늘 밤새 정리해도 시간이 부족했다.
그 방대한 작업은 지금으로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닥터 오즈마도 강하게 밀어내지 못했다.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 준비한 세미나이기에 욕심을 내는 게 당연했다.
카테리아나 케이스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수가 먼저 양보한단 말을 꺼냈으니 고마운 표정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태수에게 다른 부탁을 했다.
“그래도 참가한 의사들은 닥터 최 얼굴을 한번 보고 싶어 해.”
“네?”
“거창한 건 아니고, 내가 먼저 발표하고…… 닥터 최가 부족한 걸 채워 주면 어떨까 싶은데. 어려울까?”
오즈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반대로 태수는 더 화끈하게 미소 지었다.
“방해가 안 된다면요.”
“좋아할 거야.”
“콜. 대기하다 사인 받으면 올라가겠습니다.”
“그래. 후우! 내 마음이 다 시원하네.”
“그런데 오즈마, 지금…….”
결정을 내린 태수가 갑자기 망설였다.
닥터 오즈마도 눈치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도 나가 봐야 할 참이었어. 준비사항도 확인해야 하고……. 시간 맞춰서 사람 보낼게.”
“감사합니다.”
“나야말로……. 다들 황당하겠지만 열심히 준비해서 이따가 봅시다.”
휙휙.
닥터 오즈마는 손을 크게 흔들며 회의실을 나갔다.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
그 순간 정민수가 벌떡 일어나 크게 말했다.
“오즈마, 이거 너무하는 거 아닙니까!”
“지금 말한다고 들려? 그리고 한국어로 떠들면 더 못 듣지.”
“듣지 말라고 이러는 거잖아.”
정민수가 당연하단 얼굴로 답했다.
그저 한탄을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태수는 그런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나지막이 한마디는 했다.
“그럴 시간 없어.”
“투정 다 부렸으니까……. 이제 뭐 해야 돼?”
깜빡, 깜빡!
오더를 기다리는 해맑은 눈빛을 보였다.
그 모습에 태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좀 뭔가 알아서 해 볼 생각은 없는 거야?”
“머리는 너 혼자 써. 난 손발 움직이는 게 편하다니까.”
정민수의 말이 끝난 순간이었다.
턱!
잽싸게 다가온 박성민이 정민수 옆에서 턱을 괴고 똑같이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나도 가끔은 우리 태수의 오더를 기다리게 되더라.”
“……정 팀장은 그렇다고 쳐도 선배도 자주 그러시는데요.”
“그렇다고 해 두고. 그래서 뭘 해야 하냐니까?”
박성민은 태수의 핀잔도 개의치 않고 오더만 기다렸다.
생각하기 귀찮다는 느낌이 강했다.
다른 팀원들도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룰루루.”
“뭐부터 검색해야 할지 알아야 하지.”
“음료수라도 가져올까?”
다들 태수의 시선을 피하며 괜히 딴소리만 하고 있었다.
태수는 이럴 때마다 살짝 머리가 아파 왔다.
사실 스스로 나서는 걸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순간엔 팀원들이 태수에게 의지했다.
그때 태수의 귀에 너무 익숙한 대화가 들려왔다.
“우리 최 팀장님 말이야, 이럴 때마다 너무 듬직하지 않니?”
“언니도 그래요? 그리고 팀장님이 저렇게 다그칠 때 너무너무 멋져 보이지 않아요?”
믿었던 송현미 간호사와 이선정 간호사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서영우와 공우혁도 팔짱 낀 채 똑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수도 이렇게까지 떠밀면 반발심이 치솟아 오른다.
‘아주 철저하게 굴려 드리죠.’
생각만으로 끝내지 않고 생각한 걸 말했다.
“지금부터 세 파트로 나눕니다. 첫 번째는 응급의료대 의의와 발족…….”
태수의 입에서 순차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쏟아져 나왔다.
빙글거리며 미소 짓던 팀원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더니 결국 빽 소리쳤다.
“야, 그걸 2시간 만에 해내라고?”
“우리 1시간 발표라며!”
“양이 너무 많으면 어떻게 추리려고 그래?”
과하단 표정들이 가득했다.
태수는 그 정도에 흔들리지 않았다.
“20분 단위로 끊어서 발표할 거니까 분량 조절해 주시면 됩니다.”
작정한 태수의 오더에 다들 눈앞이 노래졌다.
“그게 가능…… 해?”
“발표자가 발표하기 나름이죠.”
“네가 발표할 거잖아.”
“설마요. 발표자는 도착하면 알려 드릴 겁니다.”
“……도대체 어쩌라고!”
다들 반발해도 태수의 표정은 여전히 똑같았다.
“그러니까 다들 내용 공유하고 숙지도 하셔야죠.”
“태수야, 잠깐만……. 발표는 나중 문제고, 지금 자료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데?”
“예전에 NGO 심포지엄 주제 발표할 때 사용한 자료 있잖습니까.”
“그게 한국에 있지!”
“전화해서 보내라고 하세요.”
태수는 너무 당연하게 말했다.
그러나 일해야 하는 입장에선 간단하지 않았다.
“그걸 다시 짜깁기해야 한다고?”
“우와우, 짜릿한데?”
“짜릿?”
“등골이 오싹하다고.”
오가는 소리에 태수가 슬쩍 시간을 보며 말했다.
“2시간 20분 남았네요.”
심드렁한 그 말에 모두가 질색했다.
“난 저 자식이 저럴 때가 제일 싫더라!”
“젠장. 떠들 시간 없어. 어차피 해야 할 거면 빨리 시작하자!”
“한국에 누가 전화할 거야?”
“누구라도 전화해서 일단 자료부터 확보해!”
와글와글.
2시간도 안 되는 제한 시간에 다들 다급하게 움직였다.
새벽에 일어나 핀란드에 도착한 지 이제 1시간도 안 됐단 사실은 잊은 지 오래였다.
서두르는 건 태수의 오더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제임스의 평판을 우려해 바쁘게 움직이지도 않았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자신들이었다.
무책임하고 준비성 없단 뒷소리가 듣기 싫었다.
그게 서둘러 결과물을 만들고자 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순식간에 전화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어, 조 선생, NGO 자료 말이야…….”
“이성혁 선생? 출동 아니지? ……어어. 응급의료대 자료 좀…….”
모두 전화기만 붙들고 있지 않았다.
컴퓨터를 제법 잘 다루는 도성민과 공우혁, 유병태가 각자 한 파트를 담당했다.
프레젠테이션 파일 만들기는 다들 한 가락씩 하는 이들이다.
“일단 제목은 이렇게 넣고…….”
“화면 전환 효과는 랜덤으로 돌립니다.”
“알고리즘 형식이 보기 편하겠죠?”
슥슥. 탁탁.
마우스와 키보드를 움직이며 질문하는 소리도 만만치 않게 들려왔다.
다들 바쁜 그때였다.
아직 막내 격인 이기준이 음료수를 배달하다 태수와 시선이 마주쳤다.
태수의 한가로운 모습에 이기준은 눈빛부터 달라졌다.
“오더만 하고 감시 중이야?”
“원래 책임자는 다그치는 역할이지 않나?”
“틀린 답은 아닌데, 좀 얄미운데?”
“억울하면 바꾸든가
“그건 패스……. 간다.”
휙!
이기준은 태수가 정말 바통을 넘길까 무서워 얼른 움직였다.
태수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태수도 이렇게 마냥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태수는 자신이 생각한 두 번째 발표 내용을 곱씹었다.
수학여행 때 벌어진 사고였다.
가장 최근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이 선명했다.
그 사건에 대해선 도성민이 타이핑하고 박성민이 옆에서 조언 중이었다.
타다닥.
“……네. 선배, 그리고요?”
“그리고요는 무슨. 여기 ‘호이’가 뭐냐, ‘호이’가……. 호이는 귀여운 아기 공룡이 하는 거고, 사람이 하는 건 ‘호의’라고, 인마.”
“이건 오타잖습니까.”
“어이쿠, 제가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데 넌 왜 한글로 작성하냐?”
박성민이 원론적인 문제를 제기하자 도성민이 아차했다.
“아, 영어로…… 해야겠죠?”
“지금 한글로 작성하면 그게 일기지, 발표용이야?”
“바꾸겠습니다.”
“이 자슥이, 노트북에 한국어 프로그램 깔린 거 구해 준 건 호텔 측의 배려야. 너 일기 쓰라는 게 아니라고.”
“알겠다니까요. 바꾸고 있습니다.”
타닥, 탁!
도성민이 투덜거리며 손을 움직였다.
한마디 하려던 박성민은 애써 참았다.
“그래. 일단 작성이 중요한 관계로 참는다. 나중에 보자.”
“…….”
도성민은 더 말하지 않고 손만 움직였다.
태수는 그 모습을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그냥 미소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이미 귀엔 휴대폰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곧 상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 팀장?”
“네, 형님.”
태수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은 몇 없었다. 그중에서 지금 도움을 구할 상대라면 역시 김성국 기자였다.
그는 태수의 다급한 목소리가 의아한 듯했다.
“왜 목소리가 바빠?”
“마음은 음속 돌파했습니다.”
“전투기 또 타?”
“그런 끔찍한 말씀 마시고요.”
“으하하!”
그는 시원하게 웃었지만, 태수는 이렇게 흐르는 시간에 속이 타들어 갔다.
여유가 없어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거두절미하고요, 제가 전화드린 건…….”
“인사만 하고 땡이야?”
“바쁘다니까요.”
“도대체 뭐가?”
김성국 기자는 태수의 목소리만으로도 촉이 서는 모양이었다.
태수가 그걸 일일이 설명할 상황이 아닌 게 문제였다.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오케이. 그래서 뭐?”
“수학여행 사고 때 출동 건 영상 촬영한 거 있죠?”
태수가 묻자 김성국 기자는 바로 답했다.
“물론 있지.”
“거기서 5분짜리 영상 하나만 뽑아 주십시오. 대략…….”
태수는 영상 내용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그 말을 곰곰이 들은 김성국 기자가 울컥한 목소리로 따졌다.
“5분 논스톱 영상도 아니고, 그렇게 짜깁기해 달라고?”
“네. 앞으로 음…… 1시간 30분 안쪽으로요.”
“최 팀장, 그거 잘라서 이어 붙이고, 랜더링까지 하려면 턱도 없는 시간이야!”
“전 형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태수 말에 김성국 기자가 절규했다.
“믿지 마. 이건 믿어서 될 문제가 아니라니까!”
“그럼 1분씩 끊어서 해 주시든가요. 아무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파이팅!”
“야야야…….”
김성국 기자가 찾는 소리가 들렸다.
태수는?
뚝!
매정하게 끊었다.
“죄송합니다.”
그의 사정 봐주기엔 이쪽 상황이 너무 급했다.
김성국 기자에게선 전화가 없었다.
그건 작업에 착수했단 의미와 같았다.
역시 그도 몰아치면 어떻게든 만들어 내는 ‘마감 신공’의 대가였다.
기사 작성을 귀찮다고 미루다가 마감 시간 5분 남기고 시작하는 걸 태수는 여러 번 지켜봤다.
그래서 몰아치면 어떻게든 만들어 낸단 걸 알고 강행한 부탁이었다.
“애들 선물 사 갈게요. 형수님 것도요.”
미안함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가족을 들먹였다.
그게 이 무식한 부탁이 가장 뒤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는 방법이었다.
2시간 후.
회의실은 고요했다.
정말 쥐 죽은 듯한 느낌으로 모두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