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419
00422 422화
그때였다.
“그만.”
태수의 한마디에 레지던트들이 멈칫했다.
“죄송합니다.”
“그만하겠습니다.”
조금은 풀어졌던 몸까지도 반듯하게 변했다. 그만큼 태수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태수는 그런 그들에게 이야기했다.
“이 병원 모습을 잘 담아 둬.”
“눈 감고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두의 목소리가 차분했다.
태수는 그런 레지던트들을 한 번씩 둘러봤다.
까불까불한 성격이지만 누구보다 승부욕과 자기 발전에 강한 홍진만.
늘 조용한 분위기지만 항상 듬직한 안성훈.
때로는 막내같이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하지만, 환자를 대할 때는 열정적인 이석현.
그들을 바라보는 태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동성에 돌아오길 잘했다고 생각한 게 너희들 때문일지 모르겠다.”
다소 감성적인 태수의 말에 레지던트들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저희도 치프가 돌아와 주셔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혼도 많이 났지만, 다 저희를 위해서라는 것도 압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셔서.”
마지막으로 홍진만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마음 찡한 얼굴이었다.
태수는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돌려 동성종합병원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리고 레지던트들에게 말했다.
“여기는 나에게도 너희들에게도 꼭 기억해야 할 곳이야.”
“…….”
“여기서 흘렸던 땀과 눈물, 잊지 말자.”
태수의 말에 레지던트들의 표정이 더욱 흔들렸다.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태수가 차분히 물었다.
“내가 전에 돈 벌게 해 주겠다고 했던 말 기억해?”
“네.”
“신속대응센터가 어쩌면 그런 기회를 줄 곳인지도 모르겠다.”
“모르겠다니요. 그쪽에서 일하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대우 받는 거 아닙니까. 치프가 말씀하신 대로요.”
안성훈이 말하자 태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찾아온 거지. 그 기회를 살리는 건 너희들 몫이야.”
“…….”
“난 너희들이 힘들어도 정말 힘들어도 버텼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층 더 멋진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
태수의 진심을 들은 레지던트들은 말이 없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서 하는 말은 가슴을 건드린다.
감성에 휩싸인 레지던트들이 코끝이 살짝 시큰해진 듯 보였다.
태수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기서 지냈던 시간들, 추억들 모두 가슴속 깊숙이 담았냐?”
“네!”
“그럼 돌아서.”
레지던트들이 일제히 돌아섰다.
태수도 천천히 몸을 돌려 동성종합병원 정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남자 새끼가 새로운 길을 걸어갈 때는 절대 뒤돌아보는 게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럼 가자.”
태수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홍진만, 안성훈, 이석현이 바짝 따라붙었다.
모두의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단지 그 마음뿐이다.
한시간이 채 지나기 전에 태수와 레지던트들은 신속대응센터 근처 빌라에 도착했다.
석정현 이사장이 레지던트들의 편의를 위해 미리 매입한 빌라 중 하나였다.
오늘따라 빌라 앞이 부산했다.
많은 젊은 남녀들이 서 있는 모습이다.
“저 사람들은 뭡니까?”
“혹시 충선대에서 온 레지던트들인가?”
모두 고개를 갸웃거리던 중이었다.
태수가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다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장신에 민머리.
어디서나 눈에 띄는 도성민의 반가운 얼굴이다.
태수는 곧바로 그에게 다가갔다.
“성민아.”
“어, 왔어?”
도성민이 덩치답게 않게 밝은 미소로 태수를 반갑게 맞이했다. 이어서 뒤에 서 있던 남자들이 태수를 보고 소리쳤다.
“선배님, 안녕하십니까!”
“태수야, 동성에서 여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이제 와. 빨리빨리 와야지.”
후배들은 빌라촌이 들썩이게 태수에게 인사하고, 동기들도 반갑게 말을 건넸다.
태수는 동기들과 후배들에게 진심을 담은 얼굴로 인사했다.
“다들 얼굴 보니까 반갑다. 그런데 왜 이렇게 서 있어?”
“순서대로 방 배정 중이야. 팀별로 묵게 한다던데?”
“그래?”
그때 태수의 시선에 정장을 한 남자가 보였다. 신속대응센터 직원으로 전에 한 번 인사했던 기억이 있었기에 얼른 다가섰다.
“안녕하십니까?”
“최 선생님 오셨습니까?”
“배정이 늦나요?”
“아닙니다.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있어서요. 최 선생님이 머무실 곳은 제 뒤에 있는 빌라 201호입니다. 조용하고 채광도 좋은 방입니다.”
직원이 바로 안내하자 태수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다른 친구들도 있는데 저 먼저 배정받으니까 좀 그러네요.”
“그렇게 생각하실 거 없습니다. 본인 확인 절차가 있어서 늦어지는 겁니다. 제가 최 선생님을 확인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하긴요.”
“걱정 말고 올라가십시오. 곧 끝나니까요.”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태수는 정겹게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이따가 보자고.”
“선배님, 들어가십시오!”
90도 가까이 고개를 숙이는 후배들의 모습에 태수는 미소를 지으며 201호로 향했다.
잠시 후, 201호 문을 열고 들어간 태수는 솔직히 놀랐다.
30평이 훌쩍 넘어보이는 커다란 집이다.
살짝 둘러보니 새 침대를 필두로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완전히 풀 옵션이었다.
하다못해 화장실에 가니 비누와 칫솔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먹을 것만 사다 놓으면 더 필요한 게 없을 정도다.
석정현 이사장이 신속대응센터에 온 레지던트들의 대우를 얼마나 신경 썼는지 이런 세심한 모습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보아하니 몇 명이 같이 거주할 거 같았다.
들어온 건 아직 태수 혼자뿐.
같은 팀에 누가 배정되었는지는 좀 더 기다려 봐야 했다.
짐을 한쪽에 놓고 집을 더 둘러봤다.
“경치 좋고.”
태수가 베란다에서 밖을 바라보던 중이었다.
끼익.
“여기지?”
“어? 누가 먼저 와 있는 거 같습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그 순간 태수와 가장 먼저 들어온 남자의 눈이 마주쳤다.
“태수?”
도성민이 험악한 인상이 무색할 정도로 크게 놀랐다.
같은 집을 배정받았다면?
태수와 도성민이 서로 다가와 거실에서 마주 섰다.
“너도 1팀?”
“그럼 너도?”
두 사람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예전부터 같이 일하고 싶었던 동기다. 의대 시절에 유독 끈끈하게 붙어 다녔을 만큼 호흡이 잘 맞았던 탓이다.
레지던트 때는 병원이 달라 이젠 기회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막바지에 같이하게 됐다.
두 사람의 얼굴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태수가 먼저 한마디 했다.
“발목 잡지 마라.”
“내가 할 소리. 유명해졌다고 까불면 아주 도끼로 이마를 까 버릴 테니까.”
“자식.”
“새끼.”
서로를 바라보며 내뱉는 말투가 살벌하면서도 다정했다.
태수와 도성민, 그리고 1팀 레지던트들은 짐을 풀고 바로 신속대응센터로 이동했다.
다른 레지던트들 모두 충선대 후배들이었다.
3년 차 김태경, 양승일, 2년 차 배정환.
모두 태수와 의과대학 시절에 자주 만나 익히 아는 사이로, 나름 열정을 가진 후배들이기도 했다.
반면, 동성에서 같이 넘어온 홍진만과 안성훈, 이석현은 다른 팀에 배정된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미련을 두진 않았다.
스스로 잘해 나갈 녀석들이다.
그리 믿었다.
그동안 굴린 성과를 제대로 보여주길 바랄뿐이다.
서둘러 신속대응센터에 도착한 태수 일행은 가장 먼저 헌혈부터 했다. 아무래도 응급환자가 많아질 공산이 크니 신선한 혈액 확보가 제일 중요했다.
먼저 헌혈을 끝낸 도성민이 태수에게 투덜거렸다.
“어떻게 얼굴 보자마자 피를 뽑아 가?”
“필요하니까.”
“나도 여기에 피 많이 필요한 건 알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도성민은 조금은 불만인지 투덜거렸다.
그때였다.
“어이, 최태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본 태수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두 분 오셨습니까.”
태수가 인사한 이들은 박성민과 브레드 김이었다. 두 사람도 헌혈을 했는지 팔목을 잡은 채 다가오고 있었다.
박성민은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여긴 무슨 모기 집합소냐? 아무리 환자 때문이라지만 면상 보자마자 팔부터 내밀라니. 피도 얼마나 많이 뽑아 가는지 아주 빈혈 생기겠다니까.”
“닥터 박, 당연한 거 가지고 왜 불만을 표하는 겁니까?”
“아니, 닥터 김, 이게 당연하다니요.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대낮부터 술도 안 드신 멀쩡한 얼굴로 하실 수가 있습니까. 이건 엄연히 혈액 강탈이라고요.”
“NGO에서는 한 달에 두 번씩 자발적으로 헌혈합니다. 그것도 모두 기쁜 마음으로요.”
브레드 김의 말에 박성민이 부르르 떨었다.
“NGO가 좋은 단체인 줄 알았는데.”
“사람 살리려면 피가 필요한 겁니다.”
“압니다만, 평소에 머리가 어지러운 걸 보니 제가 빈혈 증세가 있어서 말입니다. 피가 부족해요.”
브레드 김은 박성민의 성격을 알기에 그저 건성으로 넘기는 모양새였다.
두 사람의 투덕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던 태수가 그제야 나섰다.
“브레드, 시차 적응은 되셨습니까?”
“우리야 시차 적응이 일상이니까. 그리고 이사장님이 준비해 준 숙소도 마음에 들고.”
“아파트라고 했나요?”
“단칸방이면 된다고 했는데 절대 안 된다잖아. 대신에 NGO에 그만큼 더 기부해 준다고 해서 일단 거주하기로 했어.”
“브레드도 대단하십니다.”
태수는 진정 감탄했다.
NGO라는 단체에 속한 의사들이 얼마나 빈민 치료에 열성적인지 알 수 있는 단편적인 부분이기도 했다.
브레드 김은 약간 멋쩍었는지 슬쩍 태수의 옆에 있는 도성민을 가리켰다.
“누구?”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희 팀 레지던트 4년 차인 도성민입니다. 제 학과 동기이기도 하고요.”
태수가 소개하자 도성민이 커다란 덩치를 얼른 숙이며 인사했다.
“도성민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팔뚝 보니 환자 잘 나르게 생겼네.”
“그럼요. 힘도 잘 씁니다.”
도성민이 쑥스러움에 슬쩍 민머리를 쓸어 넘길 때였다.
도성민을 바라보던 박성민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성민이라. 신성한 이름을 사용하는 멋진 의사분이 여기 또 계셨네.”
“네?”
“나 박성민이야.”
“아! 얼굴만큼 멋진 이름이십니다.”
도성민의 아부성 인사에 박성민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그렇지. 우리 성민이 얼굴도 나 못지않게 멋져. 아주 듬직하니 일도 잘하고 싹싹할 거 같단 말이지. 그보다 원래 의과가?”
“흉부외과 소속이었습니다.”
“그렇지. 역시 성민이라는 이름은 뭔가 깊이가 있다고. 우리같이 신성한 이름을 쓰는 사람들은 그만큼 열심히 살아야 한다니까.”
박성민이 자기 이름에 자아도취되어 갈 때였다.
“성민아.”
들려오는 소리에 박성민과 도성민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충선대 동기였다.
박성민의 표정이 순간 떨떠름하게 변했다.
도성민은 밝은 얼굴로 동기와 대화를 나눴다.
“어, 너도 헌혈했어?”
“방금. 태수랑 한 팀이네. 자식들. 나중에 보자.”
“그래, 이따가 봐.”
충선대 동기가 멀어진 후였다.
“성민 선배.”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
이번에도 충선대 후배였다.
박성민의 표정이 점점 더 불쾌하게 변해 갔다.
그때 태수가 얼른 눈치채고 슬쩍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갑자기 아주 불쾌해졌어. 여기저기서 성민이 찾는 게 아주 찝찝하니 기분이 꾸리꾸리해. 뭔가 특단의 조치를 내려야 할 거 같아.”
“성민이…….”
“뭐?”
박성민이 바로 째려보자 태수가 얼른 정정했다.
“아니, 도 선생에게 별명이 하나 있습니다. 그거면 불쾌하지 않으실 거 같습니다.”
“뭔데?”
“그게…….”
태수가 얼른 박성민의 귀에 속삭였다.
그 순간 박성민의 얼굴에서 불쾌함이 싹 날아가고 환한 빛이 떠올랐다.
“음하하하! 역시 내 직속 후배 최 선생이야.”
“그거면 괜찮죠?”
“아주 좋지. 그거면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겠어.”
박성민은 태수를 격하게 칭찬했다.
도성민과 브레드 김이 의아하게 바라볼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