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 Taesoo Choi RAW novel - Chapter 587
00590 590화
장일수 외과장은 일부러 술을 따르며 슬쩍 분위기를 전환했다.
쪼르륵.
“그런데 최 선생에게도 벅찬 수술이라니?”
“저도 처음 시도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음.”
“그래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수술에 임하고 싶습니다.”
태수의 말뜻을 장일수 외과장은 바로 알아들었다.
“그러니까 그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인 거 같은데.”
“양해해 주신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럼 당연히 최 선생 의견에 따라야지. 수술을 더욱 잘하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오히려 내가 부탁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때까지 윤재가 괜찮을까 걱정이 되어서요.”
태수가 조심스럽게 묻자 장일수 외과장은 쓴 미소를 지었다.
“어제부터 central vein cannulation(중심정맥삽입술)을 연결했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아이를 그냥 방치할 순 없는 일이니까.”
“그렇군요.”
“영양을 계속 공급하고 있으니까 조금씩 체력이 올라올 거야. 수술 날짜도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으니 영양 공급 양을 더욱 늘려야겠지.”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겠죠?”
태수가 이어서 물어보자 장일수 외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이라는 게 생명하고 직결되는 부분은 아니니까 체력만 올라오면 큰 문제는 없을 거야.”
“다행입니다.”
“그보다 최 선생, 만약에 이번 수술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면 어떤 부작용이 생길 거라 예상하나?”
장일수 외과장이 짐짓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태수도 그 부분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기에 차분하게 대답했다.
“또다시 병원 신세를 져야겠지요.”
“음, 병원에서도 이번은 도와주지만 다음에도 도와준다는 보장이 없는데.”
“그렇다면 더욱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야 할 거 같습니다.”
태수의 목소리가 낮아지자 장일수 외과장이 쓴 미소를 지었다.
“이거 괜한 걸 물어서 최 선생에게 부담만 가중시키는 거 아닌지 몰라.”
“그러게요. 가슴이 답답하네요.”
“그런 의도로 물은 게 아닌데, 이거 참.”
장일수 외과장이 안절부절못하자 태수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잔을 들었다.
“일단 술 한 잔 들어가면 마음이 좀 풀어질 거 같습니다.”
“그럼 마셔야지. 오늘은 부담도 걱정도 말고 최 선생 양껏 마셔.”
“장일수 외과장님 주머니가 가벼워지실 수도 있는데요.”
“이 자리에 앉아서 술값 걱정할까. 그런 걱정은 애초에 접어 두고, 수술에 대한 생각도 이제부터 잊고 마시자고.”
쨍.
장일수 외과장이 먼저 거칠게 술잔을 부딪쳐 왔다.
태수도 공손하게 응대한 후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크.”
안 그래도 쓴 양주가 오늘따라 더욱 쓰게 느껴졌다.
다음 날, 태수는 장일수 외과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업체에서 필요한 물품을 금요일까지 준비해 준다고 했어.”
“그럼 수술은 토요일로 잡아야겠습니다.”
“이쪽에서도 그렇게 준비하도록 하지.”
“그럼 금요일 저녁에 들어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태수는 머리를 굴렸다.
이제 수술 날짜가 확실해졌다.
그렇다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은 화요일이다.
토요일까지 남은 시간은 5일.
그 안에 해야 할 일은 몸을 최고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태수는 생각했다.
언제 가장 베스트 컨디션이었나.
우선 잠을 푹 자야 했다. 그리고 일정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고, 먹는 것도 조심해야 했다.
그걸 떠올린 태수는 마음부터 가다듬었다.
최대한 침착하게.
심적으로 동요하는 건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발전할 수 있다.
그조차도 피해야 한다.
이 수술이 한 아이의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
그리고 나아가 태수에게도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그걸 알기에 그는 스스로를 가다듬으며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지웠다.
생각하는 건 오로지 하나뿐이다.
계획한 수술을 어떻게 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가.
그뿐이다.
다른 생각은 머릿속에서 훌훌 털어 버렸다.
태수가 그렇게 수술 스케줄에 맞춰 몸과 마음을 가다듬던 중이었다.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김동석이 들어왔다.
“나 왔어.”
“오셨습니까? 이쪽으로 앉으세요.”
태수는 바로 자리를 권했다.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며 김동석이 의아하게 물었다.
“오늘따라 얼굴이 무거워 보이는데, 무슨 일 있어?”
“아닙니다. 그보다 요즘 어떠십니까?”
“그 빌어먹을 담낭염이 뭔지, 사람 귀찮게 자꾸 약을 먹어야 되냐고.”
“술안주로 약을 드시는 분이 하실 말씀은 아니죠.”
태수가 강도 높게 비판하자 김동석이 움찔했다.
“내가 그렇다고 뭐 술을 매일 먹는 것도 아니고, 많이 마시는 것도 아니잖아. 그냥 입만 축일 정도라고.”
“들리는 소문도 있고, 제가 본 것도 있는데요.”
“너무 빡빡하게 살지 말자니까. 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고.”
김동석이 어물쩍 넘어가려 하자 태수도 못 이기는 척 받아 줬다.
어차피 술 마시지 말라고 아무리 떠들어 봐야 소귀에 경 읽기다.
어부들은 일이 고된 만큼 술 한잔으로 위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말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태수가 돌려 말했다.
“대신에 조금씩만 드시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그럼 이따가 저녁 같이 먹으면서 가볍게 반주나 할까?”
“아니요. 이번에는 좀 빼겠습니다.”
태수의 말에 김동석의 눈이 조금 크게 떠졌다.
“나보다 술 좋아하는 의사 양반이 웬일이야?”
“그건 아니죠. 좌우간 주말에 중요한 수술이 있어서요.”
“이거 왜 이래. 언제부터 그랬다고.”
“이번에는 좀 봐주십시오. 자, 이제 상의 올려 주세요.”
태수가 진료로 돌아서자 김동석도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면서도 김동석은 태수를 야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평소에 술 마시는 걸 내뺀 적이 없는 태수이기에 더더욱 의아한 표정이었다.
반면, 태수는 아예 술 생각이 없었다.
마실 때는 좋을지 몰라도 뒷감당이 힘들었다.
수술이 끝날 때까지는 금주가 당연했다.
술뿐만이 아니다. 태수는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침대에 누웠다.
매일 늦게까지 연구를 한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한가하게 TV를 시청하기도 했다. 그런데 갑자기 누워서 자려니 잠이 올 리가 없었다.
뒤척. 뒤척.
널찍해진 침대를 좌우로 돌고 돌기를 여러 번.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멀쩡해져 가고 있었다.
이리저리 뒹굴던 태수의 시선 끝에 커다란 술병이 보였다. 어두운 방이었지만 창문 사이로 비추는 달빛 때문에 어느 정도 주변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속이 비치는 술병 속의 큼지막한 산더덕이 인상적이었다.
수두증을 앓아 서울로 보냈던 아기의 아빠가 선물해 준 술이다. 가끔 한 잔씩 마셔서 그런지 호박빛으로 변한 술이 반쯤 줄어 있는 모습이다.
더덕의 기운을 머금은 술이라 독했다.
태수는 그걸 빤히 바라보며 낮게 읊조렸다.
“저걸 한 잔만 딱.”
마시면 바로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너무 뒤척거려 지친 태수이기에 그 유혹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정말 딱 한 잔이면 될 것 같았다.
그거면 세상 다 가진 마음으로 편안하게 잘 수 있다.
마치 술병이 손짓하는 착각까지 들 정도였다.
그 유혹에 태수의 마음이 슬슬 기울려던 찰나였다.
탁!
태수가 이마를 가볍게 때리며 고개를 강하게 털었다.
그리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자기로 마음먹었으면 끝이다.
어떻게든 자야 했다.
최대한 잠을 많이 자야 육체적인 피곤이 줄어들기에 태수는 또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다.
태수의 자기 관리는 말 그대로 철저했다.
오전에는 가벼운 운동.
오후에는 수술 연구.
그리고 밤에는 일찍 자고,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먹는 것 또한 신경 썼다.
단백질이 많은 고기, 혹은 불포화지방산이 많은 생선 위주의 식단이다.
규칙적이면서도 바른 생활이 이어지자 피곤함은 사라지고 체력도 상당히 올라왔다.
그걸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던 이선정 간호사는 태수의 철저함에 놀랄 정도였다.
“선생님, 혹시 무슨 병 생기신 건 아니죠?”
“주말에 수술 있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처음 보는 거 같아서요.”
“중요한 수술이라서요.”
태수는 그렇게 말했지만 이선정 간호사는 의문스런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동안 봐 온 게 있어 태수가 하는 모든 말을 신뢰했다.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제어하는 독한 모습은 의외였다.
아니, 어쩌면 이런 철저한 모습 때문에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의사들에게 인정을 받는지도 몰랐다.
한편, 태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힘들다.’
몸이 좋아지고 정신이 맑아지는 건 스스로도 느끼고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 고픈 건 술 한잔이었다.
가끔 마시는 한잔 술이 시름을 잊게 했는데 그게 사라지니 약간의 스트레스를 받았다.
그런 스트레스도 좋지 않지만 술 마시는 것보다는 나았다.
곧 수술날이 다가온다.
조금만 더 견디면 된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바로 시원한 맥주 한 캔부터 입에 털어 넣고 싶었다.
태수가 지금 바라는 건 딱 그 하나뿐이었다.
그렇게 철저한 자기 관리가 이어지는 사이에도 시간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어느새 금요일 저녁이 찾아왔다.
보건소 문을 닫은 후 태수는 바로 삼척종합병원으로 향했다.
먼저 향한 곳은 응급실이었다.
입구에 있어 접근성도 좋았고, 유승원 과장에게 인사를 하고 올라가는 게 도리인 탓도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가 두리번거리자 저쪽에서 유승원 과장이 걸어왔다.
가까이 다가서고야 태수를 발견했는지 유승원 과장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변했다.
“어? 최 선생, 빨리 왔네.”
“올라갈까 하다가 얼굴 뵙고 가려고요.”
“나야 환영이지. 어떻게, 차라도 한잔할까?”
“나중에요. 인사만 드리고 올라가려고 했습니다.”
태수의 말에 유승원 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할 게 있겠지. 외과에서도 아주 대대적으로 준비하는 거 같고 말이야.”
“그렇습니까?”
“장일수 외과장님이 특히 정이 많아. 막내가 또래라 더 마음이 쓰이는 모양이고.”
“그러셨군요.”
태수는 장일수 외과장이 왜 그렇게 적극적인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유승원 과장은 그런 태수에게 한마디 덧붙였다.
“듣자 하니 어려운 수술이라던데, 어련히 잘하겠지만 그래도 한마디는 해 주고 싶은데 말이야.”
“새겨들어야죠.”
“그럴 건 없고, 이번 수술이 잘되지 않아도 누구도 최 선생을 탓하지 않을 거라고.”
“…….”
태수가 침묵하자 유승원 과장이 쓴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간단한 수술도 위험성이 제로는 아니잖아. 그런 관점에서 이야기한 거니까 너무 서운하게 듣지는 마.”
“전혀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오히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할 뿐이죠.”
“그렇게 받아들여 주면 더 좋고.”
“그럼 전 이만 올라가겠습니다.”
“잘 부탁해.”
유승원 과장은 가볍게 태수의 어깨를 다독여 줬다.
유승원 과장과 헤어진 태수는 곧 외과로 올라갔다.
간호사실 앞에 있던 김준혁이 얼른 다가와 깊이 고개 숙였다.
“선생님, 오셨습니까.”
“이 시간이면 치프도 좀 쉴 시간 아니야?”
“오신다는 소식 듣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건 과장님께서 전해 주라고 하셨고요.”
김준혁이 내미는 건 의사 가운이었다.
삼척종합병원 마크가 새겨져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는 태수를 향해 김준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변 시선 때문에 좀…….”
“난 상관없어.”
태수는 그 말을 증명하듯이 바로 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이어서 김준혁에게 물었다.
“요청한 의료 물품은 다 도착했나?”
“문제없이 도착했습니다.”
“좋아. 그리고 내가 보내 준 자료들은 다 살펴봤지?”
태수의 물음에 김준혁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몇 번, 아니 몇십 번씩 봤습니다.”
“어시스던트할 수 있겠어?”
“그럼요. 최선을 다해 해 보이겠습니다.”
김준혁의 목소리에 힘이 가득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