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agonslayer's Class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97
497화
‘적월이 떠올랐다.’
지크의 공격이 한발 늦은 것이었다.
라몬 지멘스가 일으킨 아지타하카의 권능과 제사장의 힘이 합쳐져 만들어진 검붉은 고리가 적월과 완벽하게 맞춰졌다.
우우우우웅!
검붉은 고리 안에 들어간 적월이 기이한 소리를 내며 울기 시작했고, 곧 붉은 소용돌이로 변했다.
쿠구구구구!
그 붉은 소용돌이가 커지더니 거대한 게이트처럼 변해 갔다.
지크는 이를 보고 다시 검을 들어 제단을 겨누었다.
하지만 가만둘 수 없다는 듯, 탄탈로스가 지크의 앞을 가로막았다.
‘빌어먹을.’
리치몬드와 베인은 시선을 끌기 위해 바깥쪽에서 그림자 정령들과 함께 지멘스의 기사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그가 소집한 흑검 기사단이 이곳에 도달하기에는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놈들을 막아야 한다.’
지크가 숨을 몰아쉬고는 인벤토리에서 녹색검과 동방검을 꺼냈다.
우우우우웅!
공중에 뜬 검이 진동을 일으키며 아라타소와 네빌로스를 소환했다.
탄탈로스는 지크에게 소환된 마족을 보며 인상을 썼다.
“마족으로서 긍지를 버린 배신자들인가.”
쿠구구구!
어비스의 사형 집행관 탄탈로스는 자존심이 센 투마족이었기에 마족의 긍지를 가장 중요시 여겼다.
그런 탄탈로스에게 마계를 배신하고 인간에게 붙은 아라타소와 네빌로스는 당장 소멸시켜야 할 적이었다.
네빌로스가 불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바돈의 감찰관인 내가 배신자 취급을 받다니…… 차라리 탄탈로스와 힘을 합쳐서 지크 드레이커를 해치우면 다시 마계로 돌아갈 수 있는 것 아닌가.”
네빌로스의 말에 아라타소가 고개를 저었다.
“저 사형 집행관이 우리 말을 들어줄 거라 생각하는 거냐. 게다가 그렇게 했다가 탄탈로스가 지면 우리는 영원히 저 검에 봉인될지도 모른다.”
“으으윽.”
아라타소의 말에 네빌로스는 어쩔 수 없이 힘을 일으켰다.
쿠구구구구!
아라타소의 투기와 네빌로스의 마력이 탄탈로스의 힘에 대항하면서, 근처에 힘의 폭풍이 어지럽게 일어났다.
지크가 두 마족에게 말했다.
“내가 의식을 방해하는 동안 놈을 막아라!”
그 말과 함께 아라타소와 네빌로스에게 탄탈로스를 맡겨 둔 지크는 곧장 제단 쪽으로 날아갔다.
게이트를 열고 있는 라몬과 제사장 주변에는 묵시록의 네 기수와 흑마법사들이 서 있었다.
지크가 검을 들고 이들을 향해 겨누며 공중에서 내리꽂히듯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앗!”
지크의 검에서 무한검결이 펼쳐졌다.
무한검결 비전식(祕傳式)
이결식(二結式)
거룡참(巨龍斬)
비전식이 펼쳐지자 지크의 검에서 뿜어져 나온 아스트랄 소드가 영역 전체를 휘어잡았다.
쿠구구구구!
그랜드 마스터인 지크의 검은 단순한 파괴의 힘이 아닌 근원 그 자체를 소멸시키는 힘을 품고 있었다.
거룡참이 공중에 떠 있는 붉은 게이트를 거침없이 베었다.
촤아아아악―
가는 실선이 붉은 게이트를 가르고 지나갔다.
마치 유리 조각이 쪼개지듯 붉은 게이트가 갈라지며 가로로 어긋나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라몬이 손가락을 딱 하고 튕겼다.
그러자 용의 숨결이 실패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까처럼 갈라진 게이트가 시간을 되돌리듯 원래대로 복원됐다.
지크는 이를 보고 어금니를 꽉 물었다.
‘설마 라몬도 되돌리기의 권능을 가진 건가?’
크로노스는 시간을 다루는 권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 권능을 받은 지크는 시간을 조종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복잡한 조건을 충족시켜야만 했다.
그만큼 일반 권능과는 확실히 달랐기에, 시간에 관한 권능을 지닌 존재는 오로지 크로노스뿐이라 생각했는데 라몬 역시 비슷한 권능을 지닌 듯했다.
지크는 복잡한 머릿속을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생각했다.
‘놈이 가진 건 시간에 관한 권능이 아닐 수도 있다. 다름 아닌 흉신의 권능이니.’
상위급 성좌들일수록 이용 범위가 넓은 권능을 가지고 있다.
벨리알의 권능 기만 역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양한 효과를 낼 수 있었다.
지크는 라몬이 가진 권능 역시 이와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중요한 건 놈이 또 권능을 쓰게 되면 의식을 막을 수 없다는 거다.’
지크는 어쩔 수 없이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손에 쥐어진 흑암검 레바테인을 바라봤다.
‘흑암검 레바테인의 고유 권능 혼돈기…….’
혼돈기의 발동 효과는 성좌의 권능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설명만 봤을 때는 활용도가 높은 능력이라 생각했는데 연습 삼아 실행해 봤을 때 큰 단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사용을 자제하고 있었다.
혼돈기를 발동했을 때 그 효과가 지크 자신에게도 미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돈기를 펼치게 되면 그가 지닌 모든 권능은 물론 시스템의 효과도 쓸 수 없었다.
적들의 반격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할 수도 있었기에 혼돈기의 발동을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뒤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지크는 레바테인을 치켜들고 혼돈의 힘을 이끌어 냈다.
쿠구구구구!
성창 롱고미안트의 힘이 깃든 레바테인은 성좌들을 죽일 수 있는 혼돈의 힘을 품고 있었다.
지크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라몬이 제사장에게 소리쳤다.
“제사장! 게이트를 빨리 열어라! 지크 드레이커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제사장은 게이트를 통해 고립계에 갇힌 아지타하카의 차원과 연결하는 중이었다.
고립계 자체가 심연 저편에 존재하는 아득히 먼 층위이다 보니 제사장의 힘으로도 게이트를 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파지지지지직―
게이트에서 붉은 전류가 흐르며 안에서 불길한 기운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립계에 갇혀 있는 아지타하카와의 연결에 성공한 것이었다.
고오오오오오―
게이트 안쪽에서 영혼을 얼어붙게 만드는 기이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흉신 아지타하카의 식령(喰霊)들이 울부짖는 소리였다.
라몬이 광기 어린 웃음을 지으며 게이트 너머의 아지타하카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스스로 성좌의 격을 쟁취한 흉신이여! 오랜 유폐를 끝내고 오늘 이 땅에 강림하소서!”
쿠구구구구!
라몬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게이트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악―
온몸의 가죽을 이리저리 기워 놓은 듯 기괴한 모습을 한 아지타하카의 식령들이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서로 나가겠다는 듯 게이트로 손발을 내밀었다.
콰드드득!
아지타하카의 식령들은 서로를 밀치느라 팔다리가 찢어지며 게이트 안에서 튀어나왔다.
제단과 단상 주변에 떨어진 식령의 팔다리들이 꿈틀거리더니 이내 몸이 다시 재생되면서 본래의 모습으로 수복됐다.
카아아아악!
식령들이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번뜩이며 끈적한 산성 침을 질질 흘렸다.
기워 놓은 상처가 터지며 그 안에서 새로운 입들이 생겨났다.
현상계의 생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끔찍한 외향이었다.
그렇게 게이트 안에서 식령들이 쏟아져 나오던 어느 순간이었다.
콰드드드득!
거대한 손 하나가 게이트에서 쑥 튀어나오더니 식령들을 한 손에 잡아 쥐고서 힘을 주었다.
주르르륵!
한순간에 식령들이 끈적한 혈수가 되어 단상 위로 흘러내렸다.
라몬은 게이트에서 나온 검은 팔이 누구의 것인지를 곧장 알아보았다.
“흉신 아지타하카시여!”
팔이 다시 안으로 쑥 들어가더니 이번엔 게이트 안에서 붉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불길함을 품은 흉신의 눈동자가 현상계 너머를 바라보는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러다 눈동자마저 뒤로 물러나더니 양손이 불쑥 나타나 작은 게이트 구멍을 잡고 찢기 시작했다.
콰지지지지직―
안정화되었던 게이트의 에너지가 불안정하게 변하면서 사방으로 인과성의 후폭풍이 일어났다.
아지타하카라는 규격 외의 존재가 현상계에 강림하기 위해서는 카르마의 눈을 속이는 것이 중요했다.
인과성의 후폭풍을 감당하지 못하면 카르마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게이트를 닫아 버릴 터였다.
제사장은 주문을 외우며 혈루석의 힘으로 인과성의 후폭풍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콰지지지지직―
아지타하카가 손으로 게이트를 찢어 내면서 끔찍한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어느새 게이트는 꽤나 넓어져서, 이제는 아지타하카의 본체가 머리를 들이밀고 나오려 시도하고 있었다.
파지지지직!
아지타하카의 본체가 직접적으로 현상계에 나오려 하자 인과성의 후폭풍이 더 크게 일어났다.
제사장은 이 정도의 혈루석이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큰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월의 시간이 끝나면 카르마의 법칙이 정상화되어 반발력이 크게 작용할 수도 있다.’
어떻게든 적월이 떠 있는 동안 아지타하카를 지상에 강림시켜야 했다.
제사장이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힘을 쓰는 사이, 어느새 아지타하카의 머리 반절이 차원의 구멍을 빠져나왔다.
카아아아아악!
흉신이 입을 쩍 벌리고서 괴성을 내질렀다.
그 끔찍한 괴성만으로도 오러나 마력이 부족한 이는 귀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츠츠츠츠츠―
갑자기 사방이 잿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게이트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힘을 쓰고 있던 라몬과 제사장은 갑자기 바뀌는 풍경 색을 보며 깜짝 놀랐다.
회색빛으로 변한 곳에서 작은 소용돌이들이 생겨났다.
“이게 무슨!”
지크가 펼친 레바테인의 고유 권능 혼돈기가 영역을 점차 잠식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혼돈기의 영역 안에서는 그 어떤 성좌도 권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라몬은 게이트를 유지하고 있던 아지타하카의 권능이 점차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제사장! 어서 빨리!”
제사장이 손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아벨의 심장에서 흘러나오던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누워 있던 아벨이 몸을 튕기더니 눈과 코, 입에서 검은 기운을 뭉텅이로 뱉어 냈다.
“크아아아아아!”
아벨을 매개체로 삼아 그의 몸속에 깃들어 있던 솔로몬의 힘을 공명시킨 것이었다.
그러자 게이트가 좀 더 넓게 벌어졌다.
카아아아아아―
어느새 아지타하카가 한쪽 팔과 머리를 들이밀고 몸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콰드드드득!
아지타하카의 본체가 단두대에 올라가 잘린 몸처럼 공중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게이트가 그대로 닫히면서 현상계 밖으로 튀어나온 부위만 잘려 버린 것이었다.
쿠구구구구―
얼굴이 하얗게 질린 라몬이 고개를 들었다.
사방이 혼돈의 소용돌이로 가득 차 있었다.
라몬은 아지타하카에게서 받았던 권능이 느껴지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지크 드레이커가 어떻게 이런 힘을?’
제사장에게 들었기에 지크가 용의 힘과 불멸의 힘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성좌의 힘마저 지울 수 있는 능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잘린 아지타하카의 팔과 절반의 머리는 흉물스럽게 단상 아래쪽에서 굴러다니고 있었다.
잠시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는 그때 회색 소용돌이에 휘감긴 지크가 천천히 이들을 향해 다가왔다.
지크의 눈동자는 황금빛 용안이 아닌 소용돌이치는 혼돈 그 자체였다.
라몬이 지크를 보며 소리쳤다.
“지크 드레이커어어어! 네 녀석이 감히이이이!”
수십 년을 걸쳐서 기다려 왔고, 준비해 온 숙원이었다.
아지타하카의 힘을 얻기만 하면 모든 것을 자신의 발아래로 무릎 꿇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영광이 막 이뤄지려는 순간에 지크 드레이커가 모든 것을 망쳐 버렸다.
지크는 레바테인의 혼돈기를 유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었다.
집중을 조금만 흐트러뜨리면 그의 몸은 물론이고 정신까지도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았기에, 조금도 방심할 수 없었다.
‘여기서 혼돈기를 풀어 버리면 아지타하카의 소환이 다시 시작된다.’
지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혼돈기를 유지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라몬과 제사장을 보며 말했다.
“라몬 지멘스, 하비 웨스트. 네놈들의 계획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헛된 저항하지 말고 투항해라.”
지크의 말에 라몬이 이를 갈며 소리쳤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화르르르륵!
라몬의 손에서 불로 이루어진 검이 나타났다.
지멘스는 과거 칠왕국 시절 그 어떤 곳보다 강력한 마법 무구를 제작하고, 다루던 가문이었다.
그 비전은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아지타하카의 권능을 쓸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라몬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라몬이 지크를 향해 마법검을 휘둘렀다.
콰콰콰콰!
마법검에서 수십 개의 불꽃 화살이 튀어나와 지크를 향해 날아왔다.
후우우웅!
지크가 레바테인을 휘두르자 혼돈기의 폭풍이 불꽃 화살을 휘감아 그대로 지워 버렸다.
이를 본 라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혼돈은 파괴와 소멸의 더 큰 범주였다.
성좌의 권능마저 지울 수 있는 혼돈의 힘이기에, 마법도 당연히 지울 수 있었다.
하지만 절대적인 능력을 지닌 혼돈기에도 단점은 있었다.
혼돈기를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정신력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만약 패시브 스킬인 불굴의 의지와 무한 체력이 없었다면 지크는 혼돈기를 제대로 유지하지도 못할 터였다.
지크가 앞으로 한 발자국을 더 내디디려 할 때였다.
가만히 이를 지켜보던 제사장이 지크를 향해 말했다.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구나, 지크 드레이커.]“이제 그만 놀라고 죽어라. 나락의 망령 놈아.”
그 말에 제사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순간 제사장이 감추고 있던 혈루석 하나를 꺼내더니 위로 던졌다.
우우우웅!
혈루석에서 빛이 나더니 이내 크게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