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ating the World Tree RAW novel - Chapter 318
요람의 붕괴 (2)
침대 위. 이시헌의 방 안.
만화책을 얼굴 위에 덮고 있던 태양이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흐아아아암. 왜 형님 안 오냐. 안 그래도 요즘 분위기 흉흉하구만.”
작업을 치고 있던 플라워의 움직임을 눈치챘다나 뭐라나. 슬슬 그럴 때가 되긴 했다.
목령왕만 구하면 되는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태양은 침대 옆 바닥에 앉아있는 아오리 쪽으로 눈을 돌렸다.
“야.”
건성으로 부르자 고개를 돌리는 아오리.
새침한 눈동자에는 ‘저 새끼 또 저런다.’ 하는 감정이 담겨 있다.
“그거 언제까지 만들 거냐?”
그 물음에 들고 있던 조각 칼을 털어냈다.
칼에 묻어 있던 톱밥이 떨어지고, 아오리는 손에 쥔 나무 조각을 자랑하듯이 내밀었다.
“잘 만들었지.”
“그게 뭔데.”
“나무 보지.”
이른바 옹이홀. 나무 중에서도 말랑한 재질이 따로 있어서 애용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작년까지만 해도 취미에 불과했던 아오리의 솜씨는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한다.
“하라는 보필은 안 하고, 오나홀이나 만들어 재끼는 꼬라지 하곤…. 야, 형님이 이 꼴 보면 뭐라고 말할 것 같냐?”
태양의 핀잔에 턱을 짚고 길게 고민하는 아오리.
“잘했다고 칭찬하지 않을까?”
“쯔쯔쯔. 넌 아직 형님을 몰라. 그 사람만큼 나무를 혐오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나무가 안 꼴릴 수 있어?”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 좀 그만 만들어. 괜히 욕먹기 싫으면.”
아오리는 입을 삐죽 내밀곤 자신이 만든 물건을 슬쩍 벌려 보았다.
안쪽 주름까지 세밀하게 구현된, 장인 정신이 엿보인다.
“이거 현자 생각하면서 열심히 만든 건데.”
“현자? 그 사람이 갑자기 왜.”
“그 사람이라면 이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하면서 만들었어. 상상은 자유잖아.”
“와 미친년.”
“왕님도 현자같은 사람이면 좋아할 거 아니야?”
“좋아하겠지.”
이시헌의 멘토이자, 이번 세 번째 시련을 맡은 사람.
태양은 현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북유럽의 귀족.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색은 색기는 없지만, 순백의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렇다고 색기가 부족하지는 않다.
그 커다란 가슴은 뭇 남성들의 심장을 뒤흔들만하다.
“…생각하고 보니 제법 수요가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에이, 그런데 형님이 뭐 다른 사람한테 눈 돌릴 사람인가. 능력치 올릴 용도라면 모를까. 현자님만큼 예쁜 사람이 주변에 널렸는데?”
“누구?”
태양은 즉시 핸드폰을 꺼내어 인터넷에 사진을 검색해 보였다.
그 안에는 피부 하얗기로는 둘째가면 서러울 정도의 얼굴이 공항에서 자신을 찍는 카메라를 새침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백도.”
태양 가라사대. 단언컨대 헌터 외모의 1위라 부를만 하다.
도원향의 리더이자 실력과 외모 둘 다 잡은 존재.
명예로는 현자를 이기지 못하겠지만 순수 외모로 평하라 하면, 지금까지 본 헌터들 중 가장 예쁘다.
개개인의 취향차에 따라 갈리긴 하겠지만.
“남자들은 이런 여자 좋아하는구나.”
“시발 이걸 안 좋아하면 사람이 아니다. 손만 잡아도 뻑 가지. 게다가 이야기 들어보면, 금방 사귈 것 같던데.”
평소 백도와 시헌을 지극히 밀어주던 둘이다.
당장 [백도♡시헌 지지해.]라는 문구가 걸린 플랜카드를 들고, 어린 나이의 소녀들처럼 소리라도 지를 수 있다.
아오리는 그 말에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왕님 눈에 현자는 눈에 안 찬다고?”
“그건 아니지만.”
이시헌 그 양반이 정신 상태 만큼이나 여자 관계도 오락가락하다.
계기만 있으면 언제 긴밀한 관계가 맺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목령왕의 천운을 타고났으니 운 좋게 여자 한둘 꼬시는 것쯤이야 전매특허 아니겠는가.
“그래도 어떻게 현자를 노리겠어?”
“그건 그래.”
아오리는 태양의 말에 동의했다.
애초에 이시헌이 현자를 노릴 생각도 하지 않겠거니와, 무엇보다 현자라는 존재의 위치가 어마무시하다.
무궁과 동급. 혹은 그보다 약간 아래의 취급이다.
무궁보다 조금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건 절대 이상한 게 아니니까.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취급받는 둘이니만큼 노릴 생각도 해선 안된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한 번 박아보려고 꼬신다?
아무리 인생 막살고, 옹이가 있다면 거기에 박고 보는 태양조차 한사코 말릴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해봐야 뭔 소용이냐. 형님이 알아서 하겠지.”
“응.”
아오리는 자신이 만든 걸작을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마지막으로 속옷을 착용해주는 것으로 완성.
고귀한 모습 아래의 곰돌이 속옷. 왜인지 그게 어울릴 것 같았다.
-덜컥!
그 순간 문이 열렸다.
아오리와 태양의 얼굴이 거의 동시에 돌아갔다.
“어, 형님. 오셨슴까?”
“하.”
약간의 스트레스가 섞인 얼굴의 남성이 둘을 보자마자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니들 여기서 뭐하냐?”
* * * * * * * *
태양이 침대를 슬쩍 비키며 중얼 거린다.
“형님을 위해 침대를 따땃하게 덥히고 있었습니다.”
“미쳤니.”
“하하 죄송.”
오랜만에 본 태양이 즐거운 듯 실실 웃었다.
산수유와 마로니에는 아무래도 신분상 전화할 일이 많다 보니, 휴식을 취하고 저녁쯤에 만나기로 했다.
나 역시 연락할 사람도 있고 해서 먼저 들어온 건데. 니들이 그렇게 있으면 안 되지.
“설마 나 없을 동안 계속 내 방에서 잤냐?”
“형님 침대가 이상하게 더 푹신하더라고요. 원래 이런 게 좀 배덕감이 있잖아.”
“…뭐?”
“그러게 방 간수를 잘했어야지. 비밀번호도 훤히 꿰뚫려선…. 아 죄송해요. 죄송- 아악!”
킥킥대며 자기에게 어울릴 법한 농담을 연속으로 쳐온다.
들고 있던 캐리어를 태양의 얼굴에 내던진 나는 바로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왕님.”
아오리 너는 또 뭘 들고 있는 거냐.
-활짝!
말랑한 고무나무 조각품을 보란듯이 내밀며 웃는 얼굴을 보니 머리가 지끈거려왔다.
“…그래 니들이 원래 이랬었지.”
한동안 없다가 있으니 눈물은커녕 화만 더 난다.
일상에 조잘거리는 애들이 있으니 즐거운 것도 있긴 하지만 피곤해.
그래도 마침 잘됐다고 할 수 있다.
“니들한테 할 일이 생겼다.”
캐리어를 풀어 짐짝을 정리하던 태양과, 슬쩍 나무 조각을 내 침대 옆에 배치한 아오리가 동시에 나를 봤다.
“오. 목령왕의 첫 행보입니까? 이제 막 세상에 나오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현자님한테 부탁받은 거.”
현자. 그 이름을 들은 둘이 어깨를 떨었다.
아오리는 잠시 저 쪽의 나무 조각을 흘겼다.
“얼마 안 가서 여기 플라워가 쳐들어오는 것 같더라고.”
“예, 저번에 형님이 얘기해주셨지 않습니까.”
“정확한 날짜까지 알아 왔어. 어디까지나 상대측 계획이라, 언제든지 수정될 수는 있긴 한데. 네 번째 시련 전까진 일어날 거야.”
네 번째 시련이 시작되기 전. 두 번째와 세 번째 시련의 탈락자가 비행기를 타고 자국으로 복귀하는 시기가 있다.
민간인 희생자를 최소화해야하기 때문에 습격은 그 이후로 예정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현자는 이를 단번에 부정했다.
“그 말은 플라워랑 적대하겠다는 말입니까?”
태양의 물음에 나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문제라도 있어?”
“아뇨 뭐, 형님 선택이시라면야.”
피식 웃어온다.
“그럼 세계수랑 작당하겠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아니야.”
“예? 여기 지키겠다는 소리 아니었습니까?”
내가 요람을 지키긴 왜 지키냐.
언제까지나 현자의 부탁은 민간인들의 보호다.
희생자를 최소화하는 것이 목적이고. 적어도 배신자가 아닌 생도들만은 온전히 생환시켜야 한다.
“아하.”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태양.
“그런데 그게 제일 어려울 텐데. 세계수 지들 말로는 사람 아낀다 아낀다 하는데. 개미 목숨만도 못하게 여기는 게 사람인데요.”
“그러니까 우리한테 부탁한 거겠지.”
“우리?”
“산수유랑 마로니에. 그리고 몇 명 정도 더 모을 예정이고.”
산수유의 전투력은 이미 예전에 본 바로, 국목에 견줄만 하다.
당장 첫 번째 시련에서 다른 국목과 어울려 매화와 붙었을 때만 해도 곧잘 하지 않았던가.
그때가 아직 자신의 힘에 적응하지 못했을 때였으니. 잠재력은 차고 넘친다.
애초에 국목과 견줄만하다는 시점에서 다른 헌터들보다 몇 배는 소중한 전력이었다.
‘개인적으로 산수유는 그만두게 하고 싶지만.’
자신이 돕고 싶다는데 그 이상은 아집이다.
“그러니까, 그걸 저희가 도와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어?”
“뭐 까라는 대로 까는 거죠. 그런데 저희 포함해도 다섯인데. 가능하겠습니까?”
태양은 여전히 캐리어에서 내 짐을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플라워인데. 현자 하나 예상하지 못할까요.”
위험한 건 사실이지만 어지간한 전력은 요람에 집중될 거고.
나도 나에게 손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현자를 도울 셈이다.
“도울 뿐이야. 사람은 더 늘리긴 해야지.”
“그 편이 맞을 것 같긴 한데. 누가 플라워일지도 모르는 마당에, 그게 되겠습니까?”
“적어도 절대 아닌 놈은 알지.”
플라워가 아니라 단정해도 괜찮을 사람이 몇 있긴 하다.
그것도 나름대로 전력이 되는 놈.
직접 붙어봐서 안다.
태양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살며시 갸웃거렸다.
아오리는 그저 날 따르겠다는 듯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고.
“형님.”
태양이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진지하게 나를 바라봤다.
“사람 돕는 것도 좋은데. 이거. 형님한텐 상당히 좋은 기회인 거 아십니까?”
“알아.”
“어?”
예상치 못한 대답에 벙 찌는 태양.
“뭐라고요?”
“안다고.”
전 세계의 많은 종의 나무들이 위치한 요람.
그러나 삼엄한 경계와 그만큼 쏠린 관심 때문에 손을 대기는 힘들다.
플라워가 침입해오는 그날, 어느 쪽의 편도 아닌 나로서는 두 세력의 전력을 크게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다.
거기엔 심심한 덤도 충분히 뒤따를 거고.
내가 괜히 현자를 돕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나는 차분하게 내 생각을 정리해 말해주었다.
내가 여기서 노리는 바는 무엇인지. 그리고 또 뭘 알아야 하는지.
대외적으로 중대한 이 사건은 어떤 악질적인 행동이라도 조작하기 용이하다.
내 이야기를 전부 들은 태양은 입을 벌리곤 감탄했다.
“…형님. 사실 머리가 돌아가긴 했군요?”
“뒤질래.”
“아뇽.”
언젠가 넘을 선이긴 했다.
이젠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기도 했고.
나는 내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세계수의 남편 후보. 목령왕. 천마의 힘. 수준급의 잠재력.
몇 달 만에 이뤄진 성장은 괄목할 만하고, 누구에게 감추지 않아도 제 목숨 하나 부지할 정도는 된다.
“그런데 신기하네요. 현자님이 목령왕인 형님한테 도움 요청이라니. 뭔가 꼼수가 있는 건 아닐까.”
“있든 뭐든. 적대하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
태양의 말을 흘려 들으며, 현자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문득 그녀 생각이 나 상태창을 작동시켜 보았다.
【‘식목도감’에 뽕나무가 추가됩니다.】
【‘식목도감’에 무화과나무가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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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뽕나무[도감번호:452][학명:Morus alba L]
-이명 : 오디나무
-식물계 목인(木人) 뽕나무과 뽕나무속 뽕나무. 3~4m가량 자란다.
-꽃말 : 지혜, 못 이룬 사랑.
-적성 : [마법 적성], [지능 적성]
-개방 정보 :14.51%
‘연둣빛 뽕잎 사이로 봉긋.’
‘젖살 드러낸 오디. 어머니 젖꼭지처럼 붉어질 때면.’
‘봄이면 옷고름 풀어헤치고 딱 한 번 젖 주고 가는 어머니 나무.’ – 뽕나무/김도수 「잔뫼로 간다」 2015. 3면.
[도감 개방 특전, 미약한 스텟 상승과 마법에 관한 모든 적성. 지혜가 눈에 띄게 상승합니다.] [짙은 피를 가진 수목과의 관계로 후천적 능력치가 0.2씩 상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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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나무[도감번호:453][학명 Ficus carica]
-이명 : 선악과 나무.
-식물계 목인(木人) 뽕나무과 무화과나무속 무화과나무. 봄~여름의 개화기이며, 아시아 서부에서 지중해 연안이 원산지. 곳곳에 서식한다.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의 나무로서, 무화과 나무에 싹이 트면 구세주의 재림이 있으리라는 말이 있다.
-꽃말 : 풍부, 다산, 풍요한 결실, 열심.
-적성 : [정령 적성], [지혜 적성]
-개방 정보 : 1.01%
[도감 개방 특전, 미약한 스텟 상승과 정령에 관한 모든 적성, 지혜가 눈에 띄게 상승합니다.]—
‘음?’
두 그루.
한 그루가 아니라 두 그루가 기록되어 있다.
관계를 나눈 것은 현자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하다못해 삼중 인격인 황도와 관계를 가졌을 때도 한 그루밖에 기록되지 않았다는 걸 생각하면 기이한 일이다.
‘같은 뽕나무과긴 하지만. 이상하긴 한데.’
현자 그 사람이라 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에게는 이득. 능력치의 성장은 지금까지 중 가장 눈에 띌 정도였다.
이러면 열매도 같이 나는 건가.
어차피 두 번 이상 관계를 가질 일은 없다.
미련은 가볍게 떨쳐냈다.
몸 안의 단전을 뒤져보니 확실히 이전보다 많이 쌓여있는 마력.
지금까지 이런 경험은 황도에게서밖에 느껴본 적이 없다.
역시 이 수단이 능력을 올리는데에는 가장 우월하다.
강한 존재와 관계를 가질수록 능력치의 상승 폭은 커지는 모양.
나는 어깨를 빙빙 돌려 풀었다.
늘어난 정령 적성도, 내 새들에게 충분한 발전을 가져다 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