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a terminally ill genius survives RAW novel - Chapter 118
◈ 능법광륜기 (6)
거대한 석문이 갈라지는 와중이었다. 불쑥 다가온 독군 당운황이 입술을 뗐다.
“자네, 정씨 성에 호가 섬예라 했나.”
“예, 가주 어른.”
정연신은 정면을 응시한 채 대답했다. 담담한 어조였다.
당가주를 곁에 두고도 시선을 주지 못한다. 이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까닭이다.
마광익의 안녕을 바랐다.
당운황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정연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말을 이었다.
“언행과 몸가짐에 격조가 있는 게, 그저 그런 낭인 출신은 아닌 듯하군. 혹시 환초도인(還初道人)이란 자를 아는가?”
“채근담을 저술한 분이지요.”
소년은 조용히 대답했다.
하남 정가장은 신야현에서 으뜸이었다. 위세를 부리는 게 졸부의 행태로 보일까 저어했다.
하여, 혈족이라면 교양이 있어야 했다. 내놓은 자식조차 손에서 학문을 놓을 수 없었다.
대명강목과 사서삼경에, 채근담 역시 겉핥기로나마 훑었다.
당운황의 무성한 턱수염이 입매 양쪽으로 올라갔다.
“식견이 있군. 유불도 삼교를 잘 엮었지. 삶의 처세를 알려주는데, 음미해 볼 만한 말이 많다네.”
“…….”
“밤과 낮이 소란스레 바뀌어도, 그 빛은 불변의 삼라만상과 같이 천하에 그대로다. 군자의 덕목을 일컫는 말일세.”
소년이 아는 구절이다. 모두 외우고 있다.
그런데도 와닿는 바가 조금 달랐다. 살아온 세월의 차이일까.
구구궁―!
명공도의 동역 석문은 앞서 거쳐온 곳들과 달랐다. 유달리 커다랬다.
천천히 돌아가는 기관진식과 함께 문이 조금씩 열리는 가운데, 당운황의 말이 이어졌다.
“급하게 펼치는 무공은 뒤가 없지. 한가로운 때에는 정중동(靜中動)의 대비를, 다급할 때는 동중정(動中靜)의 평온을 가지는 게 좋네. 검과 암기가 모두 그러하지.”
초고수의 조언이었다. 목소리에서 현기가 느껴졌다. 정연신은 무심코 직감했다. 이 역시 기연이라고.
태염룡이 불쑥 끼어들었다.
“말을 꼬아서 하는 데 일가견을 지니신 듯합니다. 성질 급하면 골로 가기 십상이란 얘기 아닌가? 기본 중의 기본인데.”
“황보 소가주의 언행이 파격적이란 풍문을 들었네. 사실이었군. 자네 말이 옳아. 섬예, 이 친구에게는 여유로운 마음이 필요해 보였네.”
“우리 임시 대주가 어려도 애늙은이입니다. 어련히 알아서 할까.”
공적을 위한 언행이다.
허나 노골적인 아부조차 태염룡의 입을 거치면 느낌이 미묘해졌다. 당운황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지. 늘 뇌까렸다네. 아내의 원한을 온전히 갚으려면, 일단은 살아야 하니까 말일세. 복수를 하면서도 명줄을 챙기자면 말이야.”
건조한 낙엽을 훑는 바람 같았다. 목소리가 그랬다.
한때 절세고수였던 자가 내상을 입은 채 강호 무림을 독보한다.
평생의 반려를 잃은 까닭이다. 그 고통의 질곡이 어느 정도일까. 정연신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채근담. 밤낮이 바뀌어도 빛은 변하지 않는다.’
당가주의 말을 내면에 담았다. 단 한 번 곱씹었다.
‘진기 운용은 차분하게. 검로는 동중정으로.’
그리고.
정연신은 명공도 동역의 빛을 향해 발을 디뎠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열린 문을 거침없이 지나치는데, 어느새 달음박질이 경공으로 화하고 있었다.
명족의 바람줄기가 다리를 휘감았다. 청명이 알려준 신법 비기였다.
파악!
광활한 동굴의 땅바닥이 발밑을 단단하게 밀었다. 정연신은 그대로 질주했다.
희끄무레했던 명공도의 조명이 더욱 밝아져 있었다.
동역은 달랐다. 승천을 기다리는 이무기가 터전으로 삼은 공동마냥, 입구부터 광활했다.
천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저의 어느 정도까지 내려온 걸까.
등 뒤로는 묵묵히 함께 내달리는 환익대의 기척이 느껴졌다. 유일한 위안이었다.
‘저기 있어……!’
시야가 활짝 열렸다. 날숨을 다섯 번도 채 내뱉지 않은 순간이었다.
황폐해진 마을이다.
몇 걸음 더 디딘 순간 눈에 들어왔다. 드넓은 공터라 해도 될 듯했다. 지하에 태풍이라도 불어온 것마냥 멀쩡한 민가가 없었다.
그 속에서.
검격을 섞고 있는 고수들이 있다. 족히 오십여 명은 될 듯했다. 그들 전원이 고수였다.
쾌속한 신법의 몸놀림들이 곳곳에서 돌개바람을 만들고 있었다.
시야에 미치는 모든 공간이 전장으로 화한 듯했다. 각지에서 실로 격렬하게 부딪혔다.
쾅! 쿠웅!
공기가 떨렸다. 발경 경파의 충돌이었다.
칠주야를 넘게 겨뤘다는 무림 고수들의 일화가 드물지 않다지만, 진입하자마자 이 지경이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싸운 걸까. 이제는 추격조차 그치고 대회전에 돌입한 듯했다.
‘마광익. 마광익은.’
달리면서 전장을 훑었다.
시체가 많다.
하늘은 무심하여 자비롭지 않다 했다. 정연신의 선배들이 누워있지 않을 리 없었다.
소년의 강호 경험은 이제 일천하지 않다. 전원 생존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이미 입황성에서 보고받은 바, 백색 두 명이 죽었다고 들었다. 추가 전사자가 적기를 바랄 뿐이었다.
‘오유광(吳柳珖) 선배, 두청천(杜淸泉) 선배.’
덧없는 바람이었다. 급속도로 확대되는 시야에 백색 선배들의 시신이 섞여 든다.
움직이고 있는 자들 중에서는 입황성의 하얀 무복이 없다. 추측건대 백색은 전멸했다.
마광익 전원이 열댓 명 남짓 남은 듯 보였다. 고군분투하는 청명과 백미려의 청색 장포에 혈흔이 가득했다.
스릉!
환익대의 결성 전에 홍주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선두에서 입황검을 뽑아달라 했다.
지휘하고 말고 할 여유가 없었다. 소년은 자신도 모르게 발검을 마쳤다.
“음? 누구인가?!”
“황……! 입황성이로군!”
가까워진 적들의 목소리가 스산하게 들려왔다. 정연신이 전장에 난입하며 검파를 꼭 움켜쥐었을 때였다.
격전의 중심지에서.
쩌엉―!
흑색 장포의 왼쪽 소매가 날아가고 있었다. 강인한 팔뚝이 홀로 치솟았다.
흉터로 가득한 마광익 대주의 왼팔이 절단되어 날아가면서, 채 뿌리지 못한 경파의 폭풍을 만들었다.
적측 초고수 두 명을 홀로 감당하던 차였다.
“마광익주! 흑색 최강을 논할 만하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노라!”
손날로 마진의 왼팔을 잘라낸 금발벽안의 서역인이 소리쳤다.
이국적인 중년 사내의 음성에 막강한 공력 파동이 실렸다. 의도를 알 만했다.
제 편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자 내뱉은 것이다.
순마신수(純魔神手) 하율극(河栗戟).
몹시 유명한 초고수였다. 거대한 체구부터 남달랐다.
육 척에 이르는 장신이다. 푸른빛 눈에는 위엄이 가득했다.
등 뒤로는 소맷자락이 없는 칠흑의 외투를 늘어뜨리고 있는데, 순마련 특유의 복색이었다.
사천 순마련.
십삼천의 대방파다. 명 건국과 함께 멸문한 마교 일맥이 다시 봉기한 집단이었다.
개중에서 순마신수라면 이 자리에 있는 십삼천 정예들의 수장이라 할 만했다.
합공으로나마 마진의 팔을 벤 자. 무지막지한 기파가 피부를 저며 온다. 입황성 흑색의 영역이란 의미였다.
알 바 없다. 정연신의 뇌리에서 생각이 사라졌다.
쾅!
발바닥 용천혈의 진기가 폭발했다. 넋 나간 소년의 발밑으로 돌바닥이 터져나갔다.
화아악!
급가속이었다. 홀로 환익대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정연신은 삽시간에 격전지의 중앙으로 치달았다.
허나 적들의 반응이 빨랐다. 마광익을 몰아붙이던 자들이었다. 여섯 남녀가 소년을 향해 몸을 돌렸다.
십전문과 순마련. 대방파의 비전 무공들이 전면을 가득 채운다.
권격과 창, 검격을 뻗어 오는데 하나같이 범상치 않았다.
정연신의 손끝에서 광화검류의 흐린 빛줄기가 요동쳤다. 입황검이 숫제 몽둥이마냥 휘둘러졌다.
우지끈! 콰앙!
모조리 부러뜨렸다. 적들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날붙이의 파편들, 잘려 날아간 팔, 모든 게 정연신의 후방으로 떨어졌다.
달음박질을 잠시도 늦추지 못했다.
다행히 조무래기들이었다. 적측의 청색급 고수들은 마광익 섬멸에 열을 올리는 듯했다.
파악!
순식간에 중심까지 당도했다. 급습의 묘리를 제대로 살린 까닭이었다.
“연신아!”
외팔의 마진이 놀라 소리쳤다. 순마신수와 십전문 초고수에게 속절없이 밀리던 참이었다.
“증원인가.”
초로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순마신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자다.
이내 가볍게 발을 디뎌 정연신의 앞을 막아선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그 홀로 여유로운 몸가짐을 내보였다.
십전문의 무인이다. 대장군마냥 걸친 암청색 전포에 대검을 든 행색이 특이했다.
범상치 않은 복색과 고절한 무공을 지녔다면, 강호에서 유명해지지 않는 게 힘들다.
검갈마(劍蠍魔) 독고광(獨孤廣).
열여덟 종류의 병기 무공을 집대성했다는 대방파의 검이다.
문파 제일의 타격 집단을 이끄는 자라 했다. 십전문 내에서도 유달리 비범하다고.
“애송이의 기도가 놀랍구나. 정련된 진기가 실로 굉장하다. 이름이 무엇이냐?”
검갈마가 물었다. 진심인 듯했다. 정연신의 온몸을 훑어내리는 눈길에서 감탄이 묻어나왔다. 경악에 가깝기도 했다.
“몸도 잘 닦았고. 아니다. 본 적조차 없는 그릇이로군. 어찌하여 지금 이곳에 왔는가? 더 살았다면 천하를 논할 만한 절세고수가 되었을진대.”
“…….”
정연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건너편에 있는 외숙부의 상세를 살피고 싶었지만, 당면한 초고수의 존재감이 엄청났다.
여유는 하수의 몫이 아니다. 이 순간 강자는 검갈마와 순마신수였다.
정연신을 품평하면서 안타까움마저 드러내도 뭐라 할 자가 없었다.
마진이 팔을 잃고 순마신수와 대치했다.
마광익 선배들은 두 대문파의 고수들을 막아내는 걸로도 벅찬 듯했다. 수적 열세 탓이었다.
뒤에서 그들과 환익대가 족족 합류하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힘에 부친다는 느낌 또한 곧바로 다가왔다.
그저 열세에서 미약한 공세로 전환되었을 뿐이다.
전장의 흐름을 바꿀 고수가 부족했다.
삽시간에 밀집한 십삼천의 무인들을 당가주가 격살하고 있지만, 그가 이곳에 온다 해도 검갈마와 순마신수 중 하나와 대적하는 게 한계일 것이다.
사천당문 태상가주의 모략에 내상을 입은 탓이었다.
‘내가 해야 해.’
소년은 생각했다.
입황성, 순마련, 십전문의 주력 고수들이 격전을 벌이는 곳이다.
명성이 천하에 이르는 초고수가 셋이나 모인 자리였다. 의도치 않게 시험대 위에 섰다. 여기서 이겨야 했다.
“오라.”
검갈마가 웃으면서 말을 건넸다.
정연신은 정가동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곧이어 전신 근육을 조율하기 시작했다.
* * *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암벽 위.
거지들이 여유롭게 퍼질러 앉아 있다.
하나같이 허리춤에 몇 개의 매듭을 단 개방 고수들이다. 전장을 조망하는 품새가 여유로웠다.
“이거, 상황이 영 애매한데. 마광익이 생각보다 더 밀리고 있었군. 맞상대하는 동급 집단이 두 배나 많다고 해도, 수세로 일관한다면 버티는 건 가능했을 텐데.”
후개가 말했다. 자신과 함께 온 개방의 고수들을 향해서였다.
“명공도의 주민들 탓인 듯한데요. 마광익이 어찌 잘 피신시킨 걸로 보입니다. 그 탓에 틈을 보였겠지만.”
“뭐, 그렇게 했으면 당연하죠. 부족한 전력으로 인질을 구하려 했으니…… 마광익의 협의만큼은 우리 거지들도 본받을 만합니다만은.”
그들이 대답했다. 저마다 방자하게 널브러진 자세가 아주 어울렸다.
“틈이 잘 보이지 않는단 말이지. 달마대사의 보패는 이미 순마련 쪽에 넘어간 듯한데…… 어이쿠, 삼살검(森殺劍)이 쥐고 있구만. 마광익 청색한테도 쉽게 밀릴 고수가 아닌데. 우리가 가져올 방법이 없나?”
자신의 턱을 한차례 쓰다듬은 후개가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물어볼 게 있단다.”
여인의 음성과 함께 붉은 빛살이 거지들을 훑고 지나갔다.
은은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안광이었다. 요요하게 피어난 기파가 실로 막강했다.
“무슨……?”
후개를 비롯한 일행이 고개를 든다. 경직된 움직임이었다. 대적하지 못할 고수의 존재를 직감한 것이다.
곧장 경악성이 터졌다.
석벽을 수직으로 딛고 선 여인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무시무시한 보신경이었다.
흑단처럼 흘러내린 머리칼에, 적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그보다 더 붉은 순혈포는 그녀의 전신을 휘감고 있었다. 요사스러우면서도 고고했다.
적옥 같은 눈동자가 개방 고수들을 느긋하게 바라본다. 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 보패에 있다는 응신의 진기 조각 말인데.”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
“몸에 좋을까? 이만한 남자아이가 먹을 거야.”
백옥 같은 손을 살짝 들어 올리면서 묻는다. 얼핏 천진난만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물론, 물론 영험한 효능이 있겠지요! 체내에서 어떤 영기가 피어나지 않겠습니까? 달마대사의 유산이라면, 적어도 해가 되지는 않겠지요!”
후개가 말했다. 몹시 다급한 대답이었다.
“응. 그렇구나.”
칠사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