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nter and the Mad Scientist RAW novel - Chapter 196
196화
그러던 중, 바깥에서부터 왁자지껄한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들키면 곤란한데. 에스페란사는 등을 바짝 긴장시키며 해진 커튼 구멍 사이로 창문 너머를 내려다보았다.
“쿠퍼 지구에 항구 놈들이 들어와서……”
“외곽 쪽엔 벌써부터 경찰청 놈들이 잔뜩이야. 안 잡힌 놈들이 이쪽으로 기어들어 올 수도 있어.”
“볼터 지구도 밀어 버리는 중이고. 이러다 정말 우리도 항구 놈들처럼 되는 거 아냐?”
불안감을 감추려 억지로 높인 목소리들이 집 앞을 지나쳐 차츰 멀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에스페란사는 조심히 책상으로 다가갔다. 삐걱거리는 서랍을 몇 개 열어보다 보니 대충 묶어둔 종이 묶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희끄무레한 빛을 몇 개 띄워놓고 종이를 대충 훑어보았다. 첫 몇 장은 알아볼 수 없어서 넘기고, 그다음은 쓸모가 없어 보여서 또 넘기다 보니 마지막 장에서 지도를 발견했다.
나인 호더 시의 지도. 척 보아도 대충 휘갈긴 지도 외곽에는 빨간 잉크로 점이 찍혀 있었다. 총 네 군데.
새로운 접선 장소인가?
마법 용품 가게 사장은 여기서 가죽 공급책들과 접선한 모양이지만, 그 공급책들이 가죽을 얻는 장소는 또 다른 곳일 것이다.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찾았다.’
하급 가죽과 고급 가죽 중 굳이 하급 가죽의 유통 경로를 물었던 것도 결국 이걸 찾기 위해서였다.
고급 가죽이란 것은 강한 몬스터의 부산물이다. 이건 다리아나 사이러스가 직접 잡아서 유통하는 수밖에 없다. 당연히 유통량도 적고, 미리 모아둔 가죽일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유통량이 많은 하급 가죽은 얘기가 다르다. 이건 바로 던전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에스페란사는 인벤토리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지도를 베껴두었다.
‘찾아가 봐야 하나?’
오늘은 이만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에스페란사는 희미하게 남은 침입의 흔적을 돌아보았다.
잘게 깨진 유리는 불량배들이 술 먹고 벌인 짓이라고 치고, 바닥 위의 먼지를 밟은 흔적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영리하고 예민한 사람이라면 눈치챌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기껏 얻은 정보가 무색해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지금 찾아가는 게 나을 것 같다.
베낀 지도를 인벤토리 안에 던져 넣으며 1층으로 뛰어내렸다. 흙먼지가 얕게 올라왔다 가라앉았다. 가볍게 착지한 에스페란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개의 붉은 점의 위치.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어쨌든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었다.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 * *
선택은 단순했다. 가까운 곳부터.
도시를 가로지르는 전차가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반짝이던 노란 가로등이 드문드문 줄어들고, 피곤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타고 내렸다. 사람이 점점 줄어들었다.
“아가씨는 어디에서 내리나?”
전차 기사가 소리를 높여 물었다. 에스페란사는 곱게 관리된 머리칼을 들키지 않도록 후드를 더 깊게 뒤집어쓰며 말했다.
“다음 역에서 내려요.”
“아하.”
종착역까지 가겠다고 했으면 짜증을 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한 정거장만 더 가도 된다고 하니 기사는 표정을 풀고 순순히 정거장 앞에 세워주었다.
전차에서 내린 에스페란사는 시계탑이 뾰족한 도심에서 멀어진 탓에 풀이 무성한 정거장 주변을 둘러보았다. 빈말로도 이 시대의 젊은 여자가 혼자 올 만한 곳은 아니었다. 전차 기사가 괜히 이것저것 캐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이 근처인데…….”
나인 호더 전체를 그린 지도였던 만큼 붉은 점의 위치가 자세히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면 금방 눈에 띌 텐데.
아, 저거다.
우거진 나무 사이로 삐죽 솟은 시커먼 벽돌 건물이 눈에 띄었다. 에스페란사는 망설임 없이 그리로 향했다.
보이는 것보다 먼 거리였다. 벽이 그을려 시커멓게 보이는 건물이 가까워질수록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사람 소리였다.
“문 쪽으로 붙어! 둘씩 줄지어서 들어간다!”
“쉬프먼 조, 일당은 이쪽에서 받아 가! 못 찾은 놈들은 옆으로!”
뭐지?
에스페란사는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며 조심히 주변을 살폈다.
역은 비어 있었는데 이 건물 근처에만 사람이 잔뜩 있었다. 대체로 가난한 노동자처럼 보였다. 두 사람씩 줄을 선 그들은 차례대로 건물 밖으로 나오는 중이었다.
그리고 문 앞을 지키고 선 깡패처럼 껄렁한 남자들이 뭔가를 들고 나오는 노동자의 손에서 물건을 빼앗았다.
“70장!”
“오오, 쉬프먼. 오늘 수확이 좋군?”
“운이지, 운.”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덩치 큰 남자들과 왜소한 일꾼들. 자그마한 일당을 받고 돌아가는 사람들 중 몇몇은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잠깐만. 이런 그림을 예상하고 온 게 아니었는데.
느낌이 이상했다. 에스페란사는 나무 뒤쪽에 몸을 숨기고 인벤토리에서 던전 탐지기를 꺼냈다.
탐지기에서 반응이 오고 있었다. 상태창은 조용했지만, 시더의 던전 탐지기는 지금까지 틀린 적이 없었다.
그렇다는 건 정말로 저 음침한 건물 안쪽이 던전이란 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 열린 문으로 멋대로 들락거릴 수 있다고?
거기까지 생각한 에스페란사는 뭔가 떠오를 듯 말 듯 한 기분에 눈을 굴렸다. 그러니까, 이게 뭐더라.
“으아악, 다들 비켜!”
생각을 끊어내는 비명소리. 열린 문 안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줄지어 나오던 사람들이 삽시간에 엉켰다. 수십 개의 깡마른 팔이 문밖을 향해 허우적댔다. 멀리서부터 비명이 먹혀드는 것이 느껴졌다.
“뭐야, 큰 괴물은 없다고 했잖아?”
“다들 철수!”
“안쪽 사람들은 어떡하지?”
“버려! 철수, 철수! 다들 죽고 싶어?”
철수하라고 말은 했지만, 덩치 큰 남자들이 챙겨서 떠나는 것은 돈과 가죽뿐이었다.
커다란 승합마차 하나에 몸을 구겨 올라탄 패거리는 사람들을 남겨둔 채 증기를 뿜으며 사라졌다. 멀어지는 마차 바퀴 소리에 부상자의 신음소리와 불안에 찬 웅성거림이 섞였다.
다행히 괴물이 문밖으로 빠져나오지는 않았지만, 아직 안에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미친 거 아냐?”
이렇게 된 이상 은신할 것도 없었다. 나무 뒤에서 빠져나와 문 앞까지 접근하는 동안 이쪽을 보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그러기엔 너무 지쳐 있거나 공포에 질려 있었다.
에스페란사는 과감히 움직이기로 했다. 가벼운 도움닫기와 함께 뛰어올랐다. 개중 건장해 보이는 사람의 어깨를 밟고, 스치듯이 머리 위를 달렸다.
“뭐, 뭐야?”
머리가 짓눌리는 감각에 당황한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한참 안쪽으로 들어가 버린 후였다.
문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들의 머리 위를 지나서 순식간에 건물 내부로 들어왔다.
건물 외벽만큼이나 시커먼 내부를 보니, 그제야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알 것 같다는 점이 짜증 난다.
‘일단 눈앞의 문제부터 해결하고.’
두 손에 하나씩 쥔 세검이 크지 않은 괴물의 머리를 꿰뚫었다. 멧돼지처럼 흉악하게 생긴 머리가 두부처럼 썰려 나갔다.
“뭐, 뭐지?”
그러나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사람들은 괴물이 멈칫한 틈을 놓치지 않고 던전을 빠져나갔다.
밀고 밀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중에도 몇몇은 느닷없이 나타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으나, 생존의 위협을 느낀 사람들이 뒤에서 미는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너무 서두르는 통에 뒤엉키고 넘어지느라 오히려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러나 그러는 중에도 에스페란사의 등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았다.
검을 휘두르던 에스페란사가 순간 멈칫했다.
“아, 쉽다.”
너무 쉬웠다. 마치 팔에 매단 모래주머니를 벗어던진 것처럼, 가벼운 공격으로도 상대는 손쉽게 죽어 나갔다.
멧돼지가 이 안에서는 나름대로 중간보스쯤 되는 강력한 괴물이었을지 몰라도, 7년 차 헌터의 눈에는 식빵과 두부 정도의 차이였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년이 문밖으로 몸을 던지자, 에스페란사는 긴장된 근육을 조금 이완시키며 곁눈질로 상태창을 살폈다.
[던전 발생!유형: 감옥
등급: F
위험도: F
출입형 던전입니다. 던전 곳곳의 문을 찾아 탈출해 보세요.
헌터님, 행운을 빕니다!]
외벽만큼이나 짙은 회색 벽돌. 어디선가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똑. 똑. 그리고 발톱이 벽돌을 긁는 소리. 짐승의 낮은 울음.
폐감옥이었다.
에스페란사는 세검을 쥔 채 깊은 곳으로 나아갔다.
사실 이대로 뒤돌아 그냥 문을 열고 나가도 된다. 하지만 이 감옥 앞에 모여들었던 일용직들, 절대 건전하게 돈 버는 사람들로는 보이지 않던 덩치 큰 남자들이 영 마음에 걸렸다.
물론 모인 이들 중에는 개인으로 온 사냥꾼들도 제법 있어 보였지만……. 딱 봐도 당장 돈이 급한 사람들을 방패 삼아 가죽을 구하고 있는 게 뻔했다.
이 시대의 어두운 면은 적당히 눈 감고 예쁜 것, 화려한 것만 즐긴다면 편하기는 하겠지만, 눈앞에 들이밀어진 그림자까지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저 불쌍한 사람들을 구원해 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이미 나쁜 놈들은 도망쳐 버렸고.
‘결국 여기까지 온 목적도 이루지 못하게 됐잖아.’
정보를 캐낼 만한 상대는 전부 도망쳐 버렸다. 저 밖의 일꾼들이 뭘 알고 있을 리도 없고.
에스페란사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세검을 내질렀다. 양쪽에서 달려드는 괴물을 찌르고, 몸을 허공으로 날리며 박혀 있던 세검을 뽑았다. 끈적거리는 핏줄기가 분수처럼 솟았다.
너무 쉽다. 쉬워서 오히려 어린아이와 싸우는 것 같은 거부감마저 느껴졌다. 에스페란사는 거침없이 찌르고 베어나가면서도 전투를 즐기지 못했다. 모름지기 전투란 스릴이 있어야 하는데, 이건 그저 일방적인 학살이었다.
감옥의 마지막 층에 선 에스페란사가 보스를 마주 보았다. F급 던전의 보스는 흉측한 생김새에 비해 너무나도 약했다.
10분간의 전투 후, 보스의 몸이 무너졌다.
[던전 보스,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보상이 적립됩니다.]에스페란사는 짧은 고민 끝에 보스의 몸에서 나온 부산물을 챙겼다.
쇠창살이 빽빽한 복도를 가로질러 던전 출구로 나오자 바깥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건물 주변은 그저 황량했다.
그사이 다 같이 남은 승합마차에 구겨 타고 가기로 한 모양이다. 낙오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뭐, 상관없다. 다리아만 곤란해지면 되지.
에스페란사는 깊게 눌러쓴 후드를 벗어젖히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실 생각을 하고 한 짓은 아니었다. 순간 열이 받아서 저지른 것에 가까웠다. 그래도 속은 시원했다.
그런데, 닫힌 폐감옥을 올려다보던 에스페란사의 머릿속에 뭔가가 스쳐 지나갔다.
이건 원래 없애라고 있는 던전이 아닌데.
‘왜 까먹고 있었지?’
이제야 이 던전의 정체를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