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became a respectable male god RAW novel - Chapter (176)
#176. 수상한 낌새
‘정말 사람 다루는 게 험하다니까.’
재인은 정비가 끝난 세트로 들어가면서 고개를 저었다.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촬영장을 보면 아무도 이제 데뷔하는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있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스태프들이 축구공이 굴러가서 멈추는 위치,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의 양까지 정하고 테스트 촬영까지 해 둔 덕에 촬영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재인 역시 다른 걸 고민할 필요 없이 세팅된 세트에서 연기만 하면 됐다.
다만 이 모든 준비가 빛을 발하도록 제 몫을 해내기 위해서 매 순간 실수하지 않게 긴장해야 하는 게 조금 피곤했다.
‘그나저나 이건 서비스 컷 같은 건가?’
이미 삼촌의 직업이 목수라는 것은 여러 번 나왔다. 공사 현장에 출장 가느라 며칠씩 집을 비우는 장면도 있었고, 조카와 같이 새집을 만들어서 나무에 달아 주는 장면도 있었다.
굳이 작업장에서 복슬복슬한 머리의 반을 올려 묶고 땀에 젖은 셔츠를 입은 채 나무를 다듬는 장면을 넣을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와! 그림 좋네.’
‘비주얼 깡패라는 말은 이런 데에 써야지.’
‘감독님이 이 장면을 꼭 넣어야 한다고 우긴 이유가 있다니까.’
‘좋아. 캡쳐 각이다.’
스태프들이 감탄하는 사이 재인은 한창 집중해서 나무의 결을 살피는 중이었다. 헐렁한 셔츠 깃 틈으로 속이 보이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표면이 매끈한지 대패질을 더 해야 하는 곳을 찾느라 상체를 숙여서 보고 있었다.
한동안 살피고 나서 더 손볼 곳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몸을 세웠다. 만족스럽게 웃은 재인이 땀에 젖은 얼굴과 몸 그대로 매끈한 월넛 원목 표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컷. 오케이. 좋았어요. 이제 마당 쪽으로 옮길게요.
민선영 감독의 사인에 재인이 몸에서 힘을 뺐다.
다음 장면은 학교에서 돌아온 윤아가 공을 차기 좋게 인조 잔디에 미리 물을 뿌려 두는 장면이었다. 나무를 다듬는 작업에 열중하느라 몸에 들어간 힘을 빼고 편하게 호스를 들어야 했다.
-카메라 위치 기억하시죠? 첫 번째 테이크는 편하게 포커스 안에서 움직여 볼게요.
잔디에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위치에 설치된 카메라와 촬영 장비를 확인한 재인이 호스를 들고 작은 그라운드 옆에 섰다.
축구 선수가 꿈인 조카를 위해 마당 한쪽을 정리하고 만든 인조 잔디 그라운드. 그라운드 안에는 낮은 골대도 한쪽에 설치되어 있고 바깥에는 앉아서 쉴 수 있는 벤치도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직접 나무를 다듬어 만든 것이었다.
-컷! 오케이. 물 뿌리는 장면은 이걸로 충분할 거 같아요. 의상 교체해 주세요. 준비 마치시면 벤치 앞 자전거 신 찍을게요.
그라운드에 물 뿌리는 장면도 찍고 조카의 자전거 안장 높이를 조절해 주는 장면, 간식을 만드는 장면 등. 목공 작업장이 있는 집에서 찍는 장면들을 몰아서 찍고 나니 오전에 촬영할 분량이 끝났다.
“영화 나오면 재미는 모르겠는데 영상은 예쁠 거 같아.”
“응?”
“보면 형 나오는 장면들은 다 화보 같아. 아니, 영화 포스터 같아. 사진 찍었는데 볼래? 대충 찍었는데도 되게 잘 나왔어.”
“보여 줘.”
“여기.”
점심시간이 되자 넓게 퍼져 촬영장을 지키던 재현의 팀이 가까이 다가왔다.
재현의 팀은 원칙은 재인의 개인 경호였으나 실제로는 촬영장 전체를 지킨다고 봐도 무방했다.
경호 범위가 넓었지만, 키퍼 팀까지 가세한 덕분에 인원이 충분해서 그런지 재현이나 다른 팀원들은 가끔 점심을 같이 먹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재현이 점심 식사에 동석했다.
“오! 생각보다 잘 찍었다.”
“내가 잘 찍은 게 아니고 저 감독이 잘한 거야. 색감이 좋아서 그런가, 그냥 막 찍어도 잘 나온다니까.”
“제가 보기에도 민 감독님이 그런 부분에 강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모니터링용으로 찍어 둔 영상도 꽤 보기 좋습니다.”
“그건 다행이네요.”
재현의 설명에 최상호가 말을 보탰다. 자신이 찍은 배경을 넣지 않고 재인의 연기만 잔뜩 담아 놓은 모니터링용 영상에서도 화면이 아름답다고 느꼈다는 말이었다.
민선영 감독의 영상미에 관해선 재인도 같은 의견이었다. 가연과 같이 찍는 장면들이 보기 좋다고 몇 번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변 산책로를 같이 걷는 장면이나 노을 지는 제방에서 같이 공을 차던 장면은 촬영 후 모니터링할 때도 뙈 아름답게 느껴졌었다.
“이번 영화는 포토 북 안 만들어?”
“메이킹 북 말씀하시는 겁니까? 제작 과정을 담은?”
“네, 그거요. 그런 거 안 만들어요?”
“계획에는 없지만, 민 감독님이 촬영 준비를 워낙 꼼꼼하게 해 두셔서 만들고자 하면 만들 수는 있을 겁니다. 메이킹 영상도 촬영 중이고요.”
“만들면 살 사람 많을 거예요. 우리 길드만 해도 단체로 구매할걸요.”
재인은 메이킹 북에 관한 최상호와 재현의 대화에 내심 고개를 저었다. 준비 과정 자료도 많고 메이킹 필름도 꾸준히 찍고 있었지만, 메이킹 북을 출간하는 일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래, 가족이야>는 두고두고 회자될 만큼 많은 자본이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특수한 촬영 기법이나 촬영 도구가 쓰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뛰어난 영상미와 가슴 따뜻한 스토리가 돋보이는 작품일 뿐이었다. 메이킹 북을 출간해도 많은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았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스토리가 좋으니 시나리오 북이랑 메이킹 북을 세트로 묶어서 팔아도 잘 팔릴 겁니다.”
“그렇죠?”
“예.”
“그럼 한 번 건의해 보세요. 안 팔릴 일은 없어 보이지만, 만약 안 팔리면 내가 다 살게요.”
“하하하. 예, 건의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출간 후 안 팔릴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재인 씨가 출연한 영화의 메이킹 북이라면 수요가 적지 않을 겁니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간 뒤 아주 가끔 각 장면의 연출 의도를 담은 감독의 연출 노트나 스토리보드, 실제 촬영 현장을 담은 스틸이나 배우의 스틸, 제작진이나 출연진 인터뷰를 담은 메이킹 북을 출간하기도 한다.
메이킹 북을 출간할 때는 메이킹 북만 따로 출간하기도 하고 시나리오와 메이킹 북을 세트로 팔거나, 영화 DVD를 세트에 추가하기도 한다. 기념으로 간직하긴 좋으나 메이킹 북은 제작되는 경우도 적고 수요도 그리 많지 않았다.
“영화 찍기 전에 형이 독립영화는 이렇다 저렇다 설명했었는데, 실제로 보니까 별 차이 없는 것 같아요.”
“실제로 상업 영화와 차이가 없습니다. 들어간 자본이나 투입된 인력이나 비슷합니다. 배급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최상호의 말에 재인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막 촬영에 들어갔을 때는 몰랐는데 배급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유명한 제작사 대표와 이사를 부모로 둔 사람이 제작 피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쪽을 통해서라면 어렵지 않게 배급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쪽을 통하는 방법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도 많고.’
극장 개봉이 최선이지만, 그게 어렵더라도 판로가 다양하니 걱정할 건 없었다.
“우와! 진짜 재인 님 너무 감사하다.”
“무슨 얘기야?”
“데뷔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벌써 삼 년 차인데 이제야 데뷔해서 감사하다고?”
“아니, 그냥 데뷔해 주신 자체가 감사하다는 거야. 생각해 봐. 만약 재인 님이 데뷔 안 한 일반인이었어 봐. 어떻게 됐겠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처럼 재인이 속으로 생각한 사람이 현장에 들렀다. 제작사 대표와 이사를 부모로 두고 민선영 감독을 선배로 둔 연유로 제작 피디 역할을 맡은 백유나와 그 친구 최송희였다.
두 사람은 점심밥을 먹는 스태프들을 향해 사방으로 고개를 숙여 보이면서 재인이 있는 방향으로 오고 있었다.
“일반인이면 마음 놓고 좋아할 수 없잖아. 굿즈로 장식장을 채우고 벽에 붙인 포스터하고 아침 인사도 못 하고. 마음껏 덕질할 수 있게 데뷔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넌 그런 얘기 하면 안 쪽팔려?”
“쪽팔릴 게 뭐 있어. 난 당당해. 난 일도 덕질도 열심히 건강하게 하자는 주의야.”
“그래. 널 누가 말리냐.”
재인은 처음 만났을 때 그대로인 두 사람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렸다. 촬영장이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보이지 않는 곳에서 힘쓰는 두 사람이 즐거워하는 게 보기 좋았다.
빡빡한 촬영 스케줄에도 촬영장 분위기가 나쁘지 않은 건 저들의 건강한 에너지 덕분인지도 몰랐다.
* * *
재인이 일주일에 오륙일을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빠듯한 일정에도 즐겁게 촬영하는 것과 다르게 김 실장은 인상을 팍팍 쓰고 있었다. 마무리만 남은 재인의 차기작 계약에서 수상한 낌새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다.
‘사인만 하면 되는 시점에 발을 뺀다고?’
출연료와 출연 일정 같은 가장 중요한 사항부터 촬영장에서 사용할 대기실이나 배역의 분장 스타일 같은 세세한 부분까지 여러 차례 만나며 조율을 마친 상태였다. 재인에게 진행 상황을 알려 주고 사인만 하면 끝인 단계였다.
그런데 돌연 상대측에서 태도를 바꿨다. 당장에라도 계약서를 쓸 것처럼 굴던 상대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미온적인 태도로 연락을 회피하고 있었다.
“이유가 뭐지? 우리 재인 씨를 까고 넣을 만한 배우가 없을 텐데…….”
남자 배우의 전성기를 서른 중반으로 볼 정도로 이십 대 중반에 주연을 맡을 만한 배우가 적었다. 농담이 아니고 실제로 이십 대 중반에 주연급으로 자리 잡은 배우는 한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배우들은 이미 몇 년 치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재인의 역할을 뺏어서 드라마를 찍어도 괜찮을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김수혁 쪽은 문제없이 진행하는 모양이던데, 제작진이 바라는 게 대체 뭘까?”
재인과 투 톱으로 출연하는 김수혁의 출연 계약은 오늘내일 마무리될 예정이었다. 크게 욕심내지 않고 단역을 몇 개 가져가는 선에서 조율을 마칠 거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니 김수혁 쪽 소속사에서 훼방을 놓았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Brrrrr.
화면에 뜬 이름에 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연락을 피하면서 그를 고민에 빠뜨렸던 상대의 이름이어서였다.
“김대주입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김 실장님? 나 양호석이에요.
“예, 피디님. 어쩐 일이세요?”
-어……. 그게…….
“…….”
김 실장은 용건을 꺼내지 않고 미적거리는 양호석에 순간 불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평소처럼 살갑게 맞장구치면서 분위기를 바꾸려 하지 않았다. 침묵하면서 상대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5시 47분.’
말이 없는 상대를 기다리면서 시계를 보자 곧 퇴근할 시간이었다. 연예 기획사의 특성상 정시에 퇴근하는 일이 드물긴 해도 일단은 퇴근 시간이었다. 그런 시간에 연락한 의도가 의심스러웠다.
-김 실장님 아직 저녁 안 드셨죠?
“예, 아직입니다.”
-잘됐네요. 그럼 같이 저녁 먹죠.
“예, 장소는 어디로 하시겠습니까? 제가 방송국 쪽으로 갈까요?”
-아니, 아니. 방송국 쪽은 좀 그렇고. 내가 예약하고 알려 줄게요. 그리고 그, 이재인 배우는 시간 어때요? 저녁 식사 자리에 같이 올 수 있나?
김 실장은 양호석 감독의 말에 재인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오후 촬영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고 있을 터였다.
“지금 지방에서 촬영 중이시라서요. 저녁 약속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김 실장님만 나오세요.
“예, 장소 정해지면 알려 주십시오.”
-네. 아! 저녁 자리에 사람 한 명 같이 나가도 되죠?
“어떤 분과…….”
-우리 드라마 투자자예요. 그럼 문자 줄게요. 이따 봐요.
투자자? 통화를 마친 김 실장이 인상을 찌푸렸다. 통화 말미에 양호석 감독이 언급한 투자자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계약서에 사인이라도 했으면 모를까 사인도 하지 않은 배우를 투자자한테 선보이겠다니. 아무리 투자자가 중요하다고 해도 순서가 바뀌었다.
-띠링!
전화 끊고 바로 예약했는지 양호석 감독한테서 문자가 들어왔다.
“하!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수작이지?”
문자를 확인한 김 실장이 기가 찬 듯한 소리를 냈다. 저녁 식사라더니 예약한 장소가 아무리 봐도 밥을 먹을 만한 곳이 아니어서였다.
[클럽 새비지 8시]술과 유흥을 즐기는 이런 장소로 재인을 불러내려 했다는 게 어이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