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ight Summoner of the Knights Academy RAW novel - Chapter 184
184화.
덜컹.
옥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 세찬 밤공기가 밀려온다.
새벽에 혹시라도 누가 일탈을 즐기고 있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오늘은 공석이다.
선도부가 나름대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니 그 여파라고 볼 수도 있겠고, 졸업반이던 선배들이 반면교사가 되어줬기 때문도 있겠지.
특히나 연초 같은 건 지난번 잎담배 사건 이후로 아카데미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굳이 옥상에 올 필요가 있나?”
힐다가 있으니까라는 말이 입안에 맴돌다 들어간다.
억지로 로만을 옥상으로 데려온 이유 정도는 오면서 대강 생각해 뒀다.
“소등 시간이라 불을 꺼야 돼서요. 안에서 불 끄고 얘기하는 거보다 달빛 받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더 좋지 않아요?”
“……기사답지 않게 운치가 있구나.”
윤 같은 검객이나 할 법한 사고방식이긴 했다.
굳이 답하지 않은 채로 로만을 바라본다. 왕국 최고의 기사 나으리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궁금했다.
특히나 로젤리아 학장이 로만 레이먼드에 대해서 물었던 게 바로 오늘이었기에 궁금증은 더욱 커졌다.
“후우.”
옥상 난간에 기댄 로만이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가 지니고 있는 삶의 무게가 왜인지 방금 그걸로 조금 내려간 듯 보였다.
“이안 아이넬, 하나만 솔직하게 답해줄 수 있나?”
“아뇨.”
“…….”
냉정하게 딱 잘라 답하자 분위기를 잡던 그가 오히려 당황한다.
하지만 솔직하게 답할 수 없는 질문에는 당연히 답할 수 없다.
아마 이 나이대의 소년 중에는 대륙에서도 내가 가장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을 테니까.
“보통 이런 때는 알겠다고 답해주지 않나?”
“아직 그렇게까지 저한테 신뢰를 받지는 못하시는데요.”
만약 은빛사자 연구회 부원들이었다면 얘기가 좀 달랐겠지.
기껏해야 대련 몇 번이나 해본 아저씨한테 뭘 털어놓겠는가.
“그건 그렇지.”
자조적인 미소.
방금 그 부분에서 그의 뭔가를 건드린 걸까. 로만은 한숨을 내쉬더니 속에 담고 있던 걸 털어놓기 시작했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를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단다.”
“면접 때였죠?”
스스로를 레이먼드 가문이라고 지칭하는 놈팡이 얼굴 한번 보겠다고 찾아갔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다.
하지만 막상 그때 본 건, 자신이 진짜 나의 후손이라고 믿고 있는 자긍심으로 똘똘 뭉친 남자였다.
당시의 얘기를 하니 자연스럽게 그때와 지금의 그를 비교하게 된다.
지금 로만 레이먼드는 훨씬 약해졌으며, 두르고 있던 자긍심은 어느새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그가 무엇 때문에 온 건지 알 것 같았다.
“당시 네가 내게 물었지. 정말로 라인 레이먼드의 후손이냐고.”
“…….”
“그때 당시에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생도라고 해도 나를 모욕하는 너를 그냥 둘 수 없었지.”
하지만 그는 나와 눈을 맞추며 뭔가를 느낀 듯 몸이 굳었고.
나는 다소 감정적으로 변해서 밖으로 나왔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당돌한 행동이었구나 싶었다.
뭐, 다시 돌아가도 똑같이 하겠지만.
“라인 레이먼드라는 위대한 기사의 피를 이어가고 있는 건 내게 있어 불변의 진리이자 자긍심이었다. 어릴 적 그분의 전설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고, 내가 그분의 후손이라는 게 자랑스러웠지.”
‘묘하게 듣기 힘드네.’
그는 모르고 하는 말이겠지만 직접 옆에서 저런 말을 듣고 있는 게 생각보다 오글거렸다.
“이안 아이넬.”
양손으로 눈가를 감싸 쥐며 탄식처럼 나를 부르는 로만.
그의 목소리에는 미약한 떨림이 있었다.
“너는 어떻게 알았지?”
“…….”
“내가, 아니… 우리가…… 거짓된 존재들이었다는 걸.”
결국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건가.
이런 날이 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빠르게 찾아올 줄은 솔직히 몰랐다.
떨리는 목소리로 내게 물어 오는 그를 보며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는 게 옳은 걸까.
원래라면 그냥 얼버무리는 게 맞겠으나.
의외로 내 안에서 얼버무린다와 사실대로 답한다는 쪽의 저울이 비등함에 조금 놀라고 있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로만 레이먼드라는 남자의 인품에서 비롯된 결과이겠지.
자신의 가문이 절대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비화를 내게 풀고 있다.
그냥 묻는다면 아무런 변화도 없고, 일평생을 지금처럼 영광의 자리에 서 있을 수 있겠으나.
그는 굳이 내게 와서 솔직하게 말하며, 진실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
그걸 보며 나는 천천히 손바닥에 마나를 집중시킨다.
마법진이 그려지며 그곳에서 튀어나온 건 성검.
뜬금없다고 생각했는지 로만이 손을 떼고 나를 바라본다. 옥상으로 자리를 옮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검 뽑아.”
“……뭐?”
내가 갑자기 말을 놓아서일까, 아니면 방금까지 보여주던 분위기와는 사뭇 달라서일까.
그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뭔가에 홀린 듯 내 말을 따르기 시작한다.
천천히 옥상 가운데로 와서는 검을 뽑는다.
순간적으로 펼쳐진 대련.
이전에도 대련을 몇 번인가 한 적 있었으나, 그때랑 지금은 다르다.
나는 진심으로, 로만 레이먼드에게 나의 검을 쏟아냈다.
철과 철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경쾌한 노동요처럼 새벽하늘에 울려왔다.
확실히 로아 제국에서 상대했던 폴 벨크터스보다 높은 수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두운 표정이던 로만은 점차 대련에 집중하기 시작하면서 표정이 펴졌는데….
카앙!
마지막으로, 내게 밀려 자신의 검을 놓친 순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르 보고 있었다.
“어떻게 레이먼드 가문이 숨기고 있던 비밀을 알고 있었냐고?”
증거는 충분히 보여줬다.
“알 수밖에 없지.”
검술과 은발.
마지막으로 가슴에 있는 마몬의 각인까지 옷 덜미를 살짝 내려 확인시켜 줬다.
“나는 자손 같은 거 안 남겼으니까.”
덤덤하니 진실을 털어놓자, 로만은 순간 당황한 듯 보였다.
하지만 곧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조금씩 표정이 변해갔다.
처음 나와의 만남. 라인 레인먼드와 같은 은발에 똑 닮은 외모. 생도라고 믿을 수 없는 실력.
레비아탄과의 전투. 그리고 지금의 내 태도와 마지막으로 내 가슴에 자리 잡은 마몬의 각인까지.
논리적으로는 이해되지 않겠지만, 아마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내가 라인 레인먼드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듯했다.
로만 레이먼드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 왔다.
“라, 라인 레이먼드 님?”
그 말에 작게 고개만 끄덕이며 동의했다. 누구도 질문에 긍정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쿵!
내 대답을 보는 순간, 로만이 바닥에 이마를 찍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로만은 나를 향해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
“정말, 정말 죄송합니다!”
그가 사과할 일이 뭐가 있을까.
가문의 비밀을 알고도 묻으려 하지 않고 이렇게 나를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로만 레이먼드는 용서받기 충분했으며 또한 그렇기에 진실에 도달할 자격이 있었다.
“당신의 전설을 더럽혀, 죄송합니다아아!”
그럼에도 로만의 사죄는 계속해서 이어져 갔고.
그러지 않으면 본인이 버틸 수 없어 보였기에 나는 묵묵히 들어줄 뿐이었다.
* * *
“크흡, 못난 꼴을 보였습니다.”
“아냐, 괜찮아.”
고작 몇 분 사이에 서로를 향한 존칭이 바뀌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슬슬 해가 떠오르고 있다.
잠을 못 자긴 했으나 강의 들을 때 자면 된다. 그것보다는 로만에게 묻고 싶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진실을 밝힐 생각입니다.”
“진실?”
“네, 이대로 당신의 위상을 더럽히며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꽤나 확고하게 각오를 다진 표정.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각오는 변치 않는단 표정을 짓고 있으나.
그래도 해줄 말은 있었다.
“괜한 짓일 수도 있어.”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랑 네 가문을 위한 게 아니라. 왕국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
로만의 입이 다물어진다.
우상이라 부르던 나를 만나서, 여러모로 흥분한 건 알겠으나 침착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나 왕국 제일의 기사단을 맡고 있는 기사단장이면 더더욱.
“왜 왕국에서 있지도 않은 내 후손을 만들어서 레이먼드 가문이라고 내놨겠어. 어? 심지어 나는 쓰레기장 출신인데 귀족 태생이라고 역사서에는 적혀 있더라.”
“쓰, 쓰레기장 출신이셨습니까.”
그런 부분까지 바뀌었을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로만.
하지만 내 말은 아직 안 끝났다.
“생각 잘해. 네가 지금 하려는 건 왕국의 과거를 통째로 부정하려는 일이야. 단순히 가문의 거짓말을 밝히고 네가 편해지려는 걸로 끝나지 않는단 소리야.”
“…….”
내 말에 이제야 환상에서 깨어난 걸까. 로만은 신중하니 고민에 빠지기 시작한다.
방금까지 어린아이처럼 굴던 그가 이제야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나라는 존재와의 만남이 그에겐 어지간히도 기뻤던 모양이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시간도 길게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내 말에 동의하며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가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왕실을 믿지 못하게 될 수도 있겠군요.”
시작은 불씨 정도로 퍼지더라도 그게 어디로 번질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로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그는 주먹을 굳게 쥐며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아버님과 왕실. 양쪽 모두와 이야기를 해서 해결법을 찾겠습니다.”
“해결법?”
따로 해결법이 있나 싶었는데 로만은 침착하게 방금 떠올린 듯한 방법을 제시했다.
“과거는 사실 바꾸지 못합니다. 현재 역시, 이게 밝혀지면 큰 소란으로 번지겠죠. 결국 비틀 수 있는 건 미래뿐입니다.”
“무슨 뜻이야?”
“간단합니다. 레이먼드 가문의 대가 저에서 끊기면 되는 겁니다.”
“…….”
“마침 저는 외동입니다. 또한 아직 반려가 될 여인도 없지요. 기사단과 검술에 매진해 있던 터라 그럴 시간도 없었습니다.”
“그건 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닌가.
이건 단순히 로만이 혼인하지 않겠다거나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가겠다는 정도로 그치지 않는다.
레이먼드 가문을 멸족시켰다는 오명을 스스로 뒤집어쓰는 꼴이었다.
아마 왕실은 물론이거니와 시민 중에서도 그에게 질타를 쏟아내는 사람들이 많을 거다.
내가 말하긴 뭐하지만 국민적 영웅의 핏줄이 명맥이 끊긴다면.
“라인 님께서도 이렇게 살아가시지 않으셨습니까.”
“맞긴, 맞지.”
기사단을 성장시키고, 검술에 미쳐서는 주변 여성들은 눈에 들지도 않고 정신없이 살아갔다.
“저도 같은 길을 걷겠습니다.”
“…….”
“이렇게라도 당신을 돕고 싶습니다. 가문이 쌓은 수치를 씻고 싶습니다.”
‘그리고’라며 덧붙인 로만이 씨익 웃어 보였다.
“저는 언제나, 라인 레이먼드 님과 같은 삶을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또한 당신이 만들었던 기사단과 같은 위대한 기사단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
“나의 우상, 제가 당신의 등을 보고 걷는 걸 허락해 주세요.”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으며 경외의 표시를 취하는 로만 레이먼드.
나는 그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툭 두들겨주었다.
“이제 2년 남았어. 내가 졸업하고 은빛사자 기사단으로 돌아가기까지.”
“……!”
퍼뜩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는 로만.
“나는 다시 은빛사자 기사단을 300년 전의 모습으로 되돌릴 거야.”
“아.”
“너의 신성 기사단에게 가장 큰 난적이자 라이벌이 될 거다. 잘 준비해 둬.”
금방 따라잡아 줄 테니까.
웃으면서 그에게 말하자 감격받은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주먹을 꽉 쥔다.
“알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밀리지 않을 기사단을 만들어 두겠습니다. 왕국 최강의 자리를 쉽게 넘겨드리진 않을 겁니다.”
로만의 각오는 만족스러웠다.
그가 앞으로 잘해낼 것이라 믿었고.
로만은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걸어가듯 떠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로만 레이먼드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