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63
눈발이 갈수록 굵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한제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순간 수많은 눈송이가 응집돼 공처럼 뭉쳐졌다. 점점 많은 눈송이가 응집됨에 따라 눈의 공은 점점 단단해졌다.
눈덩이를 바라보던 한제는 혀끝을 깨물어 고신의 피를 한 움큼 뿜어냈다. 고신의 피는 눈덩이를 붉게 물들이며 그 안에 녹아들었다.
눈덩이는 순식간에 얼음 결정이 됐고 한제가 가볍게 두드리자 길게 늘어나 한 자루의 붉은 장검이 됐다.
이번에는 한제의 오른쪽 눈에서 번개 문양이 허상으로 나타났다. 아홉 갈래의 천둥번개에 둘러싸여 있는 극의 경계가 한 가닥 분리되어 붉은 검에 녹아들어 완전히 융합됐다. 그러자 붉은 검에서는 하늘을 뒤덮을 듯 강한 살기가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가 아닌 이상 이 검의 위력을 당해내지는 못할 터. 고향을 떠날 수 없다면 이 검을 주마. 앞으로 누구든 너를 업신여긴다면 본때를 보여주거라.”
한제가 손을 휘두르자 붉은 검은 곧장 서자봉에게 날아가 체내에 녹아들어 그녀의 구명 법보가 됐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청령성에 네 사형이 있으니 도움이 필요하다면 그 검을 가지고 찾아가라.”
한제는 자신의 세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서자봉은 입술을 깨문 채 묵묵히 고개를 들어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8백 년 전의 감정이 묻혀 있었다.
잠시 고민하던 한제는 그녀를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그리고 한 걸음 나서더니 점차 멀어져갔다.
서자봉의 눈에는 뇌선계에서 무너지던 대륙 위 모든 장벽을 파괴하던 당시의 한제와 지금 멀어져가는 한제의 뒷모습이 겹쳐 보였다.
이어서 수많은 수련자를 이끌고 뇌선계 밖으로 나오던 모습, 봉선 대회에서 보인 고고하고 우월한 그의 모습, 눈처럼 하얀 옷을 입은 채 다가오던 그의 모습이 차례로 떠올랐다.
내리는 눈발에 서자봉의 시야는 천천히 흐릿해졌다.
‘이런 결말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서자봉이 고개를 숙였다.
★ ★ ★
수련성을 나선 한제의 눈빛은 서늘했다. 그는 서자봉에게 전수를 해주면서 그녀의 기억을 훑었다. 그녀의 비밀을 엿보려던 것이 아니라 그저 지난 8백 년간 그녀가 당한 모든 치욕과 굴욕을 보고 그 치욕과 굴욕을 안긴 이들을 머릿속에 깊게 새기기 위함이었다.
‘내게 살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야. 아무렇지도⋯⋯.’
한제는 살기 어린 눈빛을 드러낸 채 곧 사라졌다.
★ ★ ★
운동성(雲動星)에서 조가는 두 번째로 강한 가문이었다. 진정한 계승을 받은 가문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이 성역에서만큼은 강력한 힘을 자랑했다.
조가의 현 가주는 본래도 수준이 제법 높았는데 연맹성역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하사받은 단약 덕분에 지금은 정열기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그는 상당히 고고하고 오만한 자였다. 운동성에서의 위치와 자신의 강력함에 기인한 성격으로 그의 삶은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다.
허나 그는 8백 년 전 서자봉을 쫓아다니던 사람 중 하나였고 심지어 강압적인 방법으로 그녀를 차지하려 했던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누군가의 저지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가문의 몰락으로 절망에 빠져 있던 서자봉에게는 큰 상처가 된 일이었다.
허나 조가의 가주는 이미 8백 년이나 지난 이 일은 이미 잊은 채 가문의 대전에 앉아 있었다. 대전 아래로는 가문 구성원들이 가부좌를 튼 채 그의 강론을 듣고 있었다.
한데 그때, 하늘을 뒤덮을 듯 강한 한기가 우주에서부터 운동성으로 훅 끼쳐와 조가의 대전을 그대로 휩쓸었다. 그 가운데 한 줄기 검기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날아들어 곧장 가주에게로 달려들었다.
“헛!”
검기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가주의 몸을 꿰뚫었고 조가의 가주는 육신은 물론 원신까지 순식간에 소멸해 버렸다.
천막성(天幕星) 동래가의 대장로는 자애롭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3백 년 전 정열기 절정에 이른 뒤로 농부처럼 정원을 가꾸고 화초를 정성껏 길러오며 수련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장로가 되기 이전인 8백여 년 전, 서가의 벗이었던 그가 서자봉을 겁박해 서가 선조의 법보를 취하고 그녀의 얼굴을 훼손시켰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명천으로 된 옷을 입은 채 일반인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꽃을 가꾸는 그의 뒤로 세 명의 중년 사내가 공손하게 서 있었다.
“수련이란 꽃을 기르는 것과 같다.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 세상의 변화를 느끼는 것이지. 그래야만 진정한 천도를 깨달을 수 있는 법이다.”
“참으로 현명하십니다.”
세 중년 사내가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그때, 천막성이 크게 진동하더니 하늘과 땅의 색이 바뀌고 바람과 구름이 마구 휘몰아쳤다. 그와 동시에 한 줄기 검기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더니 순식간에 대장로의 몸을 관통했다.
그 순간 노인의 육신과 원신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가 들고 있던 물뿌리개만이 멀쩡한 모습으로 땅에 떨어져 있었을 뿐이다.
자묘성(紫渺星) 노가는 나천성역 남부의 4대 가문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이 가문의 소족장은 엄청난 뒷배와 높은 수준 때문에 누구도 감히 그를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 순간, 그는 폐관수련을 하는 곳에서 나체로 어느 여자 수련자와 뒤엉켜 있었다. 짐승의 것과도 같은 숨소리가 거칠게 울려 퍼졌다.
그와 뒤엉켜 있는 여자 수련자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안색은 창백했다. 그리고 곧 그녀의 예쁜 얼굴은 빠르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 말라붙은 해골이 되어 버렸다.
뒤이어 여자 수련자는 칠규로 피를 철철 흘리며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죽음을 맞았다.
“다음!”
몸을 일으킨 사내는 그런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곁에 있던 수련자가 얼른 다가와 여인의 시체를 치웠고 뒤이어 이지를 상실한 듯 멍한 표정의 여자 수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내는 그 여자 수련자를 덥석 잡아채 그녀의 수준을 취하려 했다. 한데 바로 그 순간, 하늘을 뒤흔들 정도로 요란한 쉭 소리가 자묘성의 하늘에서 전해져왔다.
하늘 끄트머리에서 시작된 이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찰나 사내가 폐관수련을 하고 있던 곳의 지붕이 터져나갔다. 돌 조각이 사방으로 튀는 가운데 화들짝 놀란 사내는 여자 수련자를 방패로 세웠다.
그때 한 줄기 검기가 달려들어 여자 수련자의 몸을 관통했다. 허나 그녀에게는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고 곧장 사내의 미간을 통해 그의 체내로 파고들었다.
쾅!
짧은 굉음과 함께 사내의 육신은 그대로 터져버렸고 곁에 있던 여인은 사내의 피를 뒤집어쓴 채 정신을 차렸다. 두 눈에는 이지가 돌아온 상태였다.
★ ★ ★
나천성역의 우주.
한 무리의 수련자가 두 개의 수련성을 끌고 이동 중이었다. 이들을 이끄는 노인은 매우 엄숙해 보였고 그를 따르는 수련자들은 모두 그에게 공손하게 굴었다.
한데 그때, 전방에 한 줄기 검기가 나타났다. 이어서 이들이 미처 반응을 하기도 전에 날아든 검기는 쾅 하는 거대한 소리와 함께 무리를 이끌던 노인의 체내로 뚫고 들어가 그를 붕괴시켰다.
이와 비슷한 장면들은 수라성의 전가 파공성(破空星)의 손가 심령성(尋靈星)의 이가를 비롯해 나천성역 곳곳에서 연속적으로 일어났다. 지난 8백여 년간 서자봉을 건드리거나 괴롭힌 이들 중 이 검기를 마주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 검기는 뇌선전까지 찾아갔다.
뇌선전은 전쟁 준비가 한창이었다. 수백 개의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진 밖으로 수많은 뇌선전 수련자들이 곳곳에서 가져온 수련성들을 연결해 진을 늘리고 있었다.
한데 그때, 돌연 열한 개의 검기가 나타나 각자의 방향으로 쏘아져 나갔다. 그중 한 검기는 어두운 얼굴로 진을 배치하고 있던 중년 사내의 몸을 꿰뚫었다. 사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깨닫기도 전에 그대로 죽음을 맞았다.
눈 깜짝할 사이 열 명이 숨을 거둔 상황이었다.
마지막 열한 번째 검기는 진의 가장 깊은 곳의 회오리로 향했다. 그러더니 그 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인을 찔러 들었다.
“흡!”
노인은 갑작스레 몸을 바르르 떨었고 이내 육신이 터져나갔다.
“이, 이게 무슨 일이냐!”
“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뇌선전의 수련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한제는 신식의 감응에 의지해 백여 개의 검기로 나천성역을 휩쓸었다. 이는 그가 서자봉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었다.
제자의 복수를 마친 한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 뇌선전이 수련성으로 만든 진 근처에 나타났다.
그는 이 거대한 진의 중앙을 바라보았다.
진의 눈을 차지하고 있는 회오리와 수많은 뇌선전 수련자들을 살피던 그는 이어서 말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차분한 걸음이었으나 그가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천둥번개가 내리치듯 우렁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뇌선전의 수련자들은 창백한 얼굴로 모두 물러났다. 동림성 사람들처럼 이성을 잃고 죽을 때까지 싸울 마음은 없었던 것이다. 빠르게 물러나며 길을 열어주는 모습은 마치 썰물이 빠져나가는 모습 같았다.
그때, 한제가 다가오자 진의 중심에서는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대한 회오리에서 터져 나온 노부자의 웃음이었다.
회오리에서 튀어나온 웃음소리는 온 세상을 뒤흔들며 형태 없는 파도가 되어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한제는 우뚝 멈춰 섰다.
콰쾅!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노부자와 한제의 첫 번째 대치였다. 직접적으로 공격을 한 사람은 없었지만 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다른 사람은 이를 저지하려 했다.
노부자의 웃음소리에는 세 번째 단계의 힘이 어려 있어 온 우주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진동했고 곳곳에 거대한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들은 예리한 검처럼 한제에게 달려들었다.
콰르릉!
음파가 광풍처럼 몰아쳤다. 노부자의 강력함이 여실히 담긴 음파로 다섯 번째 천쇠에 이른 수련자라 해도 곧장 육신이 갈라지고 원신이 무너져 내릴 위력이었다. 어지간한 공열기 초기 수준 수련자조차 뚫고 나아가긴 힘들 터였다.
허나 한제 비록 세 번째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어도 도고의 유산을 통해 7성급 고신이 된 상태였다. 그 강력한 육신은 세 번째 단계 수련자에게도 충분히 맞설 만했다. 그렇기에 한제는 여전히 침착할 수 있었다.
‘이 세상에 고신의 고함, 특히 도고의 고함에 비할 수 있는 음파는 없지!’
한제의 미간에서 고신의 반점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일곱 개의 반점이 회전함에 따라 고신의 힘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고 뒤로는 거대한 허상의 머리가 나타났다.
그 머리가 나타난 순간, 한제는 거대한 진 중앙의 회오리를 향해 우렁찬 고함을 내질렀다.
포효와도 같은 고함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노부자의 웃음소리를 무너뜨리더니 사방을 휩쓸었다. 비록 오래된 무덤에서 한제의 입을 빌려 울려 퍼져 장존마저 물리친 기이한 존재의 고함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분명 강력한 기세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