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70
눈앞에 펼쳐진 우주가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헛되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계내와 계외가 어느 선존이 만들어놓은 동부 속의 세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수는 없었다. 말을 해봐야 믿을 사람도 매우 적을 것이고 만약 믿는다면 큰 충격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도환과의 술 한잔
주작성 밖. 천벌이 일으킨 안개는 일찍이 흩어져 사라진 상태였다. 사도환을 포함한 수천 명의 수련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한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한제의 모습이 우주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순간, 우렁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수천 명의 수련자는 한제의 이름과 봉계의 지존이라는 칭호를 연호했다.
한제는 그 환호에 더욱 마음이 착잡해졌다.
‘봉계의 지존이라⋯⋯. 선대 봉계 지존은 선존의 수하에 불과했다. 그는 계내 사람이 아니라 선강 대륙에서 온 사람이었고 선인의 혈맥을 가지고 있었어. 그가 계내에 온 것은 이곳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존을 위해서였지. 어쩌면 그러다가 이곳에서 세월을 보내는 동안 계내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꼈는지도… 하지만 그래봐야 이곳 사람이 아니야. 그저 외부인일 뿐⋯⋯.’
울려 퍼지는 환호가 한제의 귀에는 아주 멀게 느껴졌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한제는 봉계의 지존이라는 칭호도 그저 혼란스러웠다.
한참 후에야 수천 명의 계내 수련자는 점차 환호를 멈추었다. 그리고 가만히 한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한제는 그들 하나하나를 바라보면서 그의 씁쓸함은 점점 커졌다. 그는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다. 나와 너희를 비롯한 모든 이들은 그저 어느 동부 안에 사는 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하늘은 하늘이 아니며 우리가 보는 땅도 진정한 땅이 아니라는 것을…
계외와 치른 전쟁도 저들이 보기에는 장난에 지나지 않으며, 심지어 우리가 수련했던 신통술도 우리가 추구했던 목표도 전부 허상일 뿐이라는 것을…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이곳에 존재하는 진실은 피와 고통, 오랜 세월 쌓여온 시체뿐이라는 것을…
그 순간, 한제의 머릿속에 칠백만천지의 산령상인이 떠올랐다. 둘은 비슷한 일을 겪었지만 산령상인이 훨씬 나은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가짜 세상에서 진정한 세상으로 나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한제의 침묵과 그의 눈에 떠오른 혼란의 빛을 눈치챈 것은 사도환뿐이었다. 허나 그도 한제가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풀이 죽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도환, 술 있습니까? 취하고 싶군요. 마지막으로⋯⋯.”
묵묵히 다가온 한제는 사도환 곁에 이르자 피로와 혼란으로 뒤덮인 눈빛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물론 있지!”
사도환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원한다면 내 함께 취해주겠다!”
★ ★ ★
주작성의 어느 이름 모를 산꼭대기. 한제와 사도환은 어둑어둑한 하늘 아래 묵묵히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천 명의 수련자는 주작성 곳곳에서 각자 가부좌를 튼 채 호흡을 했다. 그들은 기다리는 중이었다. 산에서 내려온 한제가 자신들을 이끌고 나천의 위기를 해결하고 나아가 계내를 수호해주기를…
“사도환, 사람은 왜 살아가는 걸까요?”
한제는 혼란에 빠진 눈으로 지나가듯 물었다.
“숨을 쉬기 위해서지!”
잠시 침묵하던 사도환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려놓더니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그 균열은 무엇이었냐?”
한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쓰게 웃더니 술을 벌컥 들이켰다.
“예전에도 이렇게 함께 술을 마셨지요.”
한제는 사도환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듯 중얼거렸다.
“그때 저는 혼란에 빠진 채 술을 마셨습니다. 수련을 하고 싶지도 않고 수련을 왜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지요. 수련을 한다고 즐거운 것도 아니고⋯⋯ 그에 따라오는 것이라고는 피로와 위기뿐이었고 제 손에 수많은 이들이… 아주 많은 이들이 죽었으니까요.”
한제는 피식 웃더니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물었죠. 이해할 수가 없다고 사람은 왜 수련자가 되기를 원하는 거냐고… 장수하려고? 오래 산들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가까운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 가는데… 사랑하는 이가 죽어가는 것을 가족이 떠나가는 모습을 벗이 눈감는 모습을 보고 끝내 세상에 홀로 된 듯한 기분에 사로잡히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지친 몸으로 그런 삶을 이어가봐야 무슨 소용이냔 말입니다! 사도환, 저를 수련자의 길로 이끈 당신이 답해주십시오. 그게 다입니까?”
한제는 술병에 남은 술을 전부 털어넣고는 빈 병을 한쪽으로 내던지며 물었다.
“우리가 주작성에 있었을 때, 네가 아직 연기기 수준이었을 때… 넌 부모님과의 연을 속세와의 정을 끊어버릴 수 없고 끊어버리고 싶지도 않다고 했지. 그때 난 그렇게 답했다. 수련자가 꼭 칠정육욕을 끊어버릴 필요는 없다고⋯⋯.”
사도환은 평소의 장난기어린 모습이 아닌 진지한 선배 수련자의 모습으로 답했다.
“그 연을 끊어버리기 싫고 끊어버릴 수도 없다면 당연히 그런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다. 네가 그냥 죽어버린다면야 아무런 상관도 없을 일이었겠지만 넌 죽지 않았다. 지난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련해오면서 지금과 같은 경지에 절정에 이르고 나니 그제야 장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혼란스러워 내게 묻는 것이지.”
사도환은 잠시말을 끊고 생각에 잠겼지만 한제는 재촉하지 않았다.
“장수… 이 세상에 장수란 없다. 내가 보기에 장수라는 건 스스로를 더욱 오래 살게 하면서 스스로를 더욱 강하게 만들고 스스로의 인생을 다른 누가 좌지우지하지 못하도록, 더욱 자유롭게 만드는 것이다. 또한 장수는 우리 모두가 젠장할 죽음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기 때문에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허나 나는 네가 이 사실을 모를 거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 말해보아라. 그 균열 안에서 대체 무얼 본 것이냐?”
사도환 역시 술을 마신 뒤 빈 병을 내던지며 한제를 향해 호통 치듯 물었다.
“절정이라⋯⋯. 저는 아직 절정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절정에 이르렀다 해도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저는 다른 수련자들과는 다릅니다. 저는 수련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소년이었을 때에도 부모님을 위해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기 싫어서, 그분들을 실망시키기 싫어서 이를 악물고 대산파에 갔던 겁니다! 하지만 그 결과가 뭡니까? 운명은 저를 희롱했지요.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고자 수련의 길에 올랐지만 그 때문에 부모님이 살해당했습니다.”
한제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이후 제 수련은 오로지 복수를 위한 것이었지요. 살인귀가 되어 등씨 가문을 몰살시키고 그 피로 강을 이루었습니다! 복수를 마친 뒤로는 혼란에 빠진 채로 대우가 크는 것을 그 아이의 부모가 죽는 것을 그 아이의 평생을 보았습니다. 제가 뭘 해야 할지, 제 길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지요. 모완이 죽은 후로는 그녀의 부활을 위해 수련했고요.”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저는 강해지기를 원했습니다. 살아남기를 원했습니다. 모완이 살아나기 전까지는 죽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여인을 운명의 고리에서 되찾아오기를 바랐습니다. 그 후에는 봉계의 지존이 되어 계내와 계외의 전투에서 유명세를 얻었고요. 허나 제가 원했던 것은 없습니다! 저는 봉계의 지존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았고 여전히 수련자의 길에 올랐다는 사실이 끔찍이도 싫습니다!”
한제는 사도환을 바라보며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로 흐른 술이 옷깃을 적셨다.
“이놈!”
사도환은 한제와 그의 눈에 떠오른 혼란한 빛을 보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한참이나 말없이 술만 마셨다.
“균열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답하기 싫다면 묻지 않겠다. 됐느냐?”
두 사람은 말없이 술병을 비워갔다. 그러다가 저 멀리 하늘 끄트머리가 밝아올 무렵, 한제가 입을 열었다.
“그 균열은⋯⋯ 원고 선역이었습니다.”
사도환은 흠칫 놀라 벌떡 일어나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하늘을 뚫고 이미 사라진 균열에 닿은 듯했다.
“원고 선역! 전설에 나오는 그 원고 선역이라고? 그곳에 살고 있는 진정한 선인도 보았다는 말이냐!”
사도환은 충격에 빠진 듯한 눈으로 따지듯 물었다.
“보았습니다. 그중 한 명을 죽이기도 했지요.”
한제는 씁쓸한 얼굴로 술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한참 동안 한제를 바라보던 사도환은 눈을 끔뻑이다가 쓰게 웃었다.
“그다음에는? 네 성격에 사람을 죽이고 곧장 그곳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 아니냐. 선인의 기억을 뒤졌느냐?”
한제는 복잡한 눈빛으로 사도환을 바라보았다.
“그 선인의 기억을 뒤진 끝에 계외와 계내에 관련된, 이 세상에 관련된 비밀을 하나 알게 됐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한제는 또다시 깊은 침묵에 잠겼다. 그의 눈빛은 혼란으로 흔들렸다.
“계내도 그렇고 계외도 그렇고 실은 그 모든 것이 거짓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그저 허상에 불과하다고 말한다면⋯⋯ 믿겠습니까? 우리가 해온 모든 수련과 그 모든 것이 누군가에 의해 제한된 것이라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당신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이, 여태 살아온 이 세상이, 그저 하나의 철창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의 동부 안에 마련된 곳에 불과하며 향불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곳이라고 한다면… 믿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냐!”
사도환이 놓친 술병이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한제는 쓰게 웃으며 충격을 받은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도환을 바라보더니 술병을 기울였다.
“그게 바로 제가 선인의 기억 속에서 알아낸 것들입니다. 선대 봉계 지존… 그자 역시 이곳이 아닌 원고 선역 출신입니다. 제가 이전에 보았던 태고 성신 내의 몇몇 선비와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칠채도인도요. 그들은 선강 대륙이라는 곳에서 왔습니다. 계내와 계외를 합친 것의 몇 배에 달하는 곳이죠. 그리고 우리가 있는 이곳은…”
한제는 허무한 듯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선강 대륙 내 칠도종이라는 종파의 종주인 칠채선존이 만들어놓은 동부 안의 공간입니다. 우리가 보는 하늘은 그 동부 안의 하늘이고 우리가 보는 땅은 그 동부 안의 땅… 계내와 계외라는 것도 그저 그 동부 안의 철창 내외부에 불과한 것이죠. 우리가 여태 수련해온 도가 그 천도가 선존이 빼앗아온 뒤 양육한 것이라면… 그가 천도를 빼앗아 동부 안에서 양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희를 비롯한 그 수많은 생명이 탄생했다면 이 모든 것을 믿겠습니까?”
사도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쩌면 충격에 대답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천도가 없었다면 선존이 그때 천도를 빼앗아오지 않았다면… 이 동부에 저희는 나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저 평범한 동굴로 남았겠지요. 이 모든 것을 알게 됐으니 어찌 혼란스럽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어째서 살아가는 것인지, 존재란 무엇인지, 왜 숨을 쉬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한제의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천도는 선존에 의해 길러져 왔습니다. 이곳에 사는 모든 생명은 천도에 의해 태어난 것이고요. 선존이 천벌을 만들어낸 것은 이렇게 탄생한 생명 중 이 규칙과 계획을 방해하거나 바꾸려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해서입니다. 농부가 잡초를 뽑는 것처럼. 허나 세월이 흐르다 보면 더욱 강하고 질긴 잡초가 나타나게 마련이지요. 그 잡초들은 매우 빠르게 자라나면서 보이지 않는 농부만의 계획을 어그러뜨리지요. 천벌은 바로 이처럼 정해진 계획과 규칙을 파괴하는 잡초 같은 존재, 그들이 역수라 부르는 존재를 제거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렇게 한제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사도환이 받는 충격도 커졌다. 그는 이제 멍한 눈으로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반쯤 숙인 채 한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 또한 잡초였죠. 허나 이 잡초는 천벌로도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천벌을 소멸시켰습니다! 저는 천벌을 소멸하고 그 천벌에서 제 운명을 되찾았으며 이 세상과 관련한 비밀을 알아냈습니다. 물으셨으니 답했지만 이 모든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환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다시 술을 들이켰다. 흔들리는 눈빛으로 보아 한제의 말을 믿는 것 같기도 동시에 믿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한 말이었다면 설령 그의 스승인 청림이 한 말이라 해도 사도환은 믿지 않았을 터였다. 그만큼 허무맹랑하고 황당무계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름 아닌 한제가 한 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해왔기에 한제를 잘 알고 있는 사도환으로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이 그저 어느 동굴 안의 공간에 불과하다니⋯⋯. 그렇다면 계내와 계외의 전쟁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사도환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책임감
사도환의 눈에는 서서히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그는 본래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었지만 지금 들은 이야기는 그로서도 웃어넘길 수는 없었다.
‘만약 한제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이라면 나는 무엇인가? 내가 여태 느꼈던 즐거움은 정말 즐거움인가? 나는 그저 꼭두각시 중 하나였나? 어느 기이한 존재가 짜놓은 각본대로 살아왔던 것인가? 마치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개미굴을 오가며 삶과 투쟁하던 개미들처럼?’
“계내와 계외의 전쟁에 대해서 추측한 바는 있지만 아직 완전히 밝혀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계획이 있어요. 3년 후면 모든 진실을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