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75
어느 수련성.
분홍색 옷차림의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의 뒤로는 곤허성역 내 수련자 연맹의 수련자들이 모여 있었다. 수련자 연맹이 와해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살아남은 수련자는 적지 않았다. 다만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쟁으로 이곳에 남은 수는 3천 명 정도에 불과했다.
곤허성역 출신인 이들은 지친 상태였지만 그럼에도 분홍색 옷차림의 여인 곁에 꼿꼿이 선 채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그들의 상공을 둘러싼 빛의 장막 역시 계외 수련자들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웃통을 벗은 중년 사내로 그 역시 계외의 세 번째 단계 수련자 일곱 명 중 하나였다.
척 보기에도 잔인함이 느껴지는 그는 바람과 번개를 일으켜 빛의 장막을 거세게 공격했다. 그 한 사람의 공격이 나머지 수만 명의 공격과 맞먹을 듯했다.
이에 빛의 장막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 왜곡됐고 불안정한 기색을 보였다.
“모든 것이 끝나려 하는구나. 이 역시 나쁘지 않아.”
분홍색 옷의 여인은 피로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둔 그녀는 곁의 곤허성역 도우들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막 무슨 말인가를 하려던 순간…
콰쾅!
돌연 저 멀리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또 하나의 수련성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그 안의 계내 수련자 수천 명은 남색 옷을 입은 노인의 손짓 한 번에 죽음을 맞았다.
수련성이 하나씩 소멸될수록 진의 위력 또한 크게 줄어들고 있었다.
“계내에서 태어나 계내의 혼으로 죽는 것인데 어찌 이리 내키지 않는단 말인가? 난 아직 그에게 내가 누구인지 알리지도 못했는데⋯⋯.”
분홍 옷의 여인이 고개를 저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 ★ ★
진의 서쪽, 수만 명의 계외 수련자가 퍼붓는 공격 아래 무너질 듯 왜곡되고 있는 빛의 장막 안. 서자봉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곁에는 수많은 나천성역 수련자가 서 있었는데 그중에는 전공열과 신공호도 있었다. 또한 염뇌자도 함께였다.
이들은 모두 나천성역 출신이었다. 빛의 장막 밖에서 달려들고 있는 수만 명의 계외 수련자를 마주한 이들은 조금씩 무너지고 있는 빛의 장막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빛의 장막이 완전히 무너지는 순간 생애 마지막 전투에 임할 각오였다. 자폭을 통해서…
그런 결심을 한 것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었다. 사실 이 진 안의 수련성을 지키고 있는 계내 수련자들은 대부분 같은 선택을 했다.
그때 멀리서 또 하나의 수련성이 무너졌다. 그와 동시에 강력한 힘을 품은 한 줄기 푸른 빛이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진 안에서 튀어나가 계외 수련자 대군에게 달려들었다. 그 빛의 주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검은 옷을 입은 공현기 수준의 노인에게 돌진했다.
쾅!
충돌의 순간, 푸른 빛은 흩어지면서 뒤로 몇 걸음 밀려났고 검은 옷을 입은 노인도 뒤로 1천 척 정도 밀려났다. 허나 노인은 비릿하게 웃으며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고 그러자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의 선계의 선제 청림! 과연 선대 봉계 지존의 제자답구나! 나보다는 수준이 확연히 낮지만 향불의 힘을 빌렸어!”
흩어진 푸른 빛에서 청림이 모습을 드러났다. 그는 이미 큰 부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잠시 휴식을 취하고는 곧장 다시 계외의 수준 높은 수련자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계외 수련자들에게 포위된 순간부터 그는 계속 이렇게 저항해 왔다.
그때,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진 안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가 싶더니 보라색 옷을 입은 한 여인도 걸어 나왔다.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눈빛만큼은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여인으로 소하성역의 주인이었다.
그녀가 나타나자 진을 지켜보고 있던 계외 공현기 수준 수련자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당시 칠현금 소리로 한제의 오장에 타격을 입혔던 선비가 소하성역의 주인에게 달려들었다.
★ ★ ★
진의 중심, 짙은 안개로 뒤덮인 제단. 가부좌를 튼 청수가 있었다. 안개에 뒤덮여 흐릿해 보이는 그는 몸을 덜덜 떨었고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는 듯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또한 칠규는 일곱 갈래의 검은 연기로 뒤얽혀 있었다. 이 일곱 갈래의 검은 연기는 마치 일곱 마리 독사처럼 꿈틀거렸다.
청수의 뒤로는 홍삼자가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는 결인을 그린 두 손으로 계속해서 청수의 등을 두드리며 그에게 뒤얽혀 있는 일곱 갈래의 검은 기운을 떨쳐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홍삼자 나는 신경 쓰지 마라!”
눈을 부릅뜬 청수의 눈동자가 흐려졌고 주위로는 일곱 개의 검은 점이 나타나 맴돌았다.
“내가 돕지 않으면 자네는 3각 안에 죽어!”
홍삼자는 굵은 땀을 흘리며 오른손을 바깥쪽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검은 빛이 나타나 꼭두각시가 되더니 진 밖으로 돌진했다.
꼭두각시를 내보낸 홍삼자는 계속해서 청수의 등을 두드렸다.
청수는 이를 악문 채 낮은 고함을 내지르며 체내로부터 살육의 본원을 발휘했다. 이 살육의 본원이 홍삼자가 뻗은 손가락 끝에 닿은 순간, 청수는 몸을 크게 휘청이며 피를 토해내더니 소리쳤다.
“신경 쓰지 말라니까!”
홍삼자는 슬픈 눈빛으로 그런 청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제단으로 향했다.
장존의 출현
제단 밖으로 나온 홍삼자를 맞이한 것은 계외의 공현기 수련자인 노파였다.
제단 위에 홀로 남은 청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계속해서 피를 토해냈다. 전보다 더 흐릿해진 눈빛으로 그는 몸부림을 치듯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어느 수련성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이 있는 곳이었다.
“저 아이인가? 아마도 맞겠지⋯⋯.”
청수의 눈에 부드러운 빛이 드러났다. 그녀를 발견한 것은 벌써 몇 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직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때, 그 분홍 옷의 여인이 있는 수련성을 뒤덮은 빛의 장막이 웃통을 벗은 중년 사내의 공격에 무너져 내렸다. 중년 사내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수만 명의 계외 수련자들과 함께 돌진했다.
청수는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의 어두운 눈에 돌연 생애 최후의 빛이 강하게 번득였다. 그는 이미 부모님을 잃었고 스승을 잃었으며,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다. 선계의 모든 벗을 잃었고 심지어는 한제마저 죽음으로 잃은 상태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저 여인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그 여인에게서 청수는 자신이 찾던 딸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몇 년 전 그 기운을 느낀 청수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후, 그는 수시로 그 여인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녀가 자신의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지금 청수에게는 그녀가 전부였다. 그런 딸의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목숨 따위는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더욱이 딸에게 큰 죄책감을 가진 그로서는 절대로 딸이 해를 입도록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크아아!”
짐승과 같은 포효를 내지른 그는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오른손으로 제단을 후려쳤다. 그러자 쾅 하는 우렁찬 소리와 함께 그의 손이 닿은 곳에서 균열이 일더니 강한 반동이 제단 밖으로 발산됐다.
그 반동을 이용해 제단으로부터 몸을 훌쩍 날린 청수는 짙은 안개를 뚫고 딸이 있는 수련성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두 눈은 이미 흐릿했고 시야도 불분명했다. 허나 그는 그 수련성 위의 여인만큼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귓가에 울리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빛의 장막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번개와 광풍을 동반한 거구의 사내가 수만 명의 계외 수련자와 함께 들이닥치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밟고 선 수련성이 격렬하게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 수련성은 붕괴하기 시작했다.
대지에는 수많은 균열이 일어나면서 파도가 치듯 격렬하게 뒤흔들렸다.
곁에서는 곤허성역 수련자들이 붉게 충혈된 두 눈을 번득이며 낮은 고함을 내지르고는 분분히 몸을 날렸다. 마치 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광풍이 훅 불어 닥쳤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인의 창백한 얼굴에 기이한 붉은빛이 돌았다. 그녀의 눈빛에서 미련이 사라지고 결의가 들어차는 듯하더니 이윽고 그녀는 한 걸음 성큼 나섰다.
그녀의 수준은 높지 않았지만 그래도 계내의 사람이었다. 죽음은 두렵지만 고향이 적들의 수중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볼 마음은 없었다.
거구의 중년 사내는 비릿하게 웃으며 몸을 날렸다. 전방에서 달려드는 미약한 계내 수련자들은 신경도 안 쓰인다는 듯 그는 오른손을 힘차게 아래로 뻗었다.
그 손짓에 광풍과 번개가 몰아치면서 검은 바람으로 이루어진 폭풍이 형성됐다.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푸른 번개 공이 흩날리고 있었다. 마치 길이가 10만 척에 이르는 검은 뇌룡이 포효하면서 대지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았다.
그런 회오리의 앞을 유일하게 가로막은 것은 바로 분홍 옷의 여인이었다.
뇌룡과 같은 검은 회오리의 꼭대기에 선 중년 사내는 그 회오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면서 수천 명의 수련자를 지나쳐 이내 분홍 옷의 여인과 수백 척 거리에 이르렀다.
“미물만도 못한 것들 같으니!”
사내의 눈에 경멸의 빛이 드러났다. 그의 눈에 앞을 가로막은 여인은 신경 쓸 존재도 아니었다. 그는 벌써 이 수련성에 이어 다른 수련성을 파괴할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허나 그 순간, 사내는 표정이 급변했다. 그는 흠칫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수련성으로 이루어진 진의 중앙 제단 쪽을 바라보았다.
“크아아아!”
제단에서는 짐승의 그것과도 같은 포효가 울려 퍼졌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파괴할 듯한 기세와 의지가 어린 소리였다.
“죽여주마!”
번득이는 붉은 빛과 함께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눈송이가 허공에 나타났다. 이 눈송이는 무궁무진한 한기를 품은 채 빠른 속도로 회전했고 그 사이에서 청수가 튀어나왔다.
그는 거의 광증을 일으킨 상태였다. 그런 그의 몸에서 발산된 살육의 본원이 온 세상을 뒤흔들고 심지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교전을 벌이고 있던 다른 이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모든 세 번째 수련자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렸다.
중년 사내는 청수를 알고 있었다. 또한 공열기 수준에서는 그에게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곧장 멈춰 서서 검은 뇌룡을 통제해 방향을 틀었다.
허나 사내의 그런 행동에 청수는 더욱 광분했고 광기는 전에 없던 수준으로 치솟았다.
“죽어라!”
그때, 분홍 옷의 여인은 방향을 튼 검은 뇌룡과 거의 부딪힐 뻔했다.
찰나의 순간 그곳에 이른 청수는 멍한 눈으로 서 있는 분홍 옷의 여인 앞에 서더니 오른손으로 검은 뇌룡을 움켜쥐어 힘껏 내던졌다.
“죽어!”
청수가 검은 뇌룡을 움켜쥔 순간, 그 주위에 퍼져 있던 수많은 붉은 눈송이가 모여들어 그 용을 감쌌다. 그러자 뇌룡의 몸은 쩌적 소리와 함께 얼어붙었다.
동시에 청수의 손에서는 지금껏 발휘된 적이 없을 정도로 강한 살의가 발산돼 뇌룡의 체내로 주입됐다. 뇌룡은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
“크헉!”
뇌룡에 올라타 있던 사내는 피를 토하며 나가떨어졌다.
청수는 곧장 그자 앞에 이르더니 매섭게 후려쳤다.
쾅!
짧지만 강렬한 굉음이 울려 퍼졌고 거구의 사내는 연달아 몇 번이나 피를 토하면서 수천 척이나 튕겨나갔다. 얼굴의 살점은 다 뭉그러졌고 미간에서 복부까지 이어진 상처로 육신은 거의 찢겨나간 상태였다.